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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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민들레 류 시 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
2010.03.25 -
산
산 함 석 헌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갠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 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2010.03.24 -
멋진 사람
멋진 사람 해안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쥐고 오는 벗이 있다면 굳이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향(香)을 사르고 산창(山窓)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불경(佛經)을 아니 배워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귀촉도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라면 굳이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고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굳이 도(道)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산야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서 온 누구인지 물을 것이 없이 굳이 오고가는 세상사를 들추지 않아도 좋다.
2010.03.17 -
여행자를 위한 서시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 시 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
2010.03.16 -
들풀
들풀 류 시 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2010.03.14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 시 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2010.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