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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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의 시 : 12월 외
12월 오 세 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허무를 위해서 꿈이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안쓰러 마라.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사랑은 성숙하는 것.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눈 떠라,절망의 그 빛나는 눈. 외롭게 오 세 영 바닷가 모래알처럼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의 별이라지만지상의 모래는 왜별이 될 수 없는가.높이 떠 있어서가 아니라반짝반짝 빛나서가 아니라별은멀리 있어서 별이다.그러므로 모래여,서로 등을 부비면서 집합을 이루기보다는가슴과 가슴을 하나로 안는 바위가 되든지아니면각자 ..
2019.11.15 -
소백산의 일몰
도봉(道峯) 박 두 진산(山)새도 날러와우짖지 않고,구름도 떠가곤오지 않는다.인적 끊인 듯,홀로 앉은가을 산(山)의 어스름.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울림은 헛되이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산(山)그늘 길게 늘이며붉게 해는 넘어 가고황혼과 함께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2019.11.15 -
삶
삶오 세 영(1942- )바람 앞에 섰다.숨길 것 없이 맨가슴으로,저 향그러운 남풍을저 매서운 북풍을가리지 않고 받는 나무.햇빛 아래 섰다.부끄럼 없이 맨몸으로,저 뜨거운 폭양을저 싸늘한 백광(白光)을싫다 않고 받는 나무.대지 위에 섰다.굽힐 것 없이 맨다리로,먼 지평선 굽어보며먼 수평선 너머보며버티고 선 나무.나무는 항상당당해서 나무다.나무는 항상순결해서 나무다.바람과 햇빛과 흙으로 빚어진영혼,우리들, 나무.
2019.11.13 -
늦가을
늦가을 박 인 걸철새들마저 고향으로 떠나던 날가까스로 붙어있던 오동잎도 진다.바람결에 뒹구는 낙엽들은지는 꽃 잎 만큼이나 서럽다.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헤어하는 것들끼리 아쉬워하며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서러워 말자며 누런 손수건을 흔든다.함께 살던 이들이 떠난 뒷자리에밀려드는 것들은 고독이지만긴긴 고독은 창조를 낳고고독은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한다.다음 오는 것들을 위하여서둘러 자리를 내주는 自然은한 자리만을 고집하는 것들을 향하여비우는 아름다움을 역설하고 있다.
2019.11.11 -
가을 소백산
가을 소백산조 성 심 소백산의 가을은가난하다.산 정상에는잎 떨군 철쭉의 잿빛 가지들이봄날의 정염을안으로 삭인 채햇빛에 피를 말리고 있었다.오랜 기다림과갖은 풍상을 견디기 위해그들은 일찍다 버리고하늘이 주는 빛을마른 가지 속에갈무리하고 있었다.
2019.11.11 -
일몰(日沒)
일몰(日沒)박 인 걸 하루 종일 걸어온 길에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서산마루에 간신히 걸린 해는마지막 노을을 온 누리에 붓는다.허공을 건너는 머나먼 길은아찔하고 두려운 모험이지만무사한 행로의 감사함을황홀한 빛으로 외어 올린다.일제히 기립한 나무들은손을 흔들어 답례하고때마침 날던 청둥오리 떼도 두 발을 가슴에 모은다.파란(波瀾)의 날을 곱게 끝내고숙면(熟眠)에 드는 태양처럼나 살다 곱게 늙어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구나.
2019.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