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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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현금(沒絃琴)
몰현금(沒鉉琴) 이 성 선 저 큰 산 울음 몰현금 소리 먹은 내 귀가 듣지 못하였네. 산 너머 안개 너머 산 너머 안개 너머 줄줄이 벋어가 구름에 묻혔다 살아나고 다시 죽는 산 능선들. 바람 속에 사라지고 별에서 태어나는 현들. 우주가 내려 놓은 거문고가 아니다. 줄이 없기에 울지 않는다. 잔인한 그분이 끊어버렸고 내 귀는 열리지 않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운다. 고요한 오후의 막막한 회색빛에 우뚝 떠서. 아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앉아 하늘 가득 운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 안에 집을 짓고 천년을 살아야, 맑은 천둥 속에 방 얻어 공부를 해야, 지평을 치며 솟아 앉은 달에게 차 한 잔 받아야 귀가 깨어나 줄 없이 우는 저 소리를 담을 수 있을까. 새벽 우주가 돌아간 뒤에도 혼자깊어져 내는 그분 소리를
2012.10.08 -
구름詩
구름 이 성 선 구름은 허공이 집이지만 허공엔 그의 집이 없고 나무는 구름이 밟아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지만 구름은 바람을 사랑하고 하늘에 살면서도 마을 샛강에 얼굴 묻고 웃는다 구름은 그의 말을 종이 위에 쓰지 않는다 꺾여 흔들리는 갈대 잎새에 볼 대어 눈물짓고 낙엽 진 가지 뒤에 기도하듯 산책하지만 그의 유일한 말은 침묵 몸짓은 비어 있음 비어서 그는 그리운 사람에게 간다 신성한 강에 쓰고 나비 등에 쓰고 아침 들꽃의 이마에 말을 새긴다 구름이 밟을수록 땅은 깨끗하다
2012.10.08 -
날망과 등성이
날망과 등성이 내가 걷는 백두대간 36 이 성 부 날카로운 산봉우리는 부드러운 산등성이를 사랑하기 위해 저 혼자 솟아 있다 사람들이 편안하게 걷는 모습을 보고 저 혼자 웃음을 머금는다 부드러운 산등성이가 어찌 곧추선 칼날을 두려워하랴 이것들이 함께 있으므로 서로 사랑하므로 우리나라 산의 아름다움이 익는다 용솟음과 낮아짐 끝없이 나를 낮추고 속으로 끝없이 나를 높이는 산을 보면서 걷는 길에 삶은 뜨겁구나 칼바위가 부드러움을 위해 태어났듯이 부드러움이 칼날을 감싸 껴안는 것을 본다
2012.10.08 -
풀잎으로 나무로 서서
풀잎으로 나무로 서서 이 성 선 내가 풀잎으로 서서 별을 쳐다본다면 밤하늘 별들은 어떻게 빛날까. 내가 나무로 서서 구름을 본다면 구름은 또 어떻게 빛날까. 내가 다시 풀잎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 다시 나무로 서서 나를 본다면 나는 진정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걸어갈까. 내가 별을 쳐다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풀잎들도 별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나무도 나를 보고 있다.
2012.10.02 -
산에 가거던
산에 가거던 김 지 헌 산에 가거든 그 안에 푹 젖어 보아라 가만히 귀를 대고 산의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세상의 모든 언약이 서서히 깨어지고 있는 소리를... 산에 가거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풀바람이 되어 보아라 고만고만한 인연들이 모여 제각기 만들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산에 가거든 그 경사진 산맥의 늙은 생애를 울음소리를 들어 보아라 주인없는 무덤가에 피어난 탄식같은 햇살 한 움큼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2012.09.29 -
생을 탕진하고도
생을 탕진하고도 이 성 선 안개 속 높이 솟은 산에 잃은 소 찾으러 간다 일생을 탕진하고도 안 되어 늙어 구름 골을 아직 헤맨다
201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