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시(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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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 바람 外
대숲 바람권 달 웅 무성하게 자란 대숲에서바람이 일었다 다 말 못 한 생을마디마디마다 새겨 넣으면서속을 비우고 살았다 가지들이 옆으로 뻗어나가도중심의 줄기 하나는하늘로 하늘로 치솟았다 무성하게 자란 대숲에서곧고 푸른 소리들이 일었다 설악 오소리권 달 웅 수척한 설악이 웅크리고 우는 새벽 해우소를 가는 눈길에오소리 발자국이 찍혀있다 어둑어둑 어둠이 밝아오는잣눈 쌓인 댓돌 위에얼어붙은 동태처럼 꾸덕꾸덕해진백고무신 한 켤레 바람소리만 몰려가는 적막 속에입정한 노스님이동안거에 들어간 오소리 발자국을따라가고 있다 간밤 쌓인 눈에 소나무가 찢어져도새파랗게 살아나는 솔잎처럼 아뇩다라 삼막삼보리문 닫아걸고 있는 마음이고요 속을 들여다보는설악 무금선원 무문관 80 세 앞나 태 주 이제부터는 긴 터널을 지나야 ..
2025.07.17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장 정 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이제는 홀로 있..
2025.07.16 -
겨울 산에서
겨울 산에서이 해 인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피리 불고 있었네 새 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새 봄의 속옷을 짜는겨울의 지혜 찢어진 나목(裸木)의 가슴 한켠을살짝 엿보다무심코 잃어버린오래 전의 나를 찾았네 겨울산서 재 환 눈 이불 뒤집어쓰고온 산이 잠들었네 소나무 잣나무만여기 하나 저기 둘 씩 새파란 솔빛 빛내며보초처럼 지켜 섰다 겨울산에서이 해 인 죽어서야 다시 사는 법을여기 와서 배웁니다.모든 것을 잃었지만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모든 이와 헤어졌지만모든 이를 다 새롭게 만난다고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 산길에서산새가 되어 불러보는당신의 이름 눈 속에 노을 속에사라지면서다..
2025.07.07 -
나무
나무이 성 선(1941-2001) 나무는 맑고 깨끗하게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달이 내려가 조용히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나무의 철학조 병 화 (1921-2003) 살아가노라면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그걸 사는 거다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높은 곳으로보다 높은 곳으로, 쉼 없이한결같이사노라면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나무처럼법정(法頂, 1932-2010) 새싹을 틔우고잎을 펼치고열매를 맺고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버리고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겨도그저 무심할 수 있고,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여도끄떡없는 요지부동.곁에..
2025.06.28 -
소리 外
소리유 재 영 벌써 몇 번째 어둠을 뚫고, 고요에이마를부딪치는 열매가 있다 적막유 재 영 오래된 그늘이지켜보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가툭! 떨어졌다 참 조용한하늘의 무게 득음(得音)유 재 영 잠을 이룰 수 없는밤이었다고향집에 와서 오십 살이 넘어서야비로소 듣는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 구절리 햇빛유 재 영 며칠 전,투구벌레 두 마리자웅을 가리던 곳오늘은 쇠별꽃이많이 피었습니다부전나비 한 쌍 자꾸 자리를옮겨 앉고메추라기 새끼가고개 갸웃대며지나갑니다구절리 햇빛들이개살구 속살까지말갛게 비추는 동안어디선가외대버섯 냄새가고요히 퍼졌습니다 오래된 가을유 재 영 수척한 햇빛들도 때로는 눈부셨다조용히 몸 가리고 들꽃 피운 작은 언덕다가가 만지고 싶던 손목 하얀 그 가을 돌아보면 아직도 물빛 같은 그리움..
2025.06.13 -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한용운(韓龍雲)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밀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2025.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