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의 느티나무

2015. 2. 17. 10:25문화유적 답사기/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의 느티나무

2015. 1. 12

 

함양군청을 향하여 걷다가 문득 앞을 가로막는 느낌에 눈을 드니 큰 나무 한 그루 우뚝 서 있다.

네 아름도 넘는 우람한 줄기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가 갈라진 느티나무는 잔가지를 둥글게 사방으로 활짝 펼치고 있다.

나무 뒤로 함양초등학교 흰 건물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함양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학사루(學士樓)가 있었던 곳이다.

이 느티나무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현감으로 지낼 당시 학사루 앞에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1474년 함양 현감으로 임기가 끝날 무렵 5살짜리 아들 목아(木兒)를 반진으로 잃는다.

그의 시집 '점필재집(畢齋集)'에는 목아(木兒)를 애도하는 시가 실려 있다.

 

悼木兒木兒庚寅五月生於京師已五歲今年二月二十八日以斑疹死其生時歲月日皆値木星故以名云

忽辭恩愛去何忙

五歲生涯石火光

慈母喚孫妻喚子

此時天地極茫

 

목아를 애도하다 목아를 경인년 오월에 서울에서 낳아 이미 오 세가 되었는데, 금년 이월 이십팔 일에 반진으로 죽었다.

목아가 태어날 때의 연월일이 모두 목성에 해당하기 때문에 목아라 이름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찌 이리 바삐 가느냐

다섯 살 생애가 부싯돌 불빛 같구나

어머니는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아들을 부르니

지금이야말로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가슴을 저리게 하는 애절한 시다.

아들을 잃은 다음해 1475년 승진하여 함양을 떠나며 아들의 짧은 생애를 달래려는 마음을 담아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500여 년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목이 된 이 느티나무는 함양 군민의 수호신 같은 나무가 되었다.

지금은 함양초등학교가 들어서 수 많은 어린이들이 뛰어놀며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고 있다.

아들을 잃고 아들의 짧은 생애를 달래려 심었던 이 느티나무

이제는 노거수 되어 천진무구히 뛰노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님의 애절한 마음도 얼마큼 달래 지지 않았을까...

 

나무의 철학
 조 병 화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그걸 사는 거야

 

봄, 여름, 가을, 긴 겨울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쉼 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함양학사루(咸陽 學士樓) 의 느티나무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의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407호 >

함양 학사루(學士樓) 느티나무는 약 500년 정도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22.2m, 가슴높이 둘레 7.25m의 크기이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현감으로 있을 때 학사루 앞에 심었다고 한다.

 

 

 

 

 

  

 

  

 

   

학사루 느티나무의 판근(板根)

 

 

 판자 모양의 뿌리란 뜻으로, 일부는 땅 위로 나오고 나머지는 땅속에 들어가서 옆으로 퍼져 나무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버팀목 역할을 한다. 

 

  

 

 

 

 

 

  

 

 

 

 

함양학사루 (咸陽學士樓)

 

 

함양학사루 (咸陽學士樓)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이 누각에 자주 올랐다 하여 학사루라 불리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정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1979년 함양군청 앞으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