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1. 10:38ㆍ도보여행기/駕洛國의 편린을 찾아서
(2) 불보종찰 통도사, 그리고 산내 암자를 찾아 걷다 -1
통도사는 낙동강과 동해를 끼고 하늘 높이 치솟은 해발 1,050미터의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자장율사가 당나라 구법중에 모셔온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 및 경책을, 금강계단을 쌓은 뒤 봉안하고 사명을 통도사라 했다.
통도사는 삼보사찰 중 불보사찰인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라는 사명은 여러가지 뜻을 담고 있는데, 첫째는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의 통도이다, 통도사의 근본정신을 말한다. 둘째는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의 통도이다, 셋째는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는 영축산이 인도 왕사성의 부처님 성지인 영축산과 통한다 하여 통도라 하였다.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홍매의 화사함과 그윽한 향기에서 빠져 나온다.
봉발탑을 바라보고 관음전 앞 석등 앞에 서니 오 층 석탑 뒤로 우뚝 선 대웅전이 바라보인다.
세존비각(世尊碑閣)과 개산조당(開山祖堂)
세존비각은 1706년(숙종 32) 계파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고 석가여래의 영골 사리비를 세우면서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의 비문에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 온 것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사리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2개의 함에 사리를 담아 금강산에 계신 서산대사께 보냈을 때, 서산대사는 영축산 통도사가 바로 문수보살이 자장스님에게 지정한 장소이므로 한 개의 함은 통도사 금강계단에 다시 돌려보내고, 다른 한 개의 함은 태백산에 봉안하도록 하였던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세존비각을 보고 개산조당 솟을대문 앞에 서서 석등과 팔정도 석물을 바라본다.
석물에는 여덟 가지 수행덕목인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明, 正進, 正念, 正定 팔정도가 각자 되어 있다.
팔정도는 석가모니가 부처에 이른 후 설한 최초의 설법이라고 한다.
개산조당(開山祖堂) 솟을삼문을 들어서니 불법의 바다인 해장보각(海藏寶閣)이다.
해장보각에는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개산 한 자장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정에 합장한다.
신라 선덕여왕 15년 646년에 개산 하였으니 1,366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대자연의 섭리는 한치의 어금남이 없다.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한다.
천 년 고찰에 봄이 오니 개산조당 뒤뜰 어린 매화나무가 꽃을 피운다.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화사하게 미소 짓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5년(인조 22)에 중건하였다.
긴 세월이 배어있는 돌층계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의 화문(花紋)과 돌계단 소맷돌의 연화문(蓮花紋)이 세월의 깊이를 보여준다.
빛바랜 꽃살문이 예스러운 멋을 풍긴다.
대웅전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동서남북 사면에 모두 편액(扁額)이 걸려있고, 또 각각 주련이 달려있다.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대웅전과 금강계단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고, 주련은 구하(九河) 스님의 글씨다.
동서남북 네 면의 주련을 옮겨 본다.
동쪽 '대웅전' 주련
月磨銀漢轉成圓 달이 은하수를 맴돌아 둥글고 밝으니
素面舒光照大千 흰 얼굴 잔잔한 빛 대천세계를 비추네.
連비山山空捉影 팔을 벌려 산에 비친 달을 붙잡으려 하나
孤輪本不落靑天 달은 본래 청천에서 떨어지지 않고
默契菩提大道心 묵묵히 보리 대도심에 계합하네
서쪽 '대방광전' 주련
楊柳梢頭甘露灑 버들로 머리 감고 감로를 뿌리고
蓮華香裏碧波寒 연꽃 향기 속에 푸른 파도가 서늘하네
七寶池中漂玉子 칠보연못에 옥자(표주박)를 띄우고
九龍口裡浴金仙 아홉 용이 입으로 금선(金仙)을 목욕시키는데
大聖元來無執着 대성(大聖)은 본래 집착이 없다네
남쪽 '금강계단' 주련
初說有空人盡執 처음에 설한 유와 공에 모든 사람 집착하더니
後非空有衆皆孫 뒤에 공(空)도 유(有) 아니라 하니 사람들 모두 버리네
龍宮滿藏醫方義 용궁에 가득한 경률론 모두가 의사의 처방이요
鶴樹終談理未玄 학수에서 마지막 설법도 현묘한 이치는 못되네
북쪽 '적멸보궁' 주련
示寂雙林問幾秋 묻노니 쌍림에서 열반에 드신 지 그 몇 해인가
文殊留寶待時求 문수보살 보배를 모시고 때와 사람을 기다렸네
金身舍利今猶在 부처님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普使群生禮不休 많은 군생들 예배를 쉬지 않네
금강계단(金剛戒壇)
통도사의 핵심 '금강계단(金剛戒壇)'
2층 기단 위 중앙에 사리를 보관하는 석종 사리탑
기단 주위로 석책(石柵)을 두르고 석문(石門)을 두었다.
