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4. 15:28ㆍ도보여행기/駕洛國의 편린을 찾아서
(3) 통도사 산내 암자를 찾아 걷다 - 2
2012.3.20. 화요 맑음
"암자(庵子)란 수행자들이 머물다 가는 거처이자 구도 정신의 본향(本鄕) 같은 곳이며, 허허로운 이들을 보듬어 주는 어머니 같은 자리이며, 욕심과 번뇌의 속뜰을 맑히는, 비질 자국이 선명한 곳이다."
06:20분 숙소를 나서기 위해 현관문으로 내려서니 방문을 열고 나오는 여주인과 마주쳐 서로 인사한다.
"이렇게 일찍 출발하셔요?"
"아, 네."
자신은 사진작가라 한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가리키며 다 자기가 찍었다고 한다.
설중매(雪中梅)와 오메가 일출 사진이 인상적이다.
수인사를 나눈 후 문을 나서 축서암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한 굽이돌아나가니 아침 기운을 머금은 푸르스름한 영축산 능선이 불현듯 눈앞에 펼쳐진다.
논밭이 펼저져 있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바라보며 새벽의 맑은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서리마을을 지나 지산리 양지농원 쪽을 향한다.
경사진 산길을 굽이 굽이 오르니 길은 점점 좁아진다. 영축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아마도 축서암 가까이 온 모양이다.
길 옆으로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새벽 동녘의 햇살을 받은 소나무 줄기가 붉게 빛난다.
숲으로 들어가 老松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니 하늘로 오를 듯 용틀임하는 붉은 노송의 가지가 신령스러워 보인다.
노송을 어루 만지며 솔향을 맡는다.
無 我
- 殊眼
듬성한 老松 아래
파란 이끼 잠들고
솔바람 사이로
오동이 잠든다
春雪香 익은 맛에
또 한생 보내누나
축서암에 들어서니 노송 너머로 영축산이 가까이 보인다.
영축산 아래 노송으로 둘러싸인 축서암.
새벽의 맑고 냉냉한 기운을 마시며 맷돌석을 디디고 법당을 향한다.
계속 개가 짖고 있으니 처사가 나온다.
수안스님에 대해 물으니 지금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문수선원에 계신다고 한다.
선화가인 수안스님은 예인(藝人) 스님이다.
삼성각 앞 뜨락에 서서 수안스님의 글과 그림의 배경인 노송과 멀리 조망되는 겹겹의 산을 바라본다.
잡화선원(雜華禪院) 중건을 마치고 담을 쌓다가 우연히 샘물 줄기를 발견하고 맷돌샘을 만들고 시를 바위에 새긴다.
맷돌샘
신령스러운 정기가 玉水되어
솟는 곳
샘 하나 만드노니
물 마시는 이웃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
항상 가득 있어라
老松에 달그림자
으스러진 물소리
靈鷲山 구름 안개
비가 되어 내린다
그러나 지금은 맷돌샘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더 옮겨본다.
心
파초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눈 들어 앞산 바라보니
초록색 머금은 듯
몸은 열개라도 바쁜 생활이지만
마음은 흰구름보다 고요로우니
이 아니 장부살림이라 이르리오
茗禪三昧
참 아름다워라
파초잎에 성근 빗방울 소리.
合竹扇
청량산 文殊眼이 합죽선에다
老松 가지 걸린 달빛 흐름을 담아
雪也님께 드리오니
흔들어 보소
합죽선이 움직이는가
淸風이 흐르는가
아........雪也
마음 달이 곱다.
茶心
봄에는 백가지 꽃이 피고
가을이면 노송가지에
걸린 달이 있다.
여름에는 맑은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있다
창을 열고
다시 눈감아 보는
마음
사철 차가 있어
그래서
나는 좋다.
童子
인생 삶이 모두 다 멋이리라
한 생각 쉬고 보면 모든 게 멋이리라
鶴을 탄 童子는 구름밖에 놀고
소를 탄 童子는 젖대 소리에 마음 젖는다
육도를 윤회하며 돌고 돌아도
아하 이것이 다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이다.
소설가 정찬주 님의 '암자로 가는 길"의 축서암 글을 옮겨 본다.
