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神魚가 遊泳하는 가락 고찰 銀河寺

2012. 4. 20. 22:07도보여행기/駕洛國의 편린을 찾아서

(7) 神魚가 遊泳하는 가락 고찰 銀河寺

       2012. 3. 22    흐리고 비

 

새벽 숙소를 나서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를 찾아 나선다.

복원한 해상 포구에는 나룻배가 매어 있고, 고상가옥들이 수면에 반영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망루를 지나 구릉에 오르니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계된 황세바위가 보인다.

봉황대에 오르니 돌덩이가 널브러져 있다.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망이 시원하지 않다.

여의각, 그리고 가야시대의 주거지를 복원한 고상가옥을 지난다.

해상 포구와 고상가옥

 

망루

 

황세바위

 

돌덩이가 널브러져 있는 봉황대

 

여의각

 

고상가옥 뒤로 분산과 김해 시가지가 보인다.

 

                               

여기저기 내려가는 길이 많아  새벽 산책 중인 사람에게 수로왕릉 가는 길을 물어본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혼자 오신 것 같아요?"

"예, 옛 가락국  답사여행을 다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여행은 혼자 다녀야 하지요. 조용히 사색하며 다니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죠.  괜히 우 몰려다니며 술이나 마시고 떠드는 것은 여행이

아니죠."

그의 얼굴과 눈빛에서 인생의 깊은 연륜이 묻어난다

수로왕릉 담을 따라 걷는다. 동상초등학교 앞을 지나 활천고개로 향한다.

활천고개 사거리 직전 삼거리에서  가야로로 조금 가다 진흥하이츠 빌라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 언덕을 오르니 분산 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봉화대에 오르니 김해 시내와 김해평야, 낙동강과 남해바다가 시원히 한눈에 조망된다.

 

봉화대에 오르니 김해 시내와 김해평야, 낙동강과 남해바다가 시원히 한눈에 조망된다.

 

 

 

봉수대 뒤편 푸른 대숲에 둘러싸인 바위에는 대원군의 친필인 '萬丈臺'와 낙관(落款)이 새겨져 있다.

만장대(萬丈臺)는 조선시대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숲과 바위사이를 빠져나가니, 분산에 띠를 두르듯 분산성이 그림같이 이어진다.

 

 

바위 면에 새겨진 대원군의 친필 '만장대'와 '낙관'

 

분산성이 띠를 두르듯 그림같이 이어진다.

 

분산성의 수축 내력 등을 기록한 4개의 비석을 보존하고 있는 충의각이 보인다.

분산성은 고려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옛 산성을 돌로 쌓았고, 조선말에는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쳐 쌓았다고 한다.

 

 

 

불이문 앞 반듯한 바위에 '

駕洛古刹 海恩寺'라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포대화상이 보이고,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장유화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물고기와 해룡 조형물이 서 있다. 

허왕후와 장유화상은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음에 감사하는 뜻으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만장대에 절을 짓고 해은사(海恩寺)라 이름 지었다.

           

海恩寺 不二門

 

장유화상과 물고기, 해룡

 

포대화상

 

해은사(海恩寺) 안내문을 옮겨 본다.

"경남 김해시 어방동 964번지 분산성 내 해발 330m의 정상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 말사로써 전통문화 보존지정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 가락국이 건국되고 약 7년 후에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둘 배에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도래하여 억만리 머나먼 바닷길에 숱한 풍랑과 역경을 막아준 바다 용왕의 은혜에 감사한 뜻으로 남쪽 황금바다를 굽어보는 이곳 만장대에

절을 세우고 해은사(海恩寺)라 했다. 김해의 진산인 분성 안에 가락국의 원찰로써 그 후 전란과 화재로 몇 차례의 소실과 복원을 거듭해 오다, 현재의 큰 법당인 영산전은 30여 년 전 재 중건하였고 그 옆 대왕각은 한국 최고의 성씨인 김해김 씨 시조 김수로왕 영정과 김해 허 씨 시조 허왕후의 영정이 봉안돼 모시고 있으며 현존 전해지고 있는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영정으로 해은사 영정을 바탕으로 표준 영정이 제작된 바 있다. 영정 앞에는 허왕후가 인도의 망산도(望山島)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 있는데 신비한 영험이 있어 소원을 이뤄주는 돌로 전해 내려오면서 지역민들의 오랜 정신적 의지처로 신앙으로 받들어져 많은 영험설화가 구전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 효험의 내력이 이어져 오면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영산전 바로 뒤편 타 고봉(打鼓峰)엔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올 때에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전하는 그 탑을 원형대로 근접하게 복원하고 그 안에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멸의 적멸보탑이 봉안돼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해은사는 서천축 인도로부터 바다 건너 한반도에 직접 불교가 들어온 최초의 전법도량이 되었고 또한 사적 66호인 분산성과 함께 삼국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대 가락국 마지막 보루성으로써 역할과 군막사찰의 기능까지 겸 하였었기에 그 역사적 자취가 혁혁하게 살아있으며 또한 문화유적 사찰로서도 전통과 맥이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매우 중요한 도량이다."

