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허왕후의 신행길을 찾아서

2012. 5. 2. 10:58도보여행기/駕洛國의 편린을 찾아서

(9) 허왕후의 신행길을 찾아서

        2012. 3.24.  맑음

 

간밤에는 깊은 잠을 잤다.

이른 새벽 일어나 밖을 나서니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

쾌청한 하늘과 새벽의 맑은 바람이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애송하는 시 조태일 시인의 '국토서시(國土序詩)'를 읊조리며 오늘 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국토서시(國土序詩) 

조 태 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바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어제 유주정에 앉아 비 내리는 망산도와 용원동 앞바다를 무연히 바라보며 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유천간이 되었었다.

손병철 시인의 망산도를 옮겨 본다.                                            

                                              

望山島

 

단기 이천삼백팔십일년

 

AD 48년 7월 27일

 

정오

 

진해시 용원동 앞바다

 

바위틈 아름다운 풀꽃 피는 작은 섬

 

구천중 유천 간은 수로왕의 왕명 받들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서남쪽 수평선 위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장서깃발 휘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망산도 비석

 

망산도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허황옥이 수로왕과 혼인하기까지의 신행길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무 24년 무신(48) 7월 27일에 구간 등이 왕을 조알할 때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아직 얻지 못하셨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 뽑아 들여 왕비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왕은 말했다."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이다. 내게 짝지어 왕후로 삼게 함도 또한 하늘이 명령할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드디어 유천 간에게 명령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로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갑자기 한 척의 배가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빛의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하여 오는 것이었다. 유천 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육지에 내려와서 뛰어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와 그 사실을 아뢰니 이 말을 듣고 왕은 기뻐했다. 곧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의 키를 바로잡고 계목의 노를 들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했다. 그 배안에 탔던 왕후는 말했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가겠느냐?" 유천 간들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그렇게 여겨 유사를 거느리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가량 되는 곳에 가서, 산 변두리에 장막의 궁전을 설치하여 기다렸다. 왕후도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서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그것을 폐백삼아 산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이 외에 시종해온 잉신 두 사람은 이름을 신보. 조광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 모량이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 능라와 옷. 필단이며 금은. 주옥과 경구의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왕후가 점점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나와서 그녀를 맞이하여 함께 장막의 궁전에 들어갔다. 잉신 이하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로 나아가서 임금을 뵙고 즉시 물러났다. 왕은 유사에게 명령하여 잉신의 부부를 인도하게 하며 말했다. "잉신은 사람마다 각방에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의 노비들은 한 방에 대여섯 명씩 있게 하라." 왕은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었다.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 재웠으며, 의복. 필단. 보화도 주었다. 그리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라하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올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내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를 뵈오니,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니 신성한 분이란 이 사람이며,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배필을 삼게 하라.'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 가락국을 향해 떠나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를 찾고, 하늘로 가서 멀리 반도를 찾아, 지금 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말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으로부터 올 것을 먼저 알았으므로 신하들에게 왕비를 맞이하자는 청이 있었으나 굳이 듣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오." 드디어 혼인하여 이틀 밤과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는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각각 쌀 열 섬과 베 서른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잉신 부처도 나란히 수레를 탔다. 중국의 각종 물품도 모두 실어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시각은 오정이 되려 했다."

 

