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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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피었다
매화 피었다 강 려 후 매화 피었다 매화 보아라 제자는 매화를 보고 스승은 드리운 문살을 세고 산 속에 눈 속에 문살 속에 매화 피었다 벙어리 매화 피었다 가지도 없는 둥치에 백매화 환히 피었다 향은 고요해 소리 없고 문풍지 절로 푸르르 떤다
2012.04.22 -
나 없는 세상
나 없는 세상 이 성 선 나 죽어 이 세상에 사라진다 해도 저 물 속에는 산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2012.02.22 -
절정의 노래
절정의 노래 이 성 선 내가 최후에 닿을 곳은 외로운 설산이어야 하리. 얼음과 백색의 눈보라 험한 구름 끝을 떠돌아야 하리.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 산이 받으려 하지 않아도 목숨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거기 몸을 묻으리. 영혼은 바람으로 떠돌며 孤絶을 노래하리. 그곳에는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히 태양을 향하여 無의 뼈대를 창날같이 빛낸다. 침묵의 바위가 무거운 입으로 신비를 말한다.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에서 무일푼 거지로 최후를 마치리.
2012.02.21 -
산중다인(山中茶人)
산중다인(山中茶人) 이 성 선 찻잔에 매화 붉게 필 때 앞산을 낮게 나는 새가 그 발을 찻잔 물에 적시고 지나간다. 허공에 갑자기 향기 감돌고 저녁 저 발이 누구의 가슴에 깊어지는데 새는 어디에 닿는가 닿고 닿지 않음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침 뱉듯이 보는이가 내 뒤에서 조용히 차를 들고 있다.
2012.02.21 -
고목
고목 이 성 선 산에 가서 바라보면 살아 있는 나무보다 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바위 끝에 우뚝 강골로 서서 꼿꼿이 하늘을 찌르고 허공을 찌르고 해와 달을 찌르고 혼자 눈비바람에 견디는 뼈대만 남은 그 모습이 더 위대하다. 죽어서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큰 새를 앉히고 죽어서 더 편안하게 안개에서 풀려나고 죽어서 더 엄정히 저 아래 어지러운 땅을 굽어보며 침묵으로 말한다. 썩은 살은 던지고 버리고 최후의 몸뚱이만 불꽃처럼 남아 부러진 팔 그대로 벌리고 하늘 아래 섰다. 천둥번개 치면 기괴한 모습 더 드러나 어둠에 거인으로 떠오른다. 아아, 그를 바라보면 단단한 삶만이 죽어서 향기를 뿜는구나. 그 곁에 서면 죽음이 오히려 삶 위에 있다.
2012.02.21 -
나무 안의 절
나무 안의 절 이 성 선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201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