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3. 12:39ㆍ시 모음/시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韓龍雲,1879-1944)
<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더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黙)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