 '삼국유사' '금관성파사 석탑'조에는,,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해 가려하다가 수신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은 이 탑(파사석탑)을 싣고 가라 했다. 그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 붉은 돛과 붉은 기를 단 배에 주옥 등을 싣고 있었으므로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 했고, 처음 언덕 위에 비단바지를 벗던 곳을 능현(綾峴)이라 하며, 붉은 기가 처음 해안에 들어선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 그러나 수로왕과 혼인하기까지의  초행길(신행길)에 나오는 코스와 지명이 현재의 어디인가에 대하여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국제신문 '가야가 살아 있다'의 글을 옮겨 본다. "우선 망산도에 대해서는 진해시 용원의 욕망산이라는 견해(허명철), 김해시 풍류동. 영법동에 걸쳐 있는 칠산(七山)이라는 견해(김태식), 김해 시내의 전산(田山)이라는 견해(황규성) 등이 맞서 있다. 전설로는 진해시 용원동 해안의 돌무더기인 망산도(비석도 있음)가 그럴듯하나 가락국의 궁성(김해 봉황대)에서 너무 멀다. 허왕후가 처음 배를 댔다는 주포도 아리송하다. 강서구 녹산동과 경계인 진해시 용동 2동 가주마을 주포는 지금도 임이 내린 갯가라 해서 "임개"라 불리고 있지만 정확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부 학자들은 주포가 지금의 강서구 녹산동 상곡마을, 옛 장락나루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허왕후가 비단바지를 벗어던졌다는 능현(비단고개), 그의 배가 처음 발견됐다는 기출변, 수로왕과 첫밤을 지낸 명월산 등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김해시는 얼마 전, 허왕후 초행길'을 역사체험 코스로 삼기 위해 전문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으나 코스가 3-4개로 엇갈려 코스정립 작업을 포기했다.  전문가들은 '설화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명확히 규명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해석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며 허왕후 설화도 역사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한다. 허왕후는 설화에서 태어나 역사로 편입된 여인이다. 김해시 구산동에는 허왕후릉이 거짓말처럼 실재하고 후손인 김해 허 씨들도 번창하고 있다. 허왕후 설화는 문무왕 대나 고려 문종 연간에 종래의 전승을 토대로 불교적으로 윤색됐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으나, 지명과 신화. 전설.민속학적 풍습 등 다양한 내용이 숨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허왕후 일행이 풍랑방지를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과 왕후사(452) 건립 등은 남방불교 전래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허왕후가 김해 앞바다 망산도에 다다른 후 수로왕과 혼인하기까지의 신행길을 찾아 걷는다.

용원동을 벗어나 송정동을 걸어가노라니 길가 나무 사이로 아침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달리는 차만 보일 뿐, 인적이 드문 한적한 인도를 사박사박 걷는다.

송정천에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물속을 응시하는 해오라비가 보인다.

 

             

 

 

별포나루

허황옥이 수 만리 바닷길을 건너 처음 배를 대고 육지로 올랐던 가주마을 주포(主浦)를 찾아 걷는 이 길은 옛적 배가 드나들던 바다였다.

오랜 세월 낙동강의 퇴적물과 간척사업으로 낙동강 하구 바다는 현재 들판과 공단으로 바뀌었다.

쭉쭉 뻗은 도로와 고가도로 밑을 지나  송정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대로 옆 소로를 따라 걷다 토끼굴을 빠져나와 걷는다.

주포마을 '임이 내린 갯가 임개'라고도 하는 주포(主浦)에는 큰 나무 한 구루가 우뚝 서 있다.

마을 길 어귀에는 사단법인 경남문화연구원에서 세운 別浦津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別浦津

"이곳은 가락국 건국 7년 때인 서기 48년(단기 2381년) 음력 7월 27일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하늘의 명을 받아 2만 5천 리

바닷길을 건너 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타고 온 배를 처음 댄 곳입니다. 배에서 내린 허공주는 명월산 능현(비단고개)에서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을 드린 후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던 유궁 (휘장을 임시 궁궐)으로 갔습니다. 별포진은 현재 가주마을 주포 일대로 주포(主浦)는 으뜸나루 또는 임이 내린 갯가라 하여임개라고도 합니다. 별포진은 낙동강의 퇴적물과 간척사업등으로 메워져 지금은 들판과 공단으로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고 합니다. "

 

 

  

이곳이 별포나루가  확실하다면 앞의 너른 들은 모두 바다였으리라.

마을길로 들어선다.

길옆 매화나무 단지에는 백매가 환히 피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보배산을 바라보며 봄의 싱그러운 마을길을 걷는다.

얕은 돌담너머 매화단지에는 하얀 매화꽃이 함박 눈송이처럼 날리고, 낙화한 하얀 꽃잎이 고아한 정취를 자아낸다.

코끝에 묻어오는 매화의 짙은 향이 순간적으로 정신을 아득하게 한다.

보배산을 오르기 위해 비단길을 걸어 울울한 푸른 대숲길을 지나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산새들의 합창소리가 들린다.