 

대왕전에 들어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정에 분향하고 참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영정에 참배한다.

허왕후가 인도 망산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공양미에 파묻힌 몽돌이 보인다.

벽에는 파사석탑을 실은 허황옥 일행이 탄 배가 풍랑을 헤치며 항해하는 벽화와, 

별포 나루터에 배를 메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자기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산신령에 바치고 있는 벽화도 보인다.

 

 

대왕전

 

김수로왕 영정

 

허왕후 영정

 

허황옥이 인도 망산도에서 가져 왔다는 몽돌

 

 

파사석탑을 실은 허왕후와 그 일행이 탄 배가 풍랑을 헤치며 항해하는 벽화

 

허황옥이 별포 나루터에 배를 메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자기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산신령에 바치고 있는 벽화

 

                     

영산전

 

영산전 뒤편의 타고봉 파사석탑이 보인다

 

영산전 뒤편 언덕 만장대 타 고봉(打鼓峰)에는,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

'파사석탑 적멸보궁의 연혁' 안내문을 보니 김해 연화사 7층진신사리탑비문과 같은 내용이다.

파사석탑 적멸보궁의 연혁' 전문을 옮겨 본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김해에 가락국을 세웠다고 했다. 역사 속에 800여 년을 왕성하게 실존했음에도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전설과 설화로 전해질뿐 분명치가 않다. 낙동강 하류에 자리한 김해는 가락 문화가 찬연하게 꽃 피운 옛 가락국의 수도이자 김해김 씨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지가 된다. 가락국 7년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도래하여 왕후가 되고 중궁전 동편에 호계사를 건립한 다음 인도에서 모시고 온 파사석탑을 안치하니 한국 최초의 절과 탑이 되었다. 그러나 파사석탑은 장구한 역사 흐름 속에서 임진왜란을 만나 사찰과 탑은 손실되고 일부만 남아있는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안타까이 여겨 허왕후 릉 앞에 이운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해은사 파사석탑 인연의 연혁을 정리해 보면 약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세가 되던 해 2월 15일 열반에 드시고 다비식을 봉행한 후 진신사리를 남겼는데 이때 남긴 불사리를 사부대중들은 천상과 인간세상 8곳에 골고루 나누어 탑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기록돼 있다. 그 후 300여 년이 지나 인도 마우리 왕조 아쇼카왕이 인도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너무 흠앙하여 석존의 진신사리를 다시 재분배하여 일천사원과 일천사리탑을 세우고 받들어 모셨다. 그때 중국 송나라에도 아쇼카왕 당시 그 영향으로 불사리탑이 조성되어 석존의 불사리를 봉안하고 있었는데 마침 절에 대시회가 있어 탑안에 고이 모셨던 사리를 꺼내어 목욕을 시키고 친견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 때 한 비구승이 애써 기도를 봉행하고 그중 수십과를 얻어 많은 사찰에 사리탑을 조성케 하여 뭇 중생들이 복전 짓기를 발원하다가 인연이 성사되지 못하고 송나라 방자명거사에게 불사리가 인도되었다.방자명거사는 다시 친구 소철거사에게 소철거사는 불심 깊은 친형 소동파로 알려진 소식거사에게 전수하였다. 소동파거사는 불사리를 살아생전 부처님 대하듯 모시고 살다가 제남땅 진상원의 법태 대선사께서 13층 전탑을 쌓아놓고 불사리 인연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소중이 간직하던 불사리 일부를 봉 허하고 남은 39와는 임종 시에 따르던 법제자들에게 인연이 있을 것이니 전전상전하라고 부촉하였다. 그 후 금, 원, 명대을 지나서 청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보존하여 당대의 금석문학대가이신 옹방강선생에게까지 전수하였다. 이때 조선의 사신으로 온 젊은 추사 김정희를 보더니 반겨 맞으며 '당신은 전생에 서역에서 나와 같이 수행하던 둘 없는 도반이구려'하고는, '이것은 천년이 넘게 전수되어 오는 진귀한 석존의 진신사리인데 전생의 도반인 당신에게 전수하여 조선의 불교가 다시금 꽃 피웠으면 좋겠소' 하여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경전과 진신사리를 전해주니 소중히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추사는 곧바로 해남 대흥사 연파 혜장선사에게 증정하니 추사 나이 25세 때며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일이다. 그 후 다시 다성으로 알려진 초의선사에게 전수되고. 다시 그의 법 손들에게 전해지면서도 불사의 인연이 닿지 못해 인연의 도래만을 기다리던 중 김해 신도회장 배석현 거사가 한일주식의 후원으로 김해 연화사에 칠 층 사리탑과 해은사에 옛 파사석탑을 재현하고 신신 불사리를 구하던 중이었다. 그때 범어사 백운 대강백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해남 백화사에 주석하는 초의선사 법손인 응송 노화상을 함께 찾아뵈니 쾌히 승낙하심으로써 3과는 연화사의 칠 층 석탑에 모시고 3과는 분성 만장대 해은사 타 고봉에 모시게 된 것이다. 진신사리를 친견하고 보탑을 한 바퀴만 돌아도 현생 업장이 녹아들고 세 번 친견하고 세 바퀴를 돌면 어떤 소원도 다 이뤄진다 했다. 이 큰 복전의 귀한 인연에 너나없이 수희동참하여 모두 성불 수기받으시길 바란다.   불기 2550년 부처님 오신 날에""

