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김 길 남 누우런 산 마루 길 벼와 수수 익어 고개를 숙여 가고 깨는 익어 입을 벌려 하얀 속알 쏟아 질라 애가 타 갈색 체구는 바짝바짝 말라가면서 고구마는 예나 지금이나 초록 잎 갈색 줄기 탐스러히 땅안에 보물들을 품고 있다 노란 꽃 줄기 줄기 매달은 감나무 잎은 줄먹 줄먹 낙엽으로 변하려나 재색을 잃어가고 쥐구멍 막아 줄 밤송이 입을 넋놓아 벌리고서 지나가는 산객에게 박시를 배품인가 알밤을 후두두 .......... 퉁실한 밤 몇알이 가랑 잎 비집고 숨으며 술레잡기를 시작한다
2013.10.11 -
담배 꽃을 본 것은
담배 꽃을 본 것은 나 희 덕 마흔이 가까워서야 담배꽃을 보았다 분홍 화관처럼 핀 그 꽃을 잎을 위해서 꽃 피우기도 전에 잘려진 꽃대들, 잎 그늘 아래 시들어가던 비명소리 이제껏 듣지 못하고 살았다 툭, 툭, 목을 칠 때마다 흰 피가 흘러 담뱃잎은 그리도 쓰고 매운가 담배 꽃 한줌 비벼서 말아 피우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족두리도 풀지 않은 꽃을 바라만 보았다 주인이 버리고 간 어느 밭고랑에서 마흔이 가까워서야 담배 꽃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하지(夏至)도 지난 여름날 뙤약볕 아래 드문드문 피어 있는, 버려지지 않고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을 □담배 가지목 가지과에 속하는 관속식물이다. 줄기는 곧추서며, 높이 1.5~2.0cm이다. 줄기와 잎에 샘털이 많아서 만지면 끈적거린다.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으로 길이 1..
2013.10.09 -
모과
모과 1 정 군 수 너를 보면 내 안에서 꿈이 익어간다 온 여름을 침묵으로 떠돌다가 문득 가을로 달려온 너 감출 수 없어 하늘로 꿈을 열어 놓는다 너를 보면 내 안에서 노란 기적이 익어간다
2013.10.09 -
사과나무
사과나무 류 시 화 아주 가끔은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사과나무밭 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 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 아주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 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2013.10.08 -
비 가는 소리
비 가는 소리 유 안 진 비 가는 소리에 잠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不協和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보는 실루엣 같은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 죄다.
2013.07.08 -
산행
산행 오 세 영 산으로 가는 길은 맨 먼저 누가 냈을까. 다람쥘까, 산토낄까, 아니면 우리네 옛 할머니일까, 熊女 할머니 처녀적 고운 발바닥이 사뿐히 즈려 밟았을 점토 흙 숲섶엔 솜다리꽃 한 송이 맑은 향기를 품고 있는데 산으로 가는 길은 누가 왜 낸 것일까. 바람일지 몰라, 바다에서 불어와 산으로 가는 바람 흰 구름일지 몰라, 산에서 일어 하늘로 가는 흰 구름 들 끝나 산이 있고 산 끝나 하늘 있는데 다람쥐 따라 산토끼 따라 산으로 산으로 오르는 걸음, 하늘로 하늘로 내딛는 行步.
2013.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