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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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그믐달 나 도 향(羅稻香 : 1902-1926)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寒燈)에 정든..
2023.09.07 -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시간 소산/문 재학 세월 속에 떠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따뜻한 햇살과 향기로운 바람이 하루의 창을 열며 삶의 희열(喜悅)을 일깨운다. 자나간 것은 좋던 나쁘던, 슬픔과 기쁨도 단지(但只) 추억의 빛으로 남을 뿐 모두 다 덧없기 그지없다.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길에 지금. 이 시간. 한순간이라도 천금(千金)같이 알뜰하게 보람으로 수(繡)놓으며 향유(享有)하면 삶은 더욱 윤택(潤澤)해지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은 언제나 행복으로 다가오리라.
2022.06.19 -
구름
구름 이 성 선·(1941-2001) 구름은 허공이 집이지만 허공엔 그의 집이 없고 나무는 구름이 밟아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지만 구름은 바람을 사랑하고 하늘에 살면서도 마을 샛강에 얼굴 묻고 웃는다 구름은 그의 말을 종이 위에 쓰지 않는다 꺾어 흔들리는 갈대 잎새에 볼 대어 눈물짓고 낙엽 진 가지 뒤에 기도하듯 산책하지만 그의 유일한 말은 침묵 몸짓은 비어 있음 비어서 그는 그리운 사람에게 간다 신성한 강에 쓰고 나비 등에 쓰고 아침 들꽃의 이마에 말을 새긴다 구름이 밟을수록 땅은 깨끗하다
2022.04.30 -
현려송 懸麗松
현려송 懸麗松 미산 윤의섭늘어진 솔 가지는흔들릴 듯 내리 달려려인 麗人의 머리 채가윤기를 내는 듯 아름답네타고난 지성 知性이청초함으로온몸을 정갈히층 구름 자태를 보는 듯하네굳은 줄기와 긴 가지에맑고 푸른 날개를 펴홍진 紅塵에 찌든 세상청정한 바람을 부르네.
2020.05.09 -
푸른 오월
푸른 오월 노 천 명청자빛 하늘이육모정 탑 우에 그린 듯이 곱고연못 창포잎에여인네 맵시 우에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라일락숲에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내가 웬일로 무색하구 외롭구나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어찌하는 수 없어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풀냄새가 물큰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청머루순이 뻗어나오던 길섶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나는활나물 혼잎나물 적갈나물 참나물을 찾던--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서러운 노래를 부르자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종달새모양 내 마음은하늘 높이 솟는다오월의 창공이여나의 태양이여
2020.05.08 -
산자고(山慈姑)
산자고김 귀 녀화장기 없는 민얼굴로 비스듬히 누워 산 아래 내려다보며창백하게 피어있던너의 모습을 생각한다밀물 썰물이 드나드는 작은 섬 귀퉁이에서눈에 띌세라 숨죽여 핀 산자고어쩜, 넌지난 세월 날개를 펴지 못한 채갈바를 알지못해주저앉아 마냥 세월만 바라보던애절한 나의 모습처럼덤덤하게 피어 있었다두근거림이 온통 파도처럼 일렁이던그 시절에 나의 눈을 고정시킨내 가슴에만 피어있던꽃이었다30년의 세월을 뒤로하고너를 다시 만나 반가운 날잊을 수 없다 산자고, 너는내 가슴에 피어있던영혼의 꽃이었다
2020.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