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시(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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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봄비 변 영 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2010.03.01 -
뿌리의 길
뿌리의 길 정 호 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2010.03.01 -
봄 편지
봄 편지 이 해 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힌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 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2010.02.26 -
꽃을 보려면
꽃을 보려면 정 호 승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속에 숨어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2010.02.24 -
준비
준비 박 순 길 배는 뜨기 위해 제 속을 다 파낸다. 너는 뜨기 위해 속을 다 파내 본 적이 있는가. 변명은 하지마라 운이 있다고 하나 그 건 준비된 자의 덤일 뿐이다.
2010.02.23 -
홍시
홍시 윤 효 감나무 가지 끝에 홍시 하나가 까치밥으로 남아 있었다 서릿바람 불고 눈발 날려도 가지 끝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던 貧者一燈
2010.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