원형에 가깝게 재현한 파사석탑

 

 

 

 

 

분산을 내려와  한창 공사 중인 '가야민속촌' 옆을 지나 구불구불한 도로를 걸어 내려가니 큰 도로와 만난다.

가야저수지 둑길을 걷다 오른쪽 좁은 마을길로 들어서서 걷는다.

마을을 벗어나니 은하사 오르는 차도가 나온다.

등산길이 차도와 나란히 나 있다.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르내리고 있다.

神魚가 노니는 洞天 은하사를 향하여 허위허위 산길을 오른다.

아침부터 날씨가 잔뜩 찌푸리더니 기어이 비가 뿌리고야 말 것 같다.

동림사를 둘러보고 은하사로 향한다.

새로 중창한 동림사는 옛 절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동림사 지상보살상과 지장전

 

神魚山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울울한 숲 속에 자리 잡은 은하사가 예사롭지가 않다.

연못에는 관음보살상과 기이하게 생긴 돌이 놓여 있다.

오른쪽 돌축대 위로 보이는 대숲이 靑靑하다.

神魚들이 유영하는 洞天임을 상징하는 것인지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에는 두 마리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장대석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범종루와 보제루가 나온다.

돌다리 위에는 두 마리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연못속의 관음보살상과 돌덩이

 

은하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따르면 수로왕 1년(42)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대웅전 취운루 중수기(大雄殿翠雲樓

重修記)' 현판(1812)에 의하면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인도로부터 건너온 뒤에 수로왕의 명으로 명월사 등과 함께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 당시 현재의 산 이름인 신어산(神魚山)은 금강산(金剛山) 또는 은하산(銀河山)이라 불렸고, 절 이름은 금강사(金剛寺) 또는 서림사(西林寺)로 불렸다고 한다.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모두 이곳에서 출가하도록 하였는데, 일곱 왕자는 수도 정진 끝에 마침내 깨우침을 얻어 칠 불(七佛)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 이후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연혁은 거의 전하는 것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전하기로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많은 스님들이 모여 참선과 송경(頌經)으로 수행정진 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임진왜란 때 절 건물이 전소하여 1629년(인조 7년)에 절을 중창한 이후, 1649년(인조 7년)에 대웅전을 중수 1649년(효종 1년)  1801년(순조 1년)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대웅전의 주요 구조부가 부식되어 2003-4년 전면 해체 보수작업을 하였으며 대웅전 내외부에 그려져 있는 총 32점의 벽화는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의 벽화는 원형을 모사한 것이다. 대웅전의 수미단에는 신어(神魚)가 조각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근래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수미단의 雙魚紋 즉 神魚는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상징이라 알려져 있다. 수로왕릉 납릉정문에는 마주 보는 두 마리의 물고기(神魚) 쌍어문이 있고, 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과 은하사가 자리한 산이름 역시 神魚山이라는이라는