금강계단 뒤쪽으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노송이 자라고 있고, 소나무 사이로 푸른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석문 앞 제단에 공양미를 올리고 합장한다.
금강계단 위로는 어떠한 날짐승도 날지 않고 오줌, 똥을 누지 않고, 또 주변에서 지저귀지도 않는다고 전해지는 곳
금강계단 석채가 주위로 합장하고 돌고 있는 수많은 불자들 속에 섞여 걷는다.
기단은 2층으로 쌓았는데 1층 한 변의 크기는 길이가 약 10미터인 정사각형의 금강계단이다.
1층 기단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그 바깥쪽에는 제석상을 배열했다.
금강계단 담장 뒤로 소나무 대나무 숲 앞에는 둥글게 손질된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곳의 차나무는 언제 누가 왜 심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없으나, 금강계단을 만들 때 차나무를 심었던 것이라고 통도사 스님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다.
통도사의 창건은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금강계단이라는 사리단을 쌓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다음 해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사리와 부처님이 입으신 가사를 당나라에서 모시고 왔으며, 그중 정골사리와 부처님
가사를 통도사에 모신 것은 선덕여왕 15년(646)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탑상 편> '前後 所將舍利' 조에 보면,
"선덕여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년)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彿頭骨)와 부처의 어금니(彿牙)와 부처의 사리 1백 알(彿舍利百粒)과과 부처가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緋羅金點袈娑) 한 벌을 가지고 왔다.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
그 나머지는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
통도사의 계단은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돌뚜껑으로 모셔 놓았다."라고 쓰여 있다.
구룡지(九龍池)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 마리 용이 가람을 수호할 서원을 세우고 남아 있기를 원하므로 조그만 연못을 파고 머무르게 했다 한다.
금강계단 옆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곳을 '구룡지'라 부른다.
영산전(靈山殿)
황화각 앞의 구골나무는 동백나무 분위기를 닮았다.
줄기 하나에서 가지가 무성히 뻗었다.
잎은 타원형이며 윤기가 있고 가시 같은 톱니가 있다.
열매는 봄에 검붉게 익고, 꽃은 늦가을에 하얗게 핀다.
범종루(梵鐘樓)
일주문을 나서 반월교를 건넌다.
통도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산내 암자 19개를 거느리고 있다.
영축산 곳곳에 암자가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세워져 오랜 역사를 지닌 자장암, 미타암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창건된 서운암, 안양암, 극락암, 비로암, 고려 공민왕 때 지어진 수도암,
백련암, 옥련암 등,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사명암과 축서암, 백운암이 건립되었다.
매화와 금강계단 그리고 통도사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오후 3시다.
해 질 녘까지 서운암 옥련암 사명암 자장암만 둘러보기로 하고 서둘러 암자를 찾아 길을 나선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길을 걷는다.
서운암(瑞雲庵)은,
1346년(고려 충목왕 2) 충현대사(沖絢大師)가 창건하였으며, 1859년(철종 10) 남봉대사(南逢大師)가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성파(性坡) 스님이 다시 중창하고 85년부터 5년 동안 3,000 불상을 흙으로 구워내 도자삼천불(陶磁三千佛)을 모셨고, 9 년여 걸려 16만 도자대장경(十六萬陶磁大藏經) 대불사(大佛事)를 완성하였다. 또한 전통 천연 염색인 쪽(葉) 염색기법을 재현했다. 생약재를 첨가한 전통 약된장과 간장을 개발하였고, 서운암 주변 20여 만평 야산에 1백 여종의 야생화 수 만송이를 심어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하였다. 삼천불전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수많은 된장독이 아름답다. 맑은 바람과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익어가는 약된장 100종의 야생화 전시포가 조성되어 있다. 매년 봄이면 들꽃 축제가 열리는 서운암, 너무 이른 봄이라 야생화를 볼 수가 없다.