능선에 오르니 세찬 바람이 분다.

능선 오솔길 따라 가랑잎이 돌돌돌 구른다.

부드러운 능선길을 밟으며 산 봉우리를 돌아 넘는다.

시원히 바다가 조망된다.

창원 CC, 부산 신항 , 가덕도와 연대봉, 멀리 거제도가 아련하다.

 

 

 

 

 

 

보배산 정상 공지에는 삐죽 한 철구조물이 서 있고, 나뭇가지에는 산악인들이 매단 리본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삼각점 옆 정상 표지석에는 보개산이라 새겨져 있다.

'寶蓋山'의 '寶'자 부분이 깨어져 달아나고  蓋山 478.9M 글씨 부분만 남아 있다.

표지석 뒷면에는 명산 제일봉, 낙남정맥 남단이라고 새긴 듯한데 '낙'자 첫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보배를 덮어 놓은 산 보개산은 현재의 보배산으로 이름이 바뀐 모양이다.

이산은 명월산(明月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洛江

 손 병 철

 

어디쯤 흘러가면

새 날은 오는가

금빛 찬란한 새 날은

밝아 오는가

 

핏빛 노을 적시며

하얀 뼈가루 떠올리며

묵묵히 흘러만 오는가

오늘도 흘러만 가는가

 

낙강, 너는 이제 안다

네 바다 구석구석까지

새 봄 오고 있음을

새 봄 이미 왔음을

 

보배산 정상 표지석

 

 

 

보배산에서 조망되는 지사과학단지 멀리 아련히 김해시가 보인다.

 

보배산을 내려가 갈림길에서 흥국사 가는 길로 내려서니 송전탑 건설 공사 현장이 나온다.

계곡을 따라 멀리 흥국사 절 지붕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 임도를 따르지 않고 앞의 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오솔길 따라 걷는다.

능선길의 솔잎이 푸르고 싱그럽다.

 

 

 

 

 

산봉우리 두 개를 넘어 배필정 고개를 내려서니 대숲이 울울하다.

바람 타고 사르륵 댓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스님의 독경소리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린다.

푸른 댓잎을 헤치고  언덕 오솔길을 내려선다.

흥국사 대웅전 지붕 뒤로 보배산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흥국사 대웅전 뒤로 보배산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울울한 대숲도 보인다.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명월산 북쪽 기슭에 있는 흥국사는 법화종 가락고찰이다. 1706년(숙종 32) 증원(證元)이 찬한 '김해명월사사적 비문(金海明月寺事蹟碑文)'에 의하면, 김수로왕이 즉위 7년(48년)에 명월산 높은 언덕 아래에 만전을 세우고 왕후 허씨를 맞이하여 이튿날 환궁하였고, 이때 허 씨는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이 산의 산신령에 개 폐백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은 허 씨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하여 이 산의 이름을 명월산이라 하였고, 뒤에 명을 내려 흥국(興國)·진국(鎭國)·신국(新國) 등 절 곳을 짓도록 했으며,  신국사는 세자를 위해, 진국 사는 왕후를 위해, 흥국사는 왕 스스로를 위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또 이 비문에는 명월사가 숙종 32년(1706)에 중수될 당시 담 밑에서 건강원년(建康元年, 144) 3월 장유가 서역에서 불법을 받들고 오니 왕이 도를 존중하고 숭불 하였다”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의 흥국사는 1956년 중건하였는데 경내에는'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흥국사의 주변 일대가 옛날의 명월 사지(明月寺址)였다고 한다.
   

      죽로차

손 병 철

 

첫날밤을 보낸

아유타공주님은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

옥합에 넣어 온

귀한 차 씨를 꺼내 심었다

대숲 오솔길을 지나

이슬 맺힌 풀잎을 헤치고

정성스레 심었다

어제 아침처럼

오늘도 향기로운 발걸음을 옮겼다

길짐승 날짐승이 파헤칠까

꼭꼭 숨겼다

지금도 창원군 북면

마금산온천 가는 길목

白月山 기슭에 가면

허황후가 심은

차나무 후손들이

오손도손 자라고 있다.