점 등에서, 가락국을 통한 남방불교전래설의 여러 흔적을 볼 수 있다. 순조 12년(1812)撰한 「은하사취운루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에는, "세상에 전해오는 가락국 왕비 허후는 천축국에서 올 적에 장유화상(長遊和尙) 오라비도 따라왔다. 천축국(天竺國)은 본래 불교를 신앙하는 월씨국이다. 수로왕명에 의해 은하사(銀河寺)와 명월사(明月寺)가 창건되었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은 부귀와 영화를 뜬 구름과 같이 보고, 김해군 대청리 불모산에 들어가서 속세를 떠나 노닐며 돌아갈 줄 몰랐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수로왕의 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중 큰아들 거 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 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방장산에 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하여 부처가 되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방장산(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장유화상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그 후 다시 지리산을 찾은 왕후를 장유화상은 반가이 맞으며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만나보라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께서,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影池)을 바라보니 황금빛 가사를 걸친 금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의 일곱 생불(生佛)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며 수행하던 곳에 칠불사(七佛寺)를 세웠다."            

 

이곳 은하사 삼성각에는 장유화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어 그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신어산은 가락인들의 진산으로 여겨져 왔다.

은하사는 가락 고찰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삼성각과 대웅전

 

보제루 설법전

 

경내는 사람과 차량으로 가득하다.  가만히 생각하니 오늘이 음력 초하루 기도일이다.

설법전에서 법회를 끝낸 불자들이 줄지어 나온다.

비가 후드득 뿌리다 그친다.

삼성각 처마 밑에 계신 스님에게 神魚를 어디서 볼 수 있느냐 물어보니, 스님은 범종루를 손으로 가리킨다.

범종루 앞에는 대웅전 수미단에 있던 신어를 모방하여 만든 木刻 神魚 두 쌍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한 마리는 살아졌다고 한다.

더욱 자세한 것을 알려면 주지스님을 만나 보라고 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과연 범종루 앞  붉은 나무 기둥 위에  신어 세 마리가 머리를 들고 있다.

인도 아유타국 쌍어문 神魚가 은하사 대웅전 수미단으로 전래되어  다시 범종루  木刻 神魚로 다시 태어났다.

은하사 종성이 삼천대천세계로 울려 퍼지면,  神魚洞天에서 유영하는 신어도 삼천대천세계로 유영한다.

이제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린다.

부귀와 영화를 뜬 구름과 같이 보았다는 장유화상

이곳 김해지방에는 장유화상과 관계된 수많은 전설과 유적지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가 바로 은하사이며, 불모산 장유계곡의 장유암에 가면 그의 사리를 모셔놓은 사리탑도 있다.

 

 

 

범종루 앞의 神魚

 

범종루의 목어 몸통에는 삼두귀(三頭龜)가 나투었다.

 

나그네는 갈길이 멀어 우의를 걸쳐 입고 신어산을 오른다.

영구암 오르는 길 목 돌비석에는,

"법을 즐기면 언제나 편안하다.

그 마음은 기쁘고 그 뜻은 깨끗하다

이런 어진 사람은 성인의 법을 들어

그것을 항상 즐거이 행한다. 법구경에서"라고 새겨져 있다.

등로 옆으로 무너져 내려온 깨어진 바위들이 골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점점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암벽이 하늘 높이 솟구쳐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신어산의' 천연나한상'으로도 불리는  병풍바위의 기암들은 수많은 나한들이 열 지어 서 있는 듯하다.

   

병풍바위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슬아슬한 기암 위에 있는 영구암

신어산 영구암은 "사람 아닌 사람들이 마음을 발라내는 기도도량"이다.

깎아지른 병풍바위 옆으로 난 돌층계를 밟고 올라서니 영구암은 운무 속에 파묻혀 있다.

맑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가 보인다는데 오늘은 운무에 가려 겹겹의 산만 희미하게 보인다.

돌집 대웅전 처마 밑의 풍경이 '쟁그랑 쟁그랑' 소리를 낸다.

풍경의 물고기가 유영하는 듯하다.

기도 왔다 돌아가는 신도들을 배웅하는 스님의 눈이 맑기만 하다.

멀리서 바라본 신어산 정상 능선이 거북처럼 보인다.

거북의 머리 부분에 이 절이 위치하여 영구암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앞으로 거북 머리처럼 돌출한 평평한 바위 위에 삼층석탑이 있다.

일그러지고 깨어진 삼층석탑은 푸른 이끼를 매달고 침묵하며 오롯이 서 있다.

영구암의 오랜 역사를 웅변해 주는 듯하다.

