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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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
십일월 배 귀 선 사랑하지만 보내야하겠어 텅 빈 적막 늦가을의 고요 홀로 깊어지는 속뇌임 누구와 달빛사랑 꿈꾸고 있는지 자꾸만 지워지는 이름 앞에 붙들고픈 십일월! 문득 주민등록증을 보다가 황당한 느낌이 들어 내 나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허둥대던 날처럼 아직도 욕심의 언저리 벗어나지 못하고 늦가을 저녁의 풍요를 꿈꿨어 해는 자꾸 서쪽으로 기울잖아 이젠 십일월의 나무처럼 내려놓을 때가 되었어 나무 정 현 복 아름드리 나무이든 몸집이 작은 나무이든 나무는 무엇 하나 움켜쥐지 않는다 바람과 비와 이슬 햇살과 별빛과 달빛 온몸으로 포옹했다가도 찰나에 작별하는 비움의 미학으로 산다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굳게 지키면 그뿐 눈부신 꽃과 잎새들도 때가 되면 모두 떠나보내 한평생 비만증을 모르고 늘 여린 듯 굳건한 생명..
2018.11.13 -
어둠이 아직
어둠이 아직 나 희 덕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에도 눈 꺼풀이 깜박이는 동안에도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은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 아, 얼마난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
2018.10.29 -
바닷가에서
바닷가에서 오 세 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2018.10.23 -
가을
가을 김 현 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울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뻐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2018.10.22 -
10월
10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돌아보면 문득나 홀로 남아 있다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이 지상에는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낙과落果여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오늘도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2018.10.20 -
아침이 오는 소리
아침이 오는 소리 최 원 정 여명(黎明)이 오는 소릴 들어 보셨어요 아침을 여는 그 소리 말예요 때로는 우뢰처럼 크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 없이 오기도 하는 그 열림의 소리... 아직 머물고 있는 어둠 속에서 새벽별이 하는 얘길 들어 보셨어요 밝은 해가 뜨면 자릴 비켜 준다는 그 순응(順應)의 소리... 동녘의 밝음이 다가오는 소릴 들어 보셨어요 하루의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오는 위풍당당한 소리 말예요 오늘의 새로움을 여는 그 희망(希望)의 소리...
2018.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