"영축산(靈鷲山)은 스님들의 예향(藝鄕)이다. 한국 불교 최고의 예인 스님들이 영축산에 머물고 있거나 거쳐갔기 때문이다. 단청부문 인간문화재 혜각(慧覺), 선화의 대가 석정(石丁), 성악가인 테너 시명(是名) 스님 등이 그들이다. 물론 축서암 암주인 수안(殊眼) 스님도 예외가 아니다. 암자도 주인이 하는 일을 닮는가. 4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축서암(鷲棲庵)은 그대로 거대한 화실 같은 느낌이다. 뜨락에는 모과와 목련, 파초와 옥잠화, 석류와 감나무가 그림의 배경인 듯 자리 잡고 있고, 암자 주위엔 잘생긴 소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서 있다. 수안스님에게는 그림 그리는 것이 곧 수행이다.
그림으로써 자비를 이웃에 전달하겠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스님의 선화(禪畵)는 외국에서 더 호평을 받고 있다. 프랑스 상원의장 초청으로 룩셈부르크 궁의장공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국내의 화가들을 놀라게 하였고, 모로코나 독일 등지에서도 그의 수행력을 그림으로써 펼쳐 보였던 것이다.
최근에는 유니세프(UNICEF)에서 발행하는 엽서에 그의 작품이 인쇄되어 세계 각국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어디까지나 스님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느새 그는 화가에서 수행자가 되어버린다. "허공에 있소. 점을 찍어 두었지. "또 음유시인이 되어 시를 낭송하기도 한다. 축서암이 어떤 곳이냐고 묻자 '태풍의 눈과 같은 곳, 콧물이 날 만큼 서러운 곳'이라고 시인의 감성으로 대답하신다.
나그네도 스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태풍의 눈과 같은 기(氣)를 느낄 때는 붓을 단숨에 휘둘러 그림을 그리고, 콧물이 날 만큼 서러울 때는 시(詩)를 읊조리는 것은 아닐는지. 뜨락의 옥잠화는 벌써 꽃이 져버린 모습이지만 스님의 시 '옥잠화' 가운데 한 구절은 아직도 나그네의 뇌리에 아낙의 은비녀처럼 뚜렷하다.
내 사랑하는 아낙
오랜 전생부터
꽃 가꾸는 정성이 대단하더니
죽음이란 아름다운 영혼을 안고
꽃뱀으로 세 번의 생을 살았다
스님이 그림을 숨겨두었다는 허공을 바라본다. 햇살이 한가득 차 있어 양명하다. 햇살이 이러하니 어찌 모과가 향기를 퍼뜨리지 않을 것인가. 무심한 나그네지만 석류가 아프게 벌어지는 황홀한 자해(自害)를 두고 어찌 모른 체할 수 있겠는가. 암자를 내려서려 하는데 성악가인 테너 시명스님이 물 한 모금 마시고 가라 한다. 과연 돌우물에서 퐁퐁 솟는 물맛이 좋디. 축서암의 물김치나 직접 쑨 메주가 왜 불자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지 알 것만 같다. 돌우물의 물맛에 그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축서암을 되짚어 나와 극락암으로 향한다.
길 아래로 태극문양이 있는 솟을대문과 비석, 기와집이 보인다.
내려가서 안내문을 본다.
가락궁의 왕자인 김무력장군과 그 배 박 씨 부인의 묘를 수호하는 재실 취산재(鷲山齋)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대왕이 태대각간 김유신장군에게 삼국통일을 치하는 자리에서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공과 부 김서현 공의 유덕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삼국이 통일되었으며 우리 군신이 베개를 높이 하여 안 민할 수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한다.
가락의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길로 들어선다.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서니 영축산 산능선이 보이고 구불구불 마치 오솔길처럼 이어진다.
물이 흥건한 논 옆을 지난다.
극락암 오르는 길 옆으로 어린 매화나무를 많이 식재해 놓았다.
꽃망울이 조발조발 맺혀 있다.
극락암 가는 호젓한 산길은 14,000여 그루의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다.
극락암이 영축산 능선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뽐낸다.
이곳이 바로 영축산의 심장 극락암이다.
극락암은 선방인 호국선원과 영월루, 조사당 정수보각 수세 전 독성각 삼소굴 원광재 등의 당우가 있다.
극락암의 영지(影池)에는 영축산의 상봉이 그림처럼 비친다.
영지 위에 무지개형 다리를 놓고 경봉스님은 홍운교(虹雲橋)라 이름 지었다.
영지 옆 고목이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극락암 뒤로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데 솔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소리를 낸다.
언덕에 만개한 홍매는 허공에 점점이 붉은 꽃을 뿌려 정신이 몽롱할 정도다.
