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12. 15:41ㆍ도보여행기/駕洛國의 편린을 찾아서
(5) '아요디아'의 雙魚紋 -神魚
삼랑진읍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이다.
부산 구포행 열차에 오른다.
삼랑진에서 원동 물금의 철길은 낙동강변 깎아지른 벼랑을 달리는 그림 같은 풍경이 있는 곳이다.
옛 영남대로 잔도(棧道)인 '작원잔도'와 '황산잔도'에 철길이 나 있다.
어제 늦은 오후 원동역에서 삼랑진 올 때는 낙동강 물 등 위로 석양이 금빛 되어 부서졌는데, 오늘 삼랑진에서 구포로 갈 때는 은빛이 부서지고 있다.
강변의 풍경이 느리게 왔다가는 쏜살같이 사리 지곤 한다.
낙동강 풍광을 보며 상념에 잠기는 동안 열차는 구포역을 들어서고 있다.
구포역에서 부산 전철로 갈아타고 , 대저역에서 다시 김해 가는 경전철로 환승한다.
한참 후 경전차는 가야의 古都 김해 고층아파트 숲으로 들어서 달리더니 이내 박물관역에 도착한다.
박물관 가는 길, 담벼락에 쌍어문(雙魚紋)이 보여 가슴을 뛰게 한다.
이 쌍어문은 허황옥이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라고 자기를 소개한 인도의 아유타국 옛 도읍인 아요디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락국의 국기(國旗) 또는 문장(紋章)은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쌍어문이다.
바닥에 있는 '가야사 누리길'표식을 따라 걷는다.
김해박물관 옆 길을 따라 구지봉을 향한다.
산기슭 어린 매화나무 가지에는 꽃망울이 가득 매달려 있고 이따금 꽃망울을 터뜨리고 담백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호랑가시나무도 보이고, 만개한 노란 산수유가 화사하다.
구지봉 정상 공지 소나무숲 옆에, 깬돌 네다섯 개를 괴어 뚜껑돌을 얹은 고인돌이 있다.
기원전 4세기 경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남방식 형태의 고인돌(支石墓)이다.
뚜껑돌 윗 면에는'龜旨峰石' 각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조선시대 후기의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구지봉(龜旨峰)!
지리산에서 동남쪽으로 굽이쳐 달려온 낙남정맥의 끝자락에 분산(盆山)이 있고, 盆山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이 가락국의 개국 신화가 깃든 구지봉(龜旨峰)이다. 이곳 경남 김해시 구산동의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이곳의 지세를 거북이 바다를 향해 머리를 내민 형국이라 했으며,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龜首峰, 龜峰 등으로도 불리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렸던 구간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아니 내어 놓으면 구워 먹으리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 황금알을 깨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 지 10여 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을 세운 분으로 김해김 씨의 시조가 되었다.
잘렸던 지맥을 연결한 육교를 건너 구지문을 지난다.
허왕후릉은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허왕후 묘비명에는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 새겨져 있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올 때 파도를 진정시키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이 그를 지키고 있다.
긴 항해를 거쳐 처음 닿은 땅 망산도, 그리고 별포 나루터에 배를 메고 육지로 올라온 허황옥은,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자기가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 삼아 산신에 제사 지내고, 산길을 걸어 행궁에서 기다리던 수로왕을 만난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라 하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를 한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대궐로 돌아온다.
허황옥이 48년에 서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고 전해지는 파사석탑(婆娑石塔). 파도를 진정시켜 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진風塔)으로도 불린다.원래의 탑의 모습은 사면이 오 층으로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며 돌은 옅은 무늬가 있었다. 유실되고 깨지고 마모가 되어 원형을 잃어버리고 5층탑의 남은 부재 조각을 쌓아 놓았다. 돌은 자주 빛이 감돌고 옅은 무늬가 남아 있다. 원래는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허왕후가 가져온 것이니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며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삼국유사 탑상 편 '금관성파사 석탑'조 일부를 옮겨본다.
"금관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시조 수로왕의 비인 왕후 허황옥이 후한 건무 24년 무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항해 가려하다가 수신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은
이 탑을 싣고 가라고 했다. 그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
..........
탑은 사면이 모가 나고 5층으로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며,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므로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란 책에 이른 닭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일연 선사가 찬(讚)한다.
"탑을 실은 붉은 배의 가벼운 깃발
덕분에 바다 물결 헤쳐왔구나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옥만을 도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침략을 막아왔구나"
가야사 누리길을 따라 김해향교를 지나고 공진성을 지나니 재래시장 북측 입구 동쪽에 '김해객사 후원지'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는 범어사 포교당인 연못에 세워진 사찰 연화사가 있다.
