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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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꿈
뿌리의 꿈 박 인 걸 묻어둔 거목의 꿈을 흑암의 깊은 세계에서 아주 작은 촉수로 밝은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수학의 등식 이전부터 기아급수의 원리를 나무뿌리는 깨닫고 있었기에 잎을 허공으로 치밀었다. 잎 새 하나에서 억만 가지로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천만 잎으로 호흡하며 영토를 점령해 나간다. 거미줄처럼 엉킨 차가운 땅을 헤집으면서 든든한 버팀이 되므로 지상의 꿈은 옹골차게 영근다. 거목 옆에 서서 우람스러움에 입을 벌리며 위대한 뿌리의 꿈을 가슴 속에 옮겨 심는다.
2014.11.14 -
감나무 아래에서
감나무 아래에서 이 성 부 서럽도록 푸른 하늘 가이 없고 눈 부셔 눈이 부셔 더 살고 싶은 동구 밖 어귀에 내 그리움이여 바알갛게 또는 아직 누우렇게 알몸을 드러내어 나 지금 불타고 있음이여
2014.11.13 -
산길
산길 고 은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그렇게도 익숙하건만…… 늙은 떡깔나무는 외면한 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듯하고 길은 부유(腐乳) 냄새가 이제까지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구나. 이상하다.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어가면 내 발등은 먼저 간 자취로 떨리는구나.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외딴 곽새가 V자(字) 가지에서 날라 가 버릴 뿐이다. 어느날 일몰(日沒)이 늦었다. 나의 산길에는 그때까지 아침 이슬이 마르지 않고 있다. 자꾸 둘레를 돌아다보면서 이윽고 부락암호(部落暗號)로 불러 보았다. 저 앞에서 누가 반말로 대꾸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줄 어떻게 알겠느냐.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2014.10.10 -
구월의 이틀
구월의 이틀 류 시 화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 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 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2014.08.12 -
바람이 연잎 접듯
바람이 연잎 접듯 유 재 영 어린 구름 배밀이 훔쳐보다 문득 들킨 고개 쳐든 자벌레 이끼 삭은 작은 돌담 벽오동 푸른 그림자 말똥처럼 누워 있다 고요가 턱을 괴는 동남향 툇마루에 먹 냄새 뒤끝 맑은 수월재 한나절은 바람이 연잎을 접듯 내 생각도 반그늘 차 한 잔 따라 놓고 누군가 기다리다 꽃씨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 먼 그때, 약속 같은 햇빛이며
2014.07.30 -
천수관음千手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하 영 “손을, 이리 주시게!” 물때가 앉아 미끄러운 너럭바위를 사뿐히 건너 나룻배에 오르신 큰스님 손 내미신다 할머니의 자장가 소리보다 더 편안하고 온화하게 손 잡아주신다. 날갯짓 서툰 어린 새가 바람의 등에 몸 맡기듯 철부지아이처럼 어둔 갠지스를 건너뛰는 등 뒤에서 “조심 하시게!” 한 마디 덧붙이신다. 천근 바위를 올려놓은 듯 답답하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시원해지고 소용돌이치던 번뇌망상이 와르르 와르르르 항하恒河의 안개 속으로 쏟아져내렸다 실바람에도 흔들리던 마음의 곁가지들도 한량없이 크고 보드랍고 따스한 천수관음의 손을 잡고 고른 숨을 쉬며 고요의 숲에 들고 좁고 어둔 길들이 소나기 지나간 하늘처럼 환해졌다.
2014.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