 

석탑

손 상 근

 

열리지 않는
문이 있습니다
두드려도
귀 멀어 듣지 못하는
가슴이 있습니다

                        

해 묵은 책 속
한 구절 시귀(詩句)처럼
꺼내기 어려운
향기가 있습니다

 

안개처럼 허리 휘감는
나의 말들은
표면에 부딪혀
스러집니다

 

맴도는 내 가슴
환히 보면서
모른 채 서 있는
당신입니다

 

영구암 안내문을 옮겨 본다.

" 神魚山 靈龜庵

사람 아닌 사람들이 마음을(신령한 거북이 숨 쉬는) 발라내는 기도도량이다." 영구암은 김해의 영산인 신어산 서림주산(書林主山)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가락국 수로왕 허왕후(본명 허황옥)의 오빠이자 인도 아유타국 태자인 승려 장유화상(본명 허보옥스님)에 의하여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서기 42)에 인근의 서림사, 동림사 등과 더불어 창건되었으며 가락국 김수로왕의 원찰이기도 하다. 신어산 정상에 둘러쳐진 병풍바위는 다대몰운대 낙동강 하구에서 바라볼 때, 흡사 거북이 지혜(智慧光)의 바다로 뭇 중생을 태우고 나아가는 듯한 신비로운 자태와 같다 하여, 과거에는 구암사(龜岩寺)라고 불렀다. 주변 기암들이 특히 빼어나 영남 우측의 금강이라 하여, '右嶺 金剛山'이라는 명문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제비가 모이를 물어 날라 새끼를 양육하듯 모성본능이 깃든 듯하기도 하고, 낙동에서 일천 거북들이 올라와 암자 뒤 기암절벽 사이에서 솟아나는 맑고 깨끗한 샘물을 마시고 바다로 나아가는 지혜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멀리서 바라본 정상능선 형상이 거북의 몸체요, 그 머리 부분에 이 절이 위치하여 있다 하여 영구암(靈龜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구암은 가야불교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기도도량이자 사람 아닌 사람들이 마음을 발라낸다는 지혜의 도량이며, 법당 밑의 우물에서 신어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가야불교의 상징적 도량이다."

 

경내에는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삼층석탑이 자라 잡고 있다.

이 탑은 옥개석 3개 층과 옥신석 1개, 지대석 2개, 노반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모 형태 각도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 예술문화와 사찰건립 배경등에서도 영구암 3층석탑은 학술적 보존가치가 놓다.

석탑이 자리한 곳에서 청명한 날이면 일출과 함께 멀리 일본 대마도가 손자락에 잡힐 듯하고, 가락의 龜庵(靈龜庵)이 으뜸이라는 日沒時에는 

무한한 부처님의 은덕이 가슴에 묻어오는 듯하다.

신라  鴻德王朝에 축대를 축성하여 후대에 造彿 造塔하고 사세를 지켜오다, 근년 淨化彿事 末葉에 대경선사 재직 시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어 

법당 위 奇岩을 다음어 재축하였으며, 불기 2547년 8월 12일 국가 보조금 일부로 주지 도관 총무 승찬 사부대중이

천불을 모셔  이차인연의 공덕으로 성불하기를 서원하며 오늘의 돌집(石宅)으로 재 중수하였다."

 

 

돌집 대웅전

 

풍경

 

 

 

삼층석탑

 

영구암 위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병풍바위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신어산 정상 너른 공지에는 돌무덤과 산불감시초소 신어산 정상표지석이 있다.

 

 

 

신어산 정상 표석

 

神魚山(631.1m)

비는 그치고 홀연 운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넋을 놓고 망연히 서서 운무의 향연에 도취한다.

神魚가 遊泳하듯 雲霧가 겹겹의 산능선을 遊泳하며 피어오른다

神魚山은 神魚가 遊泳하는 洞天임에 틀림없다.

 

 

 

 

 

 

 

 

천진암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출렁다리를 지나  한 굽이돌아 나가니 아직도 운무의 향연은 계속되고 있다.

출렁다리

 

 

 

 

산사山寺 순례

박 소룡

 

바람 넘어 또 넘어가는 길
꽃비 흩날리는 고적한 산사


듬성듬성 산마을을 지나
처녀길로 가노라면
하염없는 적막 흐르네


휘몰아 떨어지는
맑은 물소리


호젓한 오솔길,
깊은 벼랑길


기암절벽  절묘함에
나그네는 넋을 잃네

 

산길을 걸어 내려간다 비를 맞으며.

멈출 수 없는 나그네의 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