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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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며 피는 꽃 도 종 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듯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2010.01.28 -
사랑 이야기
사랑 이야기 정 연 복 겨울 찬바람을 알몸으로 버티어 온 나목(裸木)의 가지들과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가 만나 서로 뜨겁게 보듬어 안는다 처음에는 사르르 녹더니 쌓이고 또 쌓여 이윽고 가지마다 눈꽃이 피네 그래서 가지들은 따뜻하다 허공을 맴돌던 눈송이는 오붓이 제 집을 찾는다 삭풍 한번 몰아치거나 한줌의 햇살이 와 닿으면 덧없이 스러질 사랑인데도 오! 저 여리고 가난한 목숨들의 단단한 포옹 찰나의 눈부신 동거(同居)
2010.01.28 -
눈
눈 박 용 래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 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 가는 한 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
2010.01.28 -
구름
구름 가람 이병기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과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그 구름 나도 되어 허공에 뜨고 싶다. 바람을 타고 동으로 가다 서으로 가다 아무런 자취가 없이 스러져도 좋으리.
2009.12.17 -
용장사에 머물면서
居茸長寺經室有懷 茸長山洞窈 不見有人來 細雨移溪竹 斜風護野梅 小窓眠共鹿 枯椅坐同灰 不覺茅첨畔 庭花落又開 - 雪岑 金時習 용장사에 머물면서 용장골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에서 사슴과 함께 잠자고 마른 의자에 앉아 있으니 이내몸이 재와 같구나 깨닫지 못하는구나 억새 처마 밑에서 뜨락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 설잠 김시습
2009.12.11 -
국토서시(國土序詩)
국토서시(國土序詩) 조 태 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2009.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