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시(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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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韓龍雲,1879-1944)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더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
2019.09.23 -
白 鹿 潭
白 鹿 潭정지용(鄭芝溶,1903- ?) 1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2巖古蘭, 丸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3白樺 옆에서 白樺가 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樺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4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5바야흐로 海拔六千呎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
2019.09.23 -
바위
바위 유 치 환(柳致環, 1908-1967)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2019.09.22 -
낙화
낙화(落花) 이 형 기(李炯基,1933-2005)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2019.09.21 -
마음의 태양(太陽)
마음의 태양(太陽) 조 지 훈(趙芝薰, 1920-1968)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가시밭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肉身)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량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苦難)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르노라.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라.
2019.09.21 -
소나무
늙은 소나무 박 인 혜 푸른 하늘 하현달 늙어진 소나무 바람소리 새 소리 귀 기울여 주며 등 굽어 아름다워라 거친 세월 낚는다 어떤 소나무 박 인 걸 가파른 절벽(絶壁)에 가까스로 매달려 아슬아슬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저것은 선택이 아닌 운명이며 곡예(曲藝)가 아닌 비명(悲鳴)이다. 한 톨 씨앗으로 바위틈에 떨어져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아찔함을 느꼈지만 던져진 주사위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절망(絶望)을 극복하며 그래도 시푸르다. 경쟁이 없는 자유 스스로 터득한 여유 익숙해진 불편함 버티며 사는 철학 바람에 흔들려도 허비하지 않은 세월 범접이 불가능한 한 폭의 수작(秀作)이다. 저 소나무 ㅡ 아들에게 안 웅 니 애비가 그랬고 애비의 애비 또 그 애비도 그랬듯이 저 산 중턱 우뚝 솟은 소나무를 보려거든..
2019.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