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대(學士臺) 전나무

2015. 4. 8. 00:12문화유적 답사기/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2015.3.17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 대적광전에 참배하고 서쪽 언덕에 오른다.

이곳에는 고운 최치원이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외로운 구름이라 이름 짓고 유랑하다 만년에 세상을 등지고  가야산에 숨어들어 은거하며

언덕에 정자를 짓고 시서(詩書)에 몰입했던  학사대(學士臺)가 있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가야금을 타면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서 경청했다고 한다.

 

기이하게 자란 한 그루 노송 아래를 지나면 높게 쌓은 석축 위로 나무줄기가 둘로 갈라진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가지 하나가 처진 듯 자라 오른 특이한 모습의 전나무다.

둘로 갈라진 나무 줄기 가운데  부러진 가지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흡사 용의 머리를 닮아 더욱 기이하기만 하다.

줄기에 자라는 푸른 이끼와 돌같이 단단해 보이는 군데군데의 나무옹이에서 풍우한설을 이겨낸 오랜 세월이 보인다.

또한 뿌리를 단단히 땅에 박은 뭉툭하고 강인한 모습을 하여 어떠한 태풍에도 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을 기상을 하고 있다..

 

이 학사대 전나무는 고운이 거꾸로 꽂아 둔 지팡이가 싹이 터 자라난 나무라 전해진다. 

유유자적한 만년을 보내다 고운은 어느 날 제자에게 ,

"지금부터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 지팡이를 꽂고 갈 것이니 만약 싹이 터서 잘 자란다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니 학문에 전념하라"면서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사라졌으며, 그 후 우화등선(羽化登仙) 하였다 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산수(山水) 편에는,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불꽃처럼 잇달아 있고, 공중에 따로 솟아 극히 높고 빼어나다.

골 입구에 홍류동과 무릉교가 있다.  나는 듯한 샘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뻗어 있다." 하였다.

학사대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눈앞에 병풍 같은 비로봉과 가야산 남산 매화산 능선들이 해인사를 감싸고 있다.

석화성(石火星) 가야산 상봉에서 산맥이 뻗어내려 감싼 곳 해인사는 대자연의 연꽃 속에 앉아 있는 듯하다.

고운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에서 해인사의 이런 모습을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듯 노을이 퍼지는 듯, 가야산의 좋은 경지는 도를

성취하는 터전에 알맞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학사대 언덕을 서성이며 고운이 타는 가야금 소리를 더듬는다.

학들이 훨훨 날아드는 모습을 그리며.

 

학사대 전나무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 (陜川 海印寺 學士臺 전나무)

천연기념물  제541호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는 신라말기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과 관련된 문헌기록(<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1757년경 후계목을 식재한 기록(<백불암집(百弗庵集)>)도 남아 있어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인정된다. 나무의 굵기나 높이에 있어서도 보기 드문 전나무로 수령이 250년 정도로 추정되는 노거수이다. 기 지정된 천연기념물 제495호 진안 천황사 전나무와 비슷한 크기로 수목 규모와 역사성이 우수하다. < 문화재청 >

 

 

 

 

학사대 전나무는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2m이며,  지상

높이 약 5m에서 둘로 갈라졌으며 가지 펼침은 동서 18m,

남북 14m로서 옆으로 넓게 퍼지지 않아 키만 껑충해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원래 자라던 학사대 전나무는 죽었고,

최흥원 선생이 1757년에  다시 심었다. 전설의 학사대 전나무 수령은 약 1,100년이나,  현재의 학사대 전나무 수령은 258년이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학사대 전나무

 

 

부러진 나무 가지가 흡사 용머리를 닮아 기이하다

 

 

전나무 밑동

 

 

학사대 전나무 앞에 서 있는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

 

 

박상진 교수의 글을 옮긴다.

 

최치원 선생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

천년의 역사를 가진 법보사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해인사 경내 대적광전의 서쪽 언덕 옛 학사대 터에는 키 30m, 가슴높이 둘레 520cm의 전나무 고목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높이 약 5m에서 둘로 갈라졌으며 가지 펼침은 동서 18m, 남북 14m로서 옆으로 넓게 퍼지지 않아 키만 껑충해 보인다. 주위에 젊은 전나무와 소나무 몇 그루를 거느리고 작은 숲을 이루어 살아간다. 전나무는 오대산 월정사, 부안 내소사, 청도 운문사 등 남한의 오래된 사찰 입구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사찰을 중창을 하거나 새로 지을 때 기둥으로 쓰기 위하여 일부러 심은 흔적이다. 그러나 학사대 전나무는 사찰의 기둥감이 아니라 신라 말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857~?) 선생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다. 그는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7년 동안 머물면서 장원급제하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를 지어 뛰어난 글 솜씨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29살 때 귀국하여 한림학사, 병무시랑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진성여왕 8년(894) 나이 37살 때 아손(阿?)이란 벼슬을 받았으나 6두품이라는 그의 신분한계와 부패한 사회상을 한탄하여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방랑생활에 들어간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랑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가야산 일대이다. 그는 지금의 해인사 대적광전 서쪽 언덕에 자그마한 정자를 짓고 그가 지낸 한림학사란 벼슬이름을 따 학사대(學士臺)라 했다. 여기서 선생이 가야금을 켜면 수많은 학이 날아와 고운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조용히 글을 읽고 시를 읊조리면서 유유자적한 만년을 보내다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 지팡이를 꽂고 갈 것이니 만약 싹이 터서 잘 자란다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니 학문에 전념하라.’면서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사라져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선생이 꽂아 둔 지팡이가 자라 지금의 전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해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900년대 초로 본다면 전설의 전나무 나이는 약 1,100년에 이른다. 

조선 초기에 편찬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 ‘고운 선생 사적’이란 항에 ‘학사대는 해인사 서쪽에 있고 곁에는 높이 1백 척에 이르는 늙은 전나무가 자라며 둘레가 3장(丈) 여에 이른다(邊有百尺老檜 腰大三丈餘).’고 했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 박이장(朴而章)의 시문집인 《용담집(龍潭集)》에도 역시 이 전나무가 등장한다. 또 정선(1676~1759)의 해인사 그림 두 점에 모두 전나무가 나온다. 한편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선생은 그의 시문집《백불암집》에 영조 33년(1757) 해인사를 관람하고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이런 글을 남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손수 심은 소나무가 이미 말라버리고 그 등걸만 남았다. 지금 마침 2월이고 비가 오니 소나무를 심기에 적합하므로 종을 시켜 4그루의 작은 소나무를 캐서 그 곁에 심게 했다(而孤雲手植松已枯 獨其査在矣 余以爲此行適値二月 天又雨 正合植松 乃命奴採四小松 植其傍).”라고 하였다. 그가 소나무라고 한 것은 실제로 전나무이며 이 기록에 따르면 원래 자라던 학사대 전나무는 죽어 버렸고 최흥원 선생이 1757년에 심은 4그루 중 한 그루가 지금까지 살아남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윤겸이 1770년에 그린 영남기행화첩의 해인사도에도 전나무가 그려져 있어서 조금 혼란스럽다. 화가의 착각인지 아니면 최흥원 선생이 심고 14년이 지났으므로 제법 크게 자란 전나무를 그린 것인지는 명화 하지 않다. 어쨌든 지금의 전나무는 최흥원 선생이 심은 ‘지팡이 전나무’의 후계 전나무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학사대 전나무의 실제나이는 257년(2014년 기준)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