 

 

김해명월사사적비

 

김해명월사 사적비' 전문을 옮겨 본다.

金海明月寺事蹟碑
山在府南四十里而寺居峯回林密處乃首露王所建也漢建武十八年創建都盆城國號駕洛後七年王與許后相遇於是山高嶠下設幔殿迎后翌日同輦還宮后解所着綾袴贄于山靈王感其靈異以明月名山後命建寺三所以興鎭新三字弁于國而扁之永爲邦家祝釐之所曰新國爲世子建在山西崖曰鎭國爲后所設在山東谷曰興國爲王自爲在山中卽是寺至今稱三願堂而二寺只爲遺址山下有夫人塘及主浦后乃西土國王女航海而來維舟於此自餘異蹟甚多而今略之本寺在高嶠下乾坐洞壑淸幽泉石爽明峯巒蒼蔚眞人間別區也往在壬辰毀於兵火萬曆戊午有一宿德重扶建開士相繼立功諸殿及像幀乃衍一元德莊宗惠尙眞應俊諸師所成今年法堂階砌又成取石於昆陜地舟棹運遠又得神助云重修時又得一瓦頹垣下背有建康元年甲申三月藍色等字且長遊和尙自西域奉佛法而來王之重道崇佛亦可驗矣噫否泰交作盛衰相遷後來之士勤而葺之豈懼寺之不綿遠哉銘曰
寶山南起 近接扶桑 天降神人 化此一方 西泛東邁 來泛大洋 王曰設幔 惟彼親迎 追思嘉耦 感及山靈 爲建招提 護我襌門 超然淨界 與世逈分 喬僧宣化 重譯來傳 宸情問道 崇彼福田 神祇擁護 佛界萬年
崇禎 丙子 後七十二年
太虛之後徒 僧 證元 撰 守閑 書  
 
산은 김해부 남쪽 40여 리에 있으며, 절은 봉우리가 돌아 숲이 빽빽한 곳이며, 곧 수로왕이 세운 것이다. 한나라 건무(建武) 18년(42년)에 분성(盆城)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가락’이라 하였다. 그 뒤 7년에 왕과 허후(許后)가 이 산에서 서로 만나 높은 언덕 아래에 만전을 세워 왕후를 맞이했다. 다음날 연(輦)을 함께 타고 궁전으로 돌아오다가 왕후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을 드렸다. 왕께서도 그 신령함을 감동하여 산 이름을 ‘명월산(明月山)’이라 한 것이다. 뒤에 세 절을 지어 흥국사(興國寺), 진국사(鎭國寺), 신국사(新國寺)라 하여 ‘국’ 자를 썼으니, 영원히 나라의 융성을 비는 장소가 되었다. 신국사는 세자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산 서쪽 언덕에 있다. 진국 사는 왕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산 동쪽 골짜기에 있다. 흥국사는 왕 자신을 위한 것으로, 산 중앙에 있으니 곧 이 절이다. 지금 ‘삼원당(三願堂)’이라 칭한다. 두 절은 터만 남았다. 산 아래에 부인당(夫人塘)과 옥포가 있다.

왕후는 서역국(인도)의 왕녀로서 바다를 저어 왔으며, 여기에 배를 매었으므로 저절로 기이한 행적이 많았으나 지금 생략한다. 이 절이 본래 높은 언덕 아래 동북쪽을 등지고 있으니, 골짜기가 맑고 깊숙하며 냇물과 바위가 산뜻하게 맑고 봉우리에 숲이 울창하므로 참으로 별세계였다. 지난 임진왜란에 전란으로 헐어지고 만력(萬曆) 무오년(1618년)에 한 노승이 다시 붙들어 세우고 선비들이 서로 이어 세우고 여러 전각과 불상 영정을 갖췄으니 곧 연일(衍一), 원덕(元德), 장종(莊宗), 혜상(惠尙), 진응(眞應) 등 여러 훌륭한 법사들이 이룬 것이다. 금년에 법당과 돌계단이 또 이루어졌으니 돌은 중국 곤섬(昆陝)에서 배로 멀리 운반한 것으로 또한 신의 도움을 얻었다 한다. 이 절을 다시 세울 때에 무너진 담 아래에서 기왓장 하나를 발견했는데, 뒤쪽에 ‘건강(建康) 원년 갑신(144년) 3월 남색’ 등의 글자가 있고, 또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국으로부터 불법을 받들어 왔으니, 수로왕이 불교를 숭상했음을 증험할 수 있다. 아아! 국운의 성쇠는 서로 바뀌는 것이니, 후세의 인사들이 부지런히 개수하면 절이 영구보존 되지 않을까 어찌 두려우랴!
명은 다음과 같다.

