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수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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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그믐달 나 도 향(羅稻香 : 1902-1926)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寒燈)에 정든..
2023.09.07 -
돌의 미학 -趙芝薰
돌의 미학 趙 芝 薰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瘦石)의 묘경(妙境)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 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凜然) 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石壽圖)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놓기도 하고, 10리 둘레의 ..
2019.10.10 -
문무대왕 해중릉, 석굴암 본존불 / 최순우
석굴암 본존불 경주 토함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석굴암에서 앞을 바라보면 멀리 동해로 트인 양장구곡의 계곡을 따라 대종천이 흐르고 이 내가 바다로 이어지는 월성 군 봉길리 어촌의 앞바다에 대왕암이라 일컫는 큰 암초가 솟아 있다. 이 암초의 중앙에 넓고 네 칸 정도의 방형으로 파 내려간 인공 못이 있고, 이 못 속에는 흡사 거북이나 전복의 등 모양으로 만든 거대한 뚜껑을 덮은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능이 맑고 푸른 물속에 신비롭게 안치되어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성왕 문무대왕은 평화로운 신라를 항상 노략질하는 왜구를 저주한 나머지 "내가 죽으면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겠노라. 부디 나의 뼈를 동해 바다에 장사 지내 달라.'는 뜻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애국심의 화신 같은 위인이었다. 그분의 이..
2019.10.09 -
나무 이 양 하
명문장(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 李 御 寧 名文이란 어느 때 어디에서 누가 읽어도 감동을 받을 수 있게 한 글이다. 참으로 기량이 있는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못하나 박지 않고 집 한 채를 짓는다. 억지로 못질을 하여 나무를 잇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귀를 맞추어 균형과 조화로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잘 다듬어진 글의 이미지와 리듬은 인위적으로 접속사를 붙이지 않아도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글의 앞머리만이 아니다. 글을 맺는 종지형도 마찬가지다. 名文이란 외우려고 해서 외워지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머릿속에 가슴속에 각인(刻印)된다. 구양수(歐陽修) 베개는 명문장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그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암..
2019.09.30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 어 령(李御寧, 1934 -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쪼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나뭇잎, 한 잎 한 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싶은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색 행커..
2019.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