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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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매화 예찬 만해 한 용 운(1879-1944) 매화를 반가이 만나려거든, 그대여, 눈 쌓인 강촌(江村)으로 오게 저렇게 얼음 같은 뼈대이거니, 전생(前生)에는 백옥(白玉)의 넋이었던가. 낮에 보면 낮대로 기이한 모습, 밤이라 그 마음이야 어두워지랴. 긴 바람 피리 타고 멀리 번지고 따스한 날 선방(禪房)으로 스미는 향기! 매화로 하여 봄인데도 시구에는 냉기 어리고, 따스한 술잔 들며 긴긴 밤 새우는 것. 하이얀 꽃잎 언제나 달빛을 띠고, 붉은 그것 아침 햇살 바라보는 듯 그윽한 선비 있어 사랑하노니, 날씨가 차갑다 문을 닫으랴. 강남의 어지러운 다소의 일은 아예, 매화에겐 말하지 말라, 세상에 지기(知己)가 어디 흔한가. 매화를 상대하여 이 밤 취하리. 매화 서 정 주(1915-2000) 매화에 봄 사랑..
2019.03.02 -
녹차, 청류다원(淸流茶院)
녹차 유 응 교 바알갛게 서산에 해 지다. 정갈한 석간(石間) 수(水) 끓는 물 가만히 기다리다. 검게 둘둘 말린 가녀린 엽신(葉身)의 열반을 지켜본다. 포근한 영면(永眠)속에 스스로 몸을 푸는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영혼! 오늘도 두 손으로 따사로운 산(山)을 마신다
2019.02.26 -
오대산 전나무
오대산의 전나무 윤 의 섭 창파 아득한 동해를 굽어보고 진부령의 산등을 비켜가며 내려온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전나무들 흐르는 바람소리 귀를 씻는 듯 스친다 드문드문 소나무는 고고한 솔향기를 옥류에 섞어 흘려 발길이 싱그럽다 깨끗함을 고이는 월정사의 풍경소리 덮여있는 숲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산중 독서하다가 새벽에 울리는 상원사 동종 소리 만물의 울림소리 함께 듣는다. □전나무, 젓나무 소나무과의 상록성 침엽 교목으로 우리나라 중부지방과 북부지방의 높은 산에서 자생한다. 줄기는 곧게 자라며, 나무 모양이 원뿔 모양으로 아름다워서 조경수로 흔히 심어 기른다. 나무껍질은 진한 흑갈색으로 거칠다. 잎은 피침형으로 가늘고 끝이 뾰족하며, 뒷면에 2개의 흰색 숨구멍줄이 있다. 암수 한그루로 4-5월에 원통형 ..
2019.02.12 -
설날 아침에
설날 아침에 김 종 길(1926-2017)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설날 떡국 정 연 복(1957- ) 설날 아침 맛있는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며 덩달아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나무로 치자면 나이테 한 줄이 더 그어지는 ..
2019.02.02 -
입춘(立春)
입춘무렵 오 정 방 산등성이엔 아직도 하얀 겨울이 서성이는데 저 계곡엔 벌써 졸졸졸 봄이 흐르고 텅 빈 호수엔 상기도 멍든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는데 뉘 집 뜨락엔 하마 도란도란 매화 벙그는 소리 입춘 하 두 자 편지가 왔다 눈물 섞인 바람 속을 떠난 뒤 소식 끊겼던 그대 손 끝 시린 어둠의 시간들을 지나 꽃눈 하나 피우며 오고 있다는 그대 더딘 발소리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사랑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 물기 오른 나무 속살 베어내어 그대 이름을 쓴다 먹빛 그리움으로 입춘(立春) 정 연 복 24절기의 하나인 입춘은 해마다 양력 2월 4일경이다 사실 이때는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도 이날 봄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로 올해 입춘인 오늘 한낮의 겨울 햇살 아래 그 숨은 뜻을 몸으로 느껴 알 ..
2019.02.02 -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 해 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2019.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