 

보배로운 산이 남방에 일어나,
가까이 동해에 잇닿았다.
하늘이 신인을 내려
이 땅을 교화하니,
서쪽에서 배 타고 동쪽으로
머나먼 바다를 거쳐 오셨도다.
왕께서 만전 베푸사,
오직 몸소 맞이하셨네.
왕후를 미루어 생각하니
감동이 산신령께 미치네.
사찰을 세워서
불법을 보호하오시니,
초연히 맑은 법계로다.
세속과 멀리 떨어져
큰 스님 교화 베푸시사
인도 말씀 다시 번역해 전하니,
왕의 마음 불도를 물으셨다.
높아라, 저 복된 터전을
신께서 옹호하시어
법계가 만년을 이으소서.

 

숭정(崇禎) 병자 후 72년(1708년)에 태허(太虛)의 제자 승 증원(證元)이 짓고, 수한(守閑)이 쓰다. 

 

 

 

 

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

 

     

대웅전과 5층석탑 울울한 푸른 대숲이 보인다

 

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와 대웅전 옆 모습

 

 

대웅전에 들었으나 만당 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도로 나온다.

바람이 불적마다 법당 옆 울울한 대숲이 흔들린다.

절 마당에 떨어진 나뭇잎을 처사 한 분이 깨끗이 비질하고 있다.

푸른 대숲 아래 자리한 극락전에 들어 참배한다.

이곳에는 흥국사의 칠성각을 건립할 때 출토된 화강암제의 석탑면석(石塔面石) 사왕석(蛇王石)이 보관되어 있다.

사왕석 옆으로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놓여 있다.

 

사왕석(蛇王石)에는 불상과 뱀이 함께 조각되어 있는 특이한 형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조각을 삼매경에 잠긴 불타를 양쪽에서 한 마리씩의 뱀이 서로 감고 있는 형상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무칠리디아」

라는 사왕(蛇王) 같으며, 이 사왕이 열반 속에 잠겨 있는 불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인도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증명하는 유물로 보고 있다.

 

극락전

 

사왕석(蛇王石)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정

 

 

 허왕후 신행길이 이곳 흥국사에서 배필정고개를 넘어 다시 옥녀봉 태정고개를 넘어가는 것으로 일부 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 길에는 남은 유적이 미미하여  '허왕후 신행길을 찾아가는 길'은 흥국사에서 끝마치기로 한다.

 

 명동천 계곡 따라 난 마을 길 "허왕후길"을 따라 걷는다.

 구불구불 이어진 흙길을 걷는다.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연녹색 꽃봉오리가 가득 매달려 있는 매화나무단지가 나타난다.

 하얀 매화꽃이 함박 눈송이 같이 점점이 피어나 나뭇가지를 하얗게 뒤덮고 있다.

 짙은 매화향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다섯 장 꽃잎, 노란 꽃술, 연녹색 꽃받침, 고아, 청순, 담백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심상이 맑고 깨끗해지는 듯하다.

 바람소리, 푸른 댓잎 부서지는 소리, 매화의 암향, 새파란 하늘

 만물이 다 향기롭고 향기 나는 소리다.

 오늘은 축복받은 날이다.

 

황토길 구불구불 이어진 '허왕후길'

 

 

매화단지

 

 

 

 

 

 

 

운 좋게도 명동마을 앞 대로 버스정류장에서 별 기다림 없이 부산 사하 가는 시내버스에 탑승한다.

사하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사상역으로 가서 김해경전철로 환승한 후 안동역에서 하차한다.