분성대와 함허정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터는 가락국 수로왕비의 중궁터로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또한 허황옥은 중궁터 동편에 호계사를 건립하고 서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을 안치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절과 탑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방형의 연지 위에 세워진 연자루와 함허정 자리에 지금은 연화사 대웅전이 세워져 있다.
경내 입구 얕은 언덕에는 가락고도궁허비, 연화사사적비, 연화사 7층사리탑연혁비가 서 있다. 포교당 경내에는 駕洛古都宮墟碑와 분성대 및 연자루의 주춧돌로 추정되는 석물과 함허교의 교명주로 추정되는 석재 2기, 함허교의 판석으로 추정되는 석판 6기, 석불상 2기가 남아있다. 분성대와 함허정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터는 가락국 후기의 왕궁터 혹은 수로왕비의 중궁터로도 전해지며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 파사석탑을 보관한 호계사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연자루와 함허정이 세워진 역사성을 가진 장소로 전해진다.
1928년 김해김 씨 후손 김문배가 이 터에 대를 수축하여 분성 대라 하고 비를 세우면서 가락고도궁허비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함허정은 1497년 김해부사 최윤신이 초창한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연지 가운데의 정자였으나 1800년대 이전에 읍성 밖 북쪽으로 이건 되었다고 한다. 함허정은 연자루의 북쪽 파사탑의 남쪽에 네모난 못을 파고 호계의 물을 끌어들여 돌아나가게 하고 그 가운데에 島를 쌓아 높은 집을 지었는데 집 위에 띠를 덮어 정자를 만들었고 물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또한 못에 물고기를 넣고 연을 심었으며 작은 배를 띄워 기생과 풍물을 싣고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과 연자루와 함허정의 배치 관계는 1820년 경에 제작된 金海府內地圖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본 지역은 시굴조사를 통해 현재의 석축과 평행하는 호안석축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석축내부에서 분청사기와 명문 기와 등이 출토되어 이 지역이 고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15~6세기의 건축물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遺址임을 확인하였고, 이러한 내용은 문헌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현재 남아있는 이 터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김해객사의 후원지이며 옛 관아의 후원양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연화사사적비'와 '연화사 7층사리탑연혁비'에는 기록이 별로 많지 않은 고대 역사의 내용을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연화사사적비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동상동 84번지 연화사 사적
1934년 전 김수로왕은 구지봉 황금알에서 탄생하셔 지금의 봉황대 동쪽 일대에 정궁을 세우시고 이곳을 중궁터로 도읍하셨다. 왕비 책봉은 멀리 서역국에서 도래하니 맞이하라는 봉지를 받으셨다. 지금의 창원군 용원리 부인당 앞바다에 파사석탑을 실은 한 척의 배가 불도를 닦은 스님이 신부와 시종 수십 명을 거느리고 닿았다. 왕은 친히 귀빈 일행을 영접하여 처음으로 성례(成禮)를 올린 곳이 현 녹산면 지사리 명월 사지이며 왕후를 맞아 합환 한 곳은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 기슭 왕후사지이다. 귀빈인 아야타국(중인도)의 왕자 보옥(장유) 화상과 허황옥 공주이시다. 이는 출가하여 불도를 닦아 부왕의 흥법원력을 실천코저 망망대해를 도래하사 가락국에 닿으시니 필경 불법인연과 왕의 수세인연에 있어 왕후로 모신지라 화상은 출가한 몸이시라 궁전에 동거 못함으로 김해읍 삼방동 신어사에 사찰을 건립하시니 동림사와 서림사(은하사) 영구암 지장암 청진암 영운암 등을 창건하셨다. 김수로왕은 화상을 국사로 모시고 정사를 논의하시니 나라는 불국토요 백성은 태평무사하였다. 왕은 십 왕자와 이왕녀를 두시어 맛아드님은 거 등왕으로 책봉하시고 차남과 삼남 왕자는 왕후의 성을 따라 허 씨로 명하셨다. 나머지 칠 왕자는 외삼촌 보옥선사를 따라 속세 인연을 끊고 가야산으로 입산하여 삼 년간 수도하시다가 의령의 수도산(도굴산)과 사천의 와룡산 구룡산을 거쳐 지리산에 들어가 운상원을 세우고 좌선하신 지 이년 후에 가락국 시조 육십이 년 신라 파사왕 이십사 년 음 8월 십오일 밤에 오묘한 진여를 함께 대오하시어 각각 성불하셨다. 이로 인하여 운상원을 칠 불 선원 또는 칠불암이라 칭하셨다. 칠 불의 명호는 1. 김왕광불 2. 김왕당불 3. 김왕상불 4. 김왕행불 5. 김왕향불 6. 김왕성불 7. 김왕공불이다.이러한 칠 불 탄생지는 천하무비의 성지 중 성지인지라 과거 지리산 칠불암에 칠 불 존영을 모셨으나 여수 순천반란사건 때 불타 없어지고 칠 불의탄생지인 연화사에 다시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와 현실로 당시의 사찰이나 조각유물들이 가락 불교를 자랑하고 있다. 