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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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나무를 보다
늙은 나무를 보다 이동순 (1950- ) 두 팔로 안을 만큼 큰 나무도 털끝만 한 싹에서 자랐다는 노자 64장 守微*편의 구절을 읽다가 나는 문득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 감동은 대개 이렇게 오는 것이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 평소 아침 산책길에 자주 만나던 늙은 느릅나무 영감님 앞으로 다가갔다 느릅은 푸른 머리채를 풀어서 바람에 빗질하고 있었다 고목의 어릴 적 일들을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다람쥐가 혼자 열매를 까먹다가 제풀에 화들짝 놀라 달아난 그 자리에는 실낱처럼 파리한 싹이 하나 가느다란 목을 땅 위로 쏘옥 내밀고 있는 참이었다 * 수미 : 노자가 쓴 의 한 부분.
2019.07.10 -
설악산의 품안에서 살다 간 시인 이성선
설악산의 품안에서 살다 간 시인 이성선 산사람에게는 여러 부류가 있다. 바위를 타고 얼음을 깨며 오르는 일을 사랑하는 클라이머는 그중 가장 도드라진 산사람이다. 클라이머가 산에 가장 잘 오르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산을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지는 의문이다. 클라이머에게 있어서 산은 타자다. 그는 산에 머물지 않는다. 다만 그곳을 방문하여 오를 뿐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좋은 뜻의 '뜨내기'일 수밖에 없다. 여기 뜨내기의 대(對)가 되는 다른 부류의 산사람이 있다. 바로 '붙박이'로서의 산사람이다. 산의 품 안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산을 즉자(卽者)로서 받아들이다가 급기야는 산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사람들. 알프스에서라면 영양 사냥꾼이나 수정채취업자일 수도 있고, 히말라야..
2019.06.26 -
연화봉(蓮花峰)
연화봉(蓮花峰) 권 경 업(1952- ) 설운 봄비가 문득 내리다 멎은 날에는 희방사 뒷편으로 연화봉에 올라라 이승이 끝나는 空地線으로 너 영혼보다 더 붉은 철쭉 무리지어 핀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죽어 족제비 무덤같은 시청 앞 지하철에 아우성으로 묻히고 회색빛으로 바랜 영혼은 분진으로 가득한 거리를 정신없이 배회하는데 봄장마 내리다 문득 멎는 날에는 희방사 뒷편으로 연화봉에 올라라 하늘이 처음으로 내려 앉은 소백산 능선에 서방정토 곱디 고운 연꽃 한 아름 가슴으로 안을게다
2019.06.17 -
그리움
그리움 변 종 윤길가다 문득 멈춰선 밭두렁 길 환하게 웃어주는 얼굴 곱다 어쩜 저리고운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굽이굽이 산길 따라 내려오면 그곳엔 이름 모를 들꽃이 살고 노을진 산자락 농부가 일 손 털고 나간자리 들꽃피어 나를 반기네. 들꽃처럼 소박하게 살다간 얼굴 보고픈 날 가슴속에 너를 담아간다. 피다만 꽃봉오리 울 엄마 가슴처럼 아름다워 살며시 웃어주는 그 모습이 추억 속에 묻혀 들꽃이 되었구나,
2019.06.01 -
6월의 논두렁
6월의 논두렁 최 풍 성(1939- )잡초로 허리 가리고 맨발 자국 빗물 받아 벼포기 안아 키우는 논두렁 구름 사이사이로 햇살이 점벙거리고 걸어가면 데워진 논물이 올챙이 꼬릴 흔들어 댄다 개구리밥 뿌리 밑에서 흙탕물이 따라가고 벼 이파리 쓸고가는 눅눅한 바람결에 녹색 꿈이 손 사래질하며 무게를 싣는다
2019.06.01 -
푸른 오월
푸른 오월 노 천 명(1912-1957)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우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우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구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뻗어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혼잎나물 적갈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
2019.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