초선대마애불(招仙臺磨崖彿)은 김해시 안동 신어천변(神魚川邊) 초선대 암벽에 새겨져 있다.

초선대는 가락국의 거 등왕이 칠점산의 선인(仙人)을 초대하여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왕이 앉은 연꽃무늬 자리와 바둑판 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이 마애불(磨崖彿)은 거 등왕의 초상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형상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인 듯하며,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거대한 마애불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초선대

 

 

초선대 금선사

 

 

 

마애불

 

초선대를 둘러보고 김해건설고등학교로 다시 가 와룡매를 완상 한 후 '가락국 편린을 찾아서' 답사여행을 마친다. 

나를 김해로 오게 한 것은 김병모 고고학자가 지은 '김수로왕비의 혼인길' 때문이다.

이 저서 중에서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의 부분을 옮기며 글을 마친다.

 

메소포타미아 -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오늘날 사막의 나라 이라크가 차지하고 있는 땅으로, 옛날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 양과 염소 등의 가축들이 넓고 넓은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땅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지금 모두 사막화되었다. 정착 농경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인간이 터득한 지식 가운데 하나가 날씨를 예견하는 것이다. 날씨는 하루를 주기로 반복되며 더 넓게 보면 1년을 주기로 반복된다. 그래서 나이 많은 노인들은 계절을 예측하는 지식을 갖게 된다. 계절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천문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낮에 해가 뜨고 지는 현상보다 천문을 이해하는 데 더 편리한 것은 밤에 달의 모양과 별자리의 위치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을 예언가라 하였고, 예언가들은 월력을 암기하여 가뭄이나 홍수를 예언하였다. 이 예언가의 출현이 바로 신관 또는 사제의 등장이다. 신석기시대의 이야기이다.

메소포타미아 신석기 시대의 토기들 중에는 물고기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아마도 그들에게 물고기는 식량 자원으로도 중요하였겠지만  그보다는 물고기가 상징하는 물, 즉 홍수가 나면 가축들과 농작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되어 인간은 기아에 직면하게 되므로, 홍수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려는 희구 심리에서 물의 상징인 물고기 숭배 신앙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래서 생겨난 것이 초기 기독교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이고, 힌두 교의 마누 전설이다. 노아는 홍수 끝에 산에 도착하여 살아나게 되었고, 물에 빠졌던 마누는 외뿔 달린 큰 물고기가 건져 주어 살아나 인류의 중흥 시조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기독교의 노아와 힌두 교의 마누 중 누가 오래된 이야기의 주인공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서로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이동하면서 사상도

교류되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주민들에게 금속 무기가 보급되면서부터 평화롭게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던 씨족 사회가 흔들렸다. 잉여식량이 축적되어 있는 사회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회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결국 빈자 사회가 부자 사회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무기를 개발하였다. 씨족들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뭉쳐서 부족 사회로 발전하는데, 집단이 커지면 소규모 약탈 행위가 대규모 전투로 발전하는 법이다. 또한 부족 사회끼리의 대결은 무력의 대결과 함께 강력한 사회적 결속이 요구된다. 그래서 정치적 지도자가 출현한 것이다.

서기전 20세기 메소포타미아의 주민들은 작은 규모의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 국가들은 제각기 다른 신앙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자연 현상을 숭배하는 다신교였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전투는 승자와 패자를 낳고 승자는 통치 계급, 패자는 피지배 계급이 되었다. 이때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새로 발명된 철제 무기가 있어야 했다. 치열한 국가 간의 전투와 정복, 경제 활동은 대규모의 집단 이민 현상을 초래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많은 메소포타미아 주민들과 아리아 인들이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였다.