김해읍 불암동 선암에는 자연석에 조각된 불상과 선유대라고 기록된 각자가 있었으나 서기 1973년 3월에 남해안고속도로의 접안으로 파괴되고 조각난 불상은 이곳에 존치되어 있다. 또 삼정동 삼구 초선대에는 큰 암석에 자비로운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영구암에서 국사가 행차하실 때 물고기를 못 잡게 방을 붙인 곳이 오늘의 어방동이다. 김해읍 분산록에도 무언설법의 거룩한 불상이 계신다. 왕후께서 이곳 중궁에 입궐하셔 호계천변에 파사석탑을 봉안하고 호계사를 건립하여 원당으로 모셨다. 오랜 세월에 폐사가 되고 탑은 허태후능전에 원형을 잃은 채 보존되어 있다. 조상을 위하여 성조암을 도해한 은덕을 빌기 위해 만 장애 산정에 해은암을 부왕의 은공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밀양 삼랑진에 부은암을 생림면 생철리 무착산에 모은암을 김해읍 봉황산(임호산)에 도읍지의 융흥을 위해 흥부암을 진영읍 본산리 자암산에 태자암을 세웠으나 지금은 폐허에 옛 일을 고증하는 불사만이 퇴화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수로왕 기릉시 무착산정에 천지를 결성하고 그 옆에 통천사를 세운 유적이 있다. 장유면 불모산의 장유암은 장유대화상의 열반지이므로 불모산이라 칭한다.
............ "
'연화사 칠 층 사리탑 연혁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있다. 이곳에 모셔진 불사리에 관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남긴 불사리를 8곳에 나누어 탑을 조성하고 모시던 것을 , 300여 년이 지나 인도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하고 진신사리를 재분배하여 일천사원과 일천사리탑을 세워 받들어 모셨다. 이때 중국 송나라 때 조성된 불사리탑에서 한 비구승이 사리 수십과를 얻어 송나라 방자명 거사에게 인도되었다. 그리고 소철거사를 거쳐 그의 친형 소동파 소식에게 전수되고, 소식은 임종 시 법제자에게 전수하라고 부촉하였고, 그 후 금 원 명대를 거쳐 청조에 까지 면면히 이어져 청조 금석문의 대가 옹방강에게까지 전수되었다. 옹방강은 조선의 사신으로 온 추사 김정희에게 간직하고 있던 경전과 진신사리를 전해준다. 추사는 귀국하여 해남 대흥사 연파 혜장선사에게 증정하고, 그는 다시 다성 초의선사에게 전수되고, 그리고 그의 법손인 응송화상에게 전수된다. 응송화상으로 부터 증정받아 옛 중궁터 연화사 칠 층 사리탑에 3 과를 모시고, 분산 은해사의 만장대 타고봉에 재현된 '파사석탑'에 3과를 모셨다는 것이다.
수로왕릉(首露王릉)
서기 42년 가락궁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을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납릉정문 앞에 서서, 나를 이곳을 찾게 한 그 유명한 '석탑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두 마리 물고기 문양' 쌍어문(雙魚紋)을 바라보니 감개무량하다. 이곳에서는 이 물고기를 신어(神魚)라 부르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어 그 신비감을 더해 준다. 그러면 허황옥이 자신을 소개한 '아유타국'은 어디일까.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아요디아는 인도 태양왕조의 옛 도읍으로, 기원전 5세기경에 그 나라의 왕자였던 '라마'를 태양왕의 화신으로 숭배해 온 곳이다. 납릉정문에는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탑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인 쌍어문(雙魚紋)이 있고, '태조왕릉 중건 신도비' 이수에는 이글거리는 '태양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들 문양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고유의 장식문양과 일치하고 있다.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올 때 싣고 온 파사석탑의 석질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인도의 돌이다. 또, 가야 또는 가락이라는 말이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 아어로 그 뜻이. 물고기'라는 뜻이다. 과연 항해술이나 조선술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을 기원 직후에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무사히 김해에 닿을 수 있었을까? 한편 허왕후의 출발지가 인도의 아요디아가 아닌 태국의 '아유티야'이거나 또는 중국 쓰촨 성의 '보주' 지방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바다를 건너 직접 김해로 건너왔는지 태국의 아유티아에서 왔는지 혹은 중국의 쓰촨 성 보주에서 왔는지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찌 됐건 인도 아요디아 풍의 문화가 어떤 경로로든 김해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문화유산 답사회)
석양빛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수로왕릉 옆에는 노거수 팽나무가 우뚝 서서 능을 호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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