장경각 오르는 구릉길에는 이팝나무를 많이 식재해 놓았다. 도자로 만든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언덕 위 장경각에 오르니 넓은 구릉지와 멀리 영축산
능선이 시원히 조망된다. 아직은 너무 이른 봄이라 새싹이 움트지 않아 들꽃 동산이 황량하기만 하다. 매화꽃 사이로 바라보이는 된장독이 아름답다.
옥련암(玉蓮庵)
1374년(공민왕 23)에 쌍옥대사(雙玉大師)가 창건하였으며, 1857년(철종 8)에 호곡(虎谷)ㆍ청진(淸眞) 두 대사가 중건하였다. 사찰 내에 전하는 이야기로 옛날 이 옥련암에 ‘장군수(將軍水)’라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장군수를 매일 마시는 옥련암 스님들은 힘이 굉장히 세어서 큰절의 스님들이 당하지를 못했다. 하루는 큰절의 스님들이 가만히 의논하여 몰래 장군수 우물을 메우고 그 물길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 후부터는 옥련암에는 힘센 스님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장군수가 흐른다는 옥련암 지하수는 오늘도 물맛이 변함이 없고 찻물로 으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원한 장군수를 마셔 본다.
오후의 나른한 몸에 생기가 불어난다.
돌층계를 걸어 오르니, 불이문(不二門)인 듯 아담한 두 그루의 소나무가 가지를 맞대고 서 있다.
'큰 빛의 집' 편액을 단 법당이 화려하다.
'大光明殿'을 우리말로 옮기면 '큰 빛의 집'이 된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이다.
주련의 글씨도 모두 한글로 되어 있다.
중생이 함께 성불하도록 하여 주소서
중생의 무명을 지혜로 바꾸어 주소서
중생의 모든 업장을 녹여 주소서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게 해 주소서
중생의 재난을 모두 소멸하게 해 주소서
중생의 탐진치 계정혜로 바꾸어 주소서
법당의 어간문은 화병에 모란꽃을 가득 꽂은 문양을 조각한 꽃문이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화다.
연꽃, 천인상, 물고기등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단청이 화려한 '큰 빛의 집'이다.
스피커에서 찬불가가 가만히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귀 기울여 들으니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 경이다.
인적이 없는 옥련암 경내를 가만가만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조용조용히 울려 퍼진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찬불가를 듣는다.
가슴을 적시어 온다.
"...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계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물 흐르듯 찬불가가 잔잔히 이어간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돌이 된다.
옥련암 편액을 단 요사채 앞에는 가지를 무성히 뻗은 다복솔이 자라고 있다.
석양빛을 받은 다복솔의 무성한 가지들이 붉게 빛난다.
멀리 영축산 능선이 보인다.
층계를 내려와 옥련암 입구에 있는 장군수를 다시 또 시원히 마시고 옥련암을 뒤로하고 걷는다.
나는 알았네
-박 효 찬
긴 그림자 겨울 닮은 봄날
찾은 암자에 도량의 살얼음이
얇은 볕에 익어 봄 소리 냄에
난 알았네! 봄이 왔음을
산등성
허겁지겁 힘겹게 오른 암자 부엌에서
한 술 얻어먹는 봄나물에
허기를 채우며
난 알았네! 내 탐욕을
난 알았네
대웅전 부처님 바라보심에
벗어놓은 내 신발에 묻은
진흙 한 줌 댓돌 위에 있음을
지친 걸음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의 걸음에서
나는 보았네! 부처를.
사명암을 가기 위해 차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니 왼쪽 산기슭으로 희미한 오솔길이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사명암이다.
사명암 법당 주위는 온통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 등 울울한 수림이 둘러싸고 있다.
아름다운 연당이 있고 일승대(日昇臺), 무작정(無作亭)과 어울러진다.
