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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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까닭
사랑하는 까닭 卍海 韓 龍 雲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2010.02.10 -
님의 침묵
님의 침묵 卍海 韓 龍 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2010.02.10 -
정천한해(情天恨海)
정천한해(情天恨海) 卍海 한 용 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
2010.02.10 -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韓 龍 雲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2010.02.09 -
소나무 한 그루
소나무 한 그루 용 혜 원 산기슭에 키가 큰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잘 뻗어 있는 가지 하나 하나가 심장의 호흡으로 그려놓은 듯 살아 있다 모든 것들이 시류를 따라 흘러가고 떠나가는데 오랜 세월 착실하게 뿌리를 내렸다 소나무 한 그루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의 시련도 잘 견디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 듯이 세상을 내다보며 멋지게 서 있다
2010.02.08 -
새벽길
새벽길 하 수 현 그대, 새벽의 한가운데를 헤집으며 강을 따라 한번 거닐어 보려는가 물결은 숨죽여 강의 먼 끝을 향해 미끄러지는데 빛이 몰려오면 올수록 그만큼 어둠이 한발한발 뒷걸음치거나 자빠지고 있다 강둑 아래 잠 깬 어욱새는 일어서려고 밤 사이 움츠렸던 무릎도리 매만진다 너럭바위의 무리 쪽에서 마을의 밥 짓는 연기는 서서히 어둠 걷으며 피어나 가늘게 풀리며 하늘 밑을 흐르고 개 짖는 소리 몇 줄기는 바람 가른다 아직 엷은 빛 때문에 채수염 희끗희끗 바래진 상수리나무, 그 밑으로 산도깨비 몇몇 황급히 흙 묻은 방망이 닦는다 빛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을까 숨고 있는 어둠의 지스러기는 이제 얼마나 남아 있을까 어둠에 반쯤 잠긴 가을은 밤 사이 강을 오르내리다가 더러는 나직이 흐느끼다가 지금 솔부엉이 옆에 ..
2010.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