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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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법을 버리다
문답법을 버리다 이 성 선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들면 말은 똥이다
2014.07.18 -
바람 불자 나무 열매 자꾸 떨어지고
바람 불자 산 나무 열매 자꾸 떨어지고 산이 높으니 달이 벌써 지려하네.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창 밖에 흰 구름만 자욱하구나. 풍동과빈락(風動果頻落) 산고월이침(山高月易沈) 시중인불견(時中人不見) 창외백운심(窓外白雲深) -부휴 선수(浮休 善修, 1545~1615)
2013.11.16 -
저물어가는 저녁 해를 보며
저물어가는 저녁 해를 보며 김 대 식 저물어가는 들녘에서 낮게 내려앉은 저녁 해를 본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릴 때는 감히 쳐다보지 못했는데 눈부시던 태양도 낮게 내리니 노을도 태양과 함께하는구나. 오, 태양이여 한낮에 그렇게 뜨거웠던 태양이여 낮아진 태양은 노을과 함께 더욱 아름답구나. 자신을 낮춘다는 건 남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마음 자신의 높이를 낮출 수 있을 때 그 품위는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2013.11.03 -
문득
문득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2013.11.03 -
군불을 지폈다
군불을 지폈다 원성 군불을 지핍니다. 타닥타닥 뼛속 쪼개는 소리. 따스한 화기는 가슴을 데우고 그렇게 쪼그려 앉아 불을 바라보노라면 보송보송한 아련한 기억들이 불꽃 속에 그려집니다. 가슴에 번져 오르는 붉은 불기운에는 한없는 그리움이 밀려오고 붉어진 피부는 당장 터질 것만 같아서 한층 더 웅크려 봅니다. 일렁이는 불길 속에 얼굴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손 닿으면 부서져 버리는 나의 환영은 연기와 함께 허공 속으로 날아가 흩어집니다. 심향은 먼 하늘 향해 실낱같이 타오르며 곧 잊혀지겠지. 끝내 검은 숯구덩이만 덩그러니 불씨조차 죽어 버린 그곳에서 차가운 아쉬움만 쓸어내었습니다. 군불을 지필 때면 언제나 반복되는 나의 서정에 하루에 눈물 한 번은 꼭 흘립니다
2013.10.13 -
가을, 뜰
가을, 뜰 김 귀 녀 배추속이 속속 차오르는 가을 가을은 참 넉넉하다 대추나무 위에서 어제 저녁나절 두 됫박 족히 가을을 땄는데 오늘 또 가을이 익어간다 아침 일찍 잔디밭을 밟으면 밤새 내린 영롱한 이슬이 발등을 간질이며 소리를 낸다 화단가 섬돌 밑에선 하얀 달밤을 유난히 좋아하는 귀뚜리가 한기를 느끼는 이 밤에도 사라진 친구들을 끊임없이 불러댄다 아~~~ 혼자 간직하고 싶은 가을, 가을, 뜰
2013.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