사명암(泗溟菴)은,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이곳에 모옥(茅屋)을 짓고 수도하던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사명대사가 팠다는 우물이 있는데 찻물로는 명수(名水)로 손꼽힌다. 1573년(선조 6)에 사명대사(泗溟大師)를 흠모(欽慕)한 이기(爾奇)ㆍ신백(信白) 두 스님이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사명암 감로탱 (현재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감로탱이라 함은 지옥에 빠진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해 주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면소재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이 탱화는, 폭을 상하로 엮어 이은 흔적이 있다. 화면은 크게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 상단 중앙에는 칠 여래상이 연꽃 위에 서 있고, 그 아래에는 향로·촛대·꽃·과자가 차려진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향우 측에는 지장·관음을 비롯한 보살상 3구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고, 이들을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보살상 아래쪽에는 성곽을 배경으로 왕과 군중들의 행차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반대편 향좌 측에는 인로왕보살상이 있다. 사사 인로왕보살 아래쪽에는 의식승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화면 하단 중앙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거대한 아귀 1구를 중심으로 지옥 장면과 사당패의 줄타기 장면, 싸움·전쟁 등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화면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이 감로탱은 금어 한월·상림·성환 등이 참여하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문화재청)
차밭을 지나 자장암으로 가기 위해서 고개를 넘는다.
평평한 너른 들이 전개된다.
논밭이 있는 평화로운 시골길을 걸어 서축암 비로암 갈랫길에서 서축암으로 향한다.
조금 걸어 금와교(金蛙橋)를 건넌다.
예사롭지 않은 적송이 울울한 풍광이 나온다.
길 아래로는 미려한 계류가 흐르고 있다.
계류에는 넓은 반석이 깔려 있고 그 위로 맑은 물이 연실 넘쳐흐르고 있다.
이곳이 바로 자장동천(慈藏洞天)이다.
자장동천을 따라 길을 오르니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온 듯하다.
가파른 돌층계를 오르니 자장암이다.
자장암(慈藏菴)
깨끗한 절 마당, 낮은 담장과 울울한 적송, 영축산 능선이 조망되어 빼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다. 자장암은 통도사를 건립하기 전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이 산중에 들어 바위벽 아래에 움집을 짓고 수도했다고 한다. 옛 이름은 자장방(慈藏房)이라 하여 통도사 경내 칠방(七房)의 하나로 자장율사 열반 후 제자들이 대를 이어 수도하던 곳이라 한다. 이 암자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회봉대사(檜峰大師)에 의하여 중창되었다고 하며, 1963년 용복화상(龍福和尙)이 중수하였다. 법당은 암벽을 의지하고 서쪽을 향해 있으며, 그 옆에는 1896년에 조각된 약 4m의 커다란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마애불의 중앙에는 아미타불,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음각되어 있다.
법당 뒤쪽에는 암벽에서는 맑은 석간수(石間水)가 흘러나오고, 석벽에는 '관세음보살' 각자와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있다.
자장율사가 수도하고 있을 때 두 마리의 개구리가 물을 혼탁하게 하므로 신통력으로 석벽에 구멍을 뚫고 개구리를 들어가게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에도 있는 한 쌍의 개구리는 몸이 청색이고 입이 금색이다.
관음전은 거북바위 위에 전각을 올렸지만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관음전 앞에는 거북의 꼬리 부분, 관음전 뒤로는 거북의 머리 부분이 있고, 법당 안에는 거북의 몸통 부분 일부가 바닥을 뚫고 삐죽이 솟아나 있다.
관음전 뒤 소나무에 둘러싸인 암봉 위에는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자장암
-효종스님
산빛 녹아드는 바람
대나무 소곤대는 돌계단 오르니
천년바위에 좌정한 채
무심히 반기시는 석불의 미소
자장율사 뚫었다는 관음전 뒤 바위구멍
금와보살 친견하려 바위를 안았더니
전설로 전해지는 가피는 어쩌고
속세의 때 열병인양 남아
눈빛만 주시는가
영축산 깊은 골
산새 울음
탑을 비껴 날아오르네.
석양이 내려 깔릴 무렵 산내 암자 순례를 마치고 통도사 경내의 계류를 건너 일주문을 들어선다.
천왕문 가는 길 옆으로 깨어진 석물들이 보인다.
석양 무렵의 매화를 감상하기 위해 극락보전으로 간다.
저녁 햇살을 받고 있는 점점의 붉은 매화가 고고하다.
고색창연한 극락보전과 빛바랜 외벽화 위에 매화가 붉게 피어나고 있다.
저녁 예불 시간이다.
스님이 둥둥둥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여러 스님이 번갈아 가며 법고를 두드린다.
운 판을 두드리고 목어를 친다.
이어서 범종을 친다.
바로 옆에서 타종 소리를 들으니 우뢰가 치는 듯 귀가 먹먹하다.
삼천대천세계로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
그 소리 가슴 깊숙이 파고들며 울린다.
사물의례를 끝낸 스님들이 일렬로 어디론지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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