이 이주자들과 인도 토착인들이 혼혈되어 오늘날 인도인이 형성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자연 숭배 신앙도 그렇게 인도에 도입되었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토기에 그려진 물고기 그림이 있었고, 바빌로니아 인들도 거대한 신전의 문에 쌍어를 조각하였다. 서기전 9세기의 아시리아 인들은 물고기 모양의 복장을 한 사제가 의식을 행하는 모양의 조각품을 만들 정도로, 원시 신앙은 격식을 갖춘 종교 단계로 발전되었다. 쌍어신(雙魚神)은 물의 신이다. 가뭄에 단비를 주고 홍수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신이다. 쌍어를 신으로 모시는 신앙, 즉 쌍어 신앙은 초원 지대 유목 민족들에게도 퍼졌고, 히말라야 산악 지방 사람들에게도 퍼졌다. 쌍어 신앙은 중앙아시아 주민들과 인도 주민들의 토착 신앙과 합쳐져서 불교와 힌두 교로 발전한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과 교류한 주변 민족에게도 쌍어 신앙이 퍼져 곳곳에 어문(魚門)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인도와 중국에도 쌍어를 모시는 사람들의 나라를 어국(魚國)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서기전 8세기부터 약 600연 간 세력을 키웠던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족들에게도 쌍어 신앙이 퍼져, 스키타이 전사들은 타고 다니던 말의 이마에 금 또는 은으로 쌍어문 장식을 붙이고 다녔다. 틀림없이 스키타이 인들도 쌍어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쌍어 신앙은 후대에 티베트의 라마 교에 습합 되어 라마 교 팔보(八寶)의 하나가 되어 사원에 장식되었으며, 라마 교가 몽골인들에게 전파된 후

몽골인들은 지금도 라마 교 사원에 쌍어를 팔보중의 하나로 모시고 있다. 이와 더불어 쌍어는 민간 신앙에도 스며들어 내몽골호와 호트시 같은 데서는 자동차 운전사가 안전 운행을 기원하는 부적으로 자동차 열쇠에 쌍어를 붙여 다니기도 한다.

서기전 3세기부터 인도의 아요디아 출신의 사람들이 중국 보주로 이주해 가 살고 있었나 보다. 그들은 당시 중국에서 완성된 유교나 도교의 신봉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힌두 교 또는 불교에 습합 된 메소포타미아의 쌍어신을 지키던 집단이었다. 그들은 기원 전후에 발흥한 쿠샨 세력에 아요디아 사회 전체가 흔들리면서 이주하며 보주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나라의 세금 수탈 정책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그들은 신앙 지도자인 허(許 브라만)들을 중심으로 무력항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무력 항쟁은 막강한 중앙 정부군에 밀려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강제로 강하(江夏)로 이주당하게 되었고, 이주민 중의 한 집단이 가락국으로 건너와서 그중 한 사람인 허황옥이 수로왕과 결혼하였다.

보주 출신 이주자들은 가락국에 와서 살면서 가락국 왕가의 외척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보주 출신들의 쌍어 신앙도 가락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허황옥은 수로왕과의 사이에서 열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였다. 첫 왕자는 수로왕을 이어 가락국의 제2대 왕이 된 거 등이고, 또 한 왕자는 지방관인 거칠 군이 되었다. 열 명의 아들 중에 두 사람에게 어머니의 성인 허(許) 씨를 사성하여 김해 허 씨가 탄생하였다. 일곱 왕자는 신앙생활로 돌아가 지금의 하동 땅 칠불암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지진내례(只珍內禮) 공주는 신라 제4대 왕이 된 석탈해의 며느리가 되었고, 나머지 한 왕자인 선견(仙견)과 공주인 신녀(神女)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락국을 떠나 버렸다.

가락국 사람들은 가까운 왜인(倭人)들과 교류가 잦았는데, 이 때문에 왜국에서 가락국 사람들의 근거지는 가락국의 땅 이름인 가라(加羅, 唐)라는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가락, 가라 사람들이 왜 나라에 옮겨 살게 되면서 가락국의 쌍어 신앙이 왜의 야마다이 국에도 생기게 되었다.

허황옥의 시호인 보주태후는 그녀의 고향 땅 이름을 딴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멀리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쌍어 신앙은 머나먼 가락국과 왜에까지 전파되었고, 우리 한국에서는 김해 김 씨와 김해 허 씨는 모두 수로왕을 중심으로 한 친척이라고 하는 생각이 굳어져서 서로 혼인을 금지하는 풍습이 생겼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풍습에 묶여 결혼을 못하고 비극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쌍어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의 귀에만 그 비밀을 들려주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