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배운다

2025. 5. 15. 12:20시 모음/수필

숲에서 배운다

숲에는 질서와 휴식이, 그리고 고요와 평화가 있다. 숲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안개와 구름, 달빛과 햇살을 받아들이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깃들일 보금자리를 베풀어 준다. 숲은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할퀴는 폭풍우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것이 숲이 지니고 있는 덕이다.

 

새 물감이 풀리고 있는 지리산 숲

 

 

흙과 나무와 물로 이루어진 자연에는 거짓이 없다. 뿌리고 가꾼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 질서 앞에서는 억지나 속임수 같은 것들이 받아들여질 수 없고, 또한 그 세계 안에서는 아무것도 새롭게 고칠 게 없다. 본래 갖추어진 그대로이니까. 그저 진실로써 대하면 진실의 응답이 있을 뿐.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길들일 줄 알면 된다.

 

숲속을 환하게 밝히는 벌깨덩굴 - 줄기 윗부분의 잎겨드랑이에 꽃이 층층으로 피는데, 꽃은 한쪽 방향을 보고 있다.

 

 

지난  봄 숲에 새 물감이 풀리고 있을 무렵 자연의 조화(造化)를 지켜보면서 나는 여러 가지로 배운 바가 많았다.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 빛깔을 잎으로 내뿜고 있었다. 그 어떤 나무도 자기를 닮으라고 보채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저마다 자기 빛깔을 마음껏 발산함으로써 숲은 찬란한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었다.

 

물참대꽃- 가지 끝의 산방꽃차례에 흰색 꽃이 피는데 5장의 꽃잎은 꽃봉오리 안에서 서로 포개져 있다. 수술은 10개미여 5개씩 길이가 다르다.

 

 

만일 나무들이 한결같은 빛깔을 하고 있다면 숲은 얼마나 답답하고 단조로울 것인가. 그것은 얼이 빠진 채  말라 버린 숲이지 생명이 깃든 숲은 아닐 것이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허공에 가지를 펼치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무들은 자기답게 살려고 자신의 빛깔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나름의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찬란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저 획일화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우리로서는 그 장엄한 조화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박쥐나무꽃 - 취산꽃차례에 2-5개의 흰색 꽃이 매달리는데 꽃잎이 용수철처럼 뒤로 말린다.

 

 

우리에게 자연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흙과 나무와 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정복의 대상은 아니다. 몇 시간만 비를 내려도, 몇 치만 눈이 쌓여도 벌벌 기는 우리 주제에 정복이 가당이나 한 말인가. 그 질서와 너그러움 앞에서 인간은 분수와 능력의 한계를 알고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인간의 배경은 피곤한 도시 문명이 아니라 '그대로 놓인' 자연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람답게 사는 법을 거듭거듭

배워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종교와 사상이 교실이 아닌 숲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연은 인간에게 영원한 어머니이다. 

 

<법정(法頂)의 '서 있는 사람들' 중 '숲에서 배운다'에서>

 

광대수염 - 황백색 입술 모양의 꽃이 잎 부분의 겨드랑이마다 5-6개씩 돌려가며 층층으로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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