그 옆 해맑은 백매가 그윽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변치 않는 한결같은 마음의 문이 아침 햇살을 받고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산정약수 샘물이 돌확을 연실 넘쳐흐르고 있다.
경봉선사는 약수터를 만들고 물의 법문을 바위에 새겨 산정약수비를 세웠다.
물의 지혜를 배우라고 한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고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고
사람도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산정약수(山精藥水)
이 약수는 령축산의 산정기로 된 약수이다.
나쁜 마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먹어야 모든 병이 낫는다.
물에 배울 일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여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은 물이다.
넓고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 이슬비...
사람도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
靈鷲山深雲影冷 洛東江闊水光靑
령축산이 깊으니 구름 그림자 참고
낙동강 물이 넓으니 물빛이 푸르도다
미소할 뿐
산정약수
삼소굴(三笑窟) 뜨락을 거닌다.
삼소굴은 현대불교의 대표적 고승 중의 한 분이었던 경봉(鏡峰) 스님(1892-1982)이 오랜 세월 머물다 입적한 곳이다.
경봉스님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다.
선사는 들려주었다.
"삼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미소인 삼세소(三世笑)와 과거 현재 미래의 꿈인 삼세몽(三世夢)을 초탈한 뜻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 삼소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니라."라고
삼소굴은 경봉스님이 촛불이 문틈을 파고드는 바람에 부딪혀 춤을 추는 광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고 悟道의 노래를 불렀던 곳이다.
我是訪吾物物頭
目前즉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曇華光法界流
내가 나를 찾아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서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하하 우습구나, 이제 만나 의혹이 없으니
우담바라 꽃광명만 온 누리에 흐르네.
경봉스님은 생전에 늘 말했는데 도인과 중생의 차이는 네 가지를 알고 모르는 데 있다
중생에게는 네 가지 큰 의혹이 있다 하였다.
자기를 모르는 것
온 곳을 모르는 것
가는 곳을 모르는 것
죽는 날을 모르는 것
선사는 이곳 삼소굴에서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월간 해인'에 있는 글을 옮겨 본다.
"통도사를 감싸 안은 영축산은 그 심장 깊숙이 극락암을 품고 있다. 극락암은 통도사 근현대 역사의 주축을 이룬, ‘구하의 교’와 ‘경봉의 선’이라고 일컫는 경봉선사(1892~1982)가 삼소굴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렸던 통도사의 말사이다. 삼소굴은 1927년, 경봉선사가 용맹정진 중, 촛불이 문틈을 파고드는 바람에 부딪혀 춤을 추는 광경을 보고 깨달음을 노래한 곳이며,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라 ‘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법을 구하기 위해 승속을 막론하고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불자들에게 자비의 미소로 지혜를 열었던 공간이다. 극락암은 고려 충혜왕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50여 년간 극락암을 지키며 모든 중창 불사를 주관해 온 선원장 명정스님은 “땅만 파면 신라시대 와당이 ‘나 여기 있소’하고 무수히 나왔는데 고려 창건 기는 허구야”라고 하신다. 명정스님은 20년 동안 경봉선사를 곁에서 시봉한 효상좌이다. “노장이 불국사에서 6개월 전에 설법하셨던 법문을 적어 오라고 하셨어. 어렵지만 그대로 써서 드렸거든, 그 일이 시초가 되어 노장님 곁에서 걸망 지고 다니는 일등 수좌로 글쟁이가 되어, 타락 아닌 타락을 하게 되었지.”라고 하시는 스님의 얼굴에서 영축산 천진불의 미소가 피어오른다. 입승 스님께 방문을 잠그라고 하시더니, 열쇠 꾸러미를 찾아 벽장에서 꺼내온 보따리를 풀어놓으신다. 용성, 한암, 만공, 탄허, 만해, 춘성, 성철, 향곡, 석우스님등 경봉선사가 당대의 선지식들과 깨달음의 경지를 겨뤘던 법거량, 주고받은 선문답, 일생동안 쓴 일기, 사진 등 보물처럼 간직한 스승의 유필이다.
