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5. 23:49ㆍ시 모음/시
12월
오 세 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외롭게
오 세 영
바닷가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의 별이라지만
지상의 모래는 왜
별이 될 수 없는가.
높이 떠 있어서가 아니라
반짝반짝 빛나서가 아니라
별은
멀리 있어서 별이다.
그러므로 모래여,
서로 등을 부비면서 집합을 이루기보다는
가슴과 가슴을 하나로 안는 바위가 되든지
아니면
각자 멀리 떨어져 별로 살지니,
이 지상의 흙이나 바위는
부서지는 모래와 달리 항상
생명을
거두는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가슴에 이끼를 키우기 싫거든 그대,
멀고 먼 그리움의 좌표 뒤에서
외롭게 반짝이는
별로 빛날지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
오 세 영
사계절 한결같은 소나무 절개 높고
철마다 고운 색깔 단풍잎 적응 좋다.
이 생에 옳고 그름이 그 무엇에 있단 말고
늘푸른 대나무도 바람불면 휘어지고
꼿꼿한 백화(白樺)나무 가을엔 낙엽 진다.
이 생에 참과 거짓이 또 어디에 있단 말고
적막
오 세 영
천둥벼락 무더위 검은 구름 걷힌 뒤에
비로소 프르르고 더 높아진 가을 하늘
국화 꽃대궁이에도 햇살들이 찰랑인다.
갈 사람 떠나고 들 사람은 이제 없어
시름 없이 홀로 앉아 빈 잔을 잡는 뜻은
맑은 저 가을 하늘을 떠 마시려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