순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감동과 온몸에서 느껴지는 전율이 교차한다. 한자리 앉아서 기라성 같은 선승의 숨결과 손길이 농축된 수많은 문자사리를 한꺼번에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스님은 스승의 방대한 유필을 모아 ‘경봉스님 말씀’ ‘삼소굴 소식’ ‘경봉일지’ 등을 펴냄으로 스승의 뜻을 기리고 불자들의 마음을 열어 세상을 깨우고 있다. 경봉선사 입적 후 원광재를 지키며 가풍을 이어가는 스님은, 스승을 한시도 잊지 못한 사무친 그리움이 절절하다. “노장님 가신지 벌써 30년이나 되었어. 잠깐 지나간 세월인데, 살아 계시는 것만 같아.” 가느다랗게 떨리는 스님의 음성이 다관 가득 찻잎을 담아 진하게 우려주신 독한 차 맛처럼 가슴을 흠뻑 적신다. 호국선원은 경봉선사가 1928년 조 실로 추대되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입적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낮에는 설법, 밤에는 용맹정진의 독특하고 힘든 수행으로 “바보가 되거라”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보아라”하며 수좌들의 정진을 독려했다. 경봉선사의 자비가 훈습된 호국선원에는 수행자가 100명 이상 모여들어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선원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경봉스님은 詩 書 畵와 禪과 茶까지 두루 갖춰 五絶로 불렸던 대선사다.
차를 좋아하여 茶禪一味를 가르쳤던 스님이다.
喫飯喫茶人生 日常三昧之消息 會德磨 茶
밥 먹고 차 마시는 살림살이가 일상삼매의 소식이라. 이 소식을 알겠는가! 차.
차에 관한 시도 많이 남겼다.
滿天風雨산處空
月재千江水面中
山岳高低揷空連
茶前香藝古度通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 허공에 흩어지니
달은 일천강 물 위에 떠 있고
산악은 높고 낮아 허공에 꽂혔는데
차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길이 통했네
秋水長天
上下圓融
一色蘆花
時兮景兮
是外何奇
萬古眞消息
石鼎一椀茶
가을물 긴 하늘에
상하가 원융하고
한 빛 갈대꽃에 명월이 왕래하니
시절과 풍경이여
이 밖에 어떤 것이 기이한가
만고의 참된 소식은
돌솥에 끓인 한 주발의 차일세
소나무 숲길을 지나 활수교를 건넌다.
서어나무 군락지가 보이고 호젓한 산길을 걸어가니 비로암이 보인다.
비로암은 고려 충목왕 원년(13450에 영숙대사가 창건하였다.
조선 선조 11년(1578) 탄연대사가 중건하였고, 다시 근래에 원명화상이 중수하였다.
금강역사가 벽화가 그려진 여시문(如是門)을 들어서니 좌우벽에 사천왕상이 그려져 있다.
석등 석탑 연못 깨끗한 마당 그리고 잘 가꾸어진 조경수, 자연의 아름다운 소나무들과 어우러진 훌륭한 경관을 지닌 암자이다.
멀리 겹겹의 산들이 바라보인다.
서축암에 들러 돌거북 입으로 흐르는 감로수를 마신다.
인법당 형식의 대웅전에는 '三界主'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삼계의 주인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다보탑이 있다.
잔디밭 마당에 서니 영축산이 그림처럼 조망된다.
안양암 들어가는 입구는 노송이 미대를 뽐내고 있다.
석축 앞으로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하늘로 꿈틀거리며 솟아 있고, 바위 아래로 소나무 뿌리는 용의 꼬리처럼 뒤엉켜 있다.
소나무 사이로 영축산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석축 끝에서 니 통도사 전경이 조망된다.
안양암(安養庵)은 안양동대라는 평평한 바위 위에 자리한 통도사의 산내암자이다.
이 암자는 1295년(고려 충렬왕 21)에 창건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865년(고종 2)에 중건된 것이라 한다.
안양암의 경내에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를 비롯한 세 채의 건물이 있다.
그러나 본래는 현재의 북극전만을 안양암이라 불렀고, 나머지 건물은 뒤에 지은 것이다.
북극전은 사람의 장수를 도와주는 북두칠성을 봉안하는 불전이다. 이 때문에 칠성전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도교 신앙과 관계있는 칠성신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수명신으로 불교화되어 칠성각에 봉안되었다.
칠성각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불전으로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칠성전에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의인화한 칠성그림을 거는데, 이곳 북극전에도 역시 칠성탱화를 봉안하였다.
북극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이지만, 기둥 간격이 2m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내. 외부는 화려하고 고급스러런 장식을 연출하였다.
안양암에서 통도사 전경을 바라보며 꾸불꾸불한 경사진 길을 내려서니 통도사 경내를 흐르는 계류에 닿는다.
도피안교를 건너 통도사 긴 담장과 계류를 따라 걷는다.
나를 찾아 걸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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