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랑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소태마을에서 운문사와 대비사까지)

2009. 11. 13. 19:08도보여행기/천년고도 경주에서 불뫼 창녕까지

(3) 화랑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소태마을에서 운문사와 대비사까지)

 

"산내면은 가도 가도 산이요, 보아도 보아도 하늘뿐인, 말 그대로 “산속의 고을”이다. 고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시청에서 약 26km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임야 면적이 전체의 84%를 차지하는 해발180-550m 고지대 산간 오지로써 밤낮의 일교차(5~7℃)가 심한 지역이다. 지리적으로는 남쪽으로 울산시 상북면과 연접하고, 동남쪽엔 내남면, 서쪽으론 청도군 운문면, 북쪽으로는 영천시 북안면과 이웃하고 낙동강 상류인 동창천이 면 중심을 관통 하고 대구 시민의 식수원인 운문댐 상류에 위치한 산천어, 꺽지, 피라미, 빙어등 민물고기가 많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장이다."

 

또한 산내면에는 장육산과 단석산이 있다. 소호천과 범곡천에서 내려온 물을 대현댐으로 막아 대현저수지를 만든다. 이 물은 동창천이 되어 산내면 중심을 관통하여 운문댐으로 흘러간다. 산내면사무소 옆의 내일2리 소태마을 앞으로는 말굽형으로 동창천이 흘러내려간다.소태마을은 임진왜란 때 월성이 씨가 피난 와서 개척하였다 하며 솥을 만드는 곳이 있어 솔터라고 하던 것을 지명 표기 시 소태(少台)로 변하였다고 한다.

 

 

소태 마을

 

소태 교을 건너 921번 호젓한 산 도로를 걸어 지리고개를 넘는다.

대현저수지가 옆에서 계속 따라온다.

 

대현 저수지

 

삼원게르마늄 산내광산 풍원광업을 지나고, 아름다운 산마을을 지나고, 국민청소년 수련마을을 지난다.

산자수명한 깊은 산속이라서 곳곳에 수련장이 있다.

 

 

 

대현보건진료소 앞에서 921번 도로를 버리고,  왼쪽길로 들어서서 시다교를 건넌다.  고헌산에서 발원한 소호천이 여기에서 범곡천과 합류한다.

시다마을은 1570년 월성이씨가 개척하였으며 대한(大旱)에도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고 절후에 맞게 농사가 잘되어 힘 들이지 않고 농사를 잘 지을수 있다하며 고려유신들이 피난와서 후사와 평화가 오기를 기다렸다하여 시다(時多)라고 칭하였다 한다.

 

 시다교를 건너 대현유스호스텔 부터 소호천을 따라 소호리까지의 길은 시멘트 포장 도로로, 산길이 호젓하고 풍광이 멋들어진 아름다운 길이다.

군데군데 수련처가 있고, 맑은 계곡이 끝없이 이어진다. 옆으로는 사룡산 단석산을 지난 낙동정맥 능선이 달린다. 계속해서 이 능선은 백운산 고헌산 외항재 운문령 가지산 운문산으로 이어진다.

 

 

 

 

대현유스호스텔을 지나서 조금 가면, 소호천을 따라가며 난  계곡 산길의 아름다운 속살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산길을 호젓이 사박사박 걷는다.

찬물등 마을 앞을 지난다.

 

 

 

 

 

 

가을 속을 걷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냥 걷고 또 보고, 그냥 또 걷는다.

 

 

 

다리를 건너니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태종마을이다.

 

 

 

이제부터는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소호천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소호천을 따라 걷는다.

소호천은 변함없건만.

 

 

 좁은 산길을 걸어간다.

소호천은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전원주택 마을도 보인다. 궁근정초교 소호분교장 앞 삼거리다. 여기서부터는 신작로를 내었다. 넓은 삼거리에서 새로 축조한 다리를 건넌다.

할머니들이 감과 약초 나물등을 팔고 있다. 마침 점심도 먹지 못하여 출출하여 단감을 산다.

2,000원어치만 달라고 하니 비닐봉지에 20개 정도 가득 담아 주신다.

걸어 갈려면 배가 출출할 터이니 많이 들라면서 감을 먹으면서 허기를 달랜다.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두서면으로 가는데 고헌산과 백운산 사이를 넘는 소호령 임도가 나온다.

와리 입구를 지나쳐 곧바로 걸어가니 소호가든이 나온다. 오늘 묵어갈 곳으로 점찍어 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 음식과 숙박을 청하니, 매우 미안한 듯 숙박이 되긴 되는데 혼자라면 가격이 맞지 않을 거라며 외항재를 넘어가면 삼거리에 모텔도 많고 저렴하다고 일러준다.

메뉴를 보니 매운탕 오리탕 백숙등이다.

"그럼 식사도 어렵겠네요?" 하고 돌아 서려니까, " 매운탕 단체주문을 받았는데 많이 끓여서 매운탕 식사는 그냥 드릴 테니 드시고 가세요. 들어 오세요."한다. 매운탕 식사를 잘하고 일어나 인사하고 집을 나선다.

 

지나가는 버스가 있으면 손을 들면 정거한다고 하며, 차편이 있으면 태워드려야 하는데 하며 안절부절이다.

친절과 배려 그리고 베푼 호의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부자 되세요"

 

 

어둑어둑해지는 길을 내쳐 걸어 완만한 오름길 외항재를 크게 힘들이지 않고 넘는다.

외항 재을 넘으면 다시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다.

대현삼거리의 모텔에서 짐을 푼다.

 

2009. 11. 2.  월요일  맑음

 

때 이른 한파주의보가 전국에 내려진 날이다. 강원도 설악지역에는 대설경보도 내려진 상태다. 바람막이 겉옷을 입고 버프(BUFF)를 목에 착용하고 장갑도 겨울장갑을 끼고 06 :40분 숙소를 나선다.

동터오는 산길을 걷는다.

깊은 산속 산길에는 강하고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무심한 낙엽은 새벽 찬바람에 어지럽게 이리저리 휘날린다. 버프를 끌어올려 안면과 귀를 가리니 찬바람을 잘 방어해 준다. 잡념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가만히 그 잡념을 바라보며 걷는다.

 

 

 

내리막길을 걷는다. 능동천을 따라 걷는다.

법왕사 앞길로 해서 석남사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직진한다.

삽재마 으를 지난다.

 

 

궁근정리라는 이름이 갖는 묘한 매력에 조금 돌더라도 궁근정리로 갔다가 석남사로 가기로 결정한다. 

궁근정 사거리에 도착한다.

"궁근정리(弓根亭里)는 예종 때는 임이리(숲이리·林伊里), 정조 때는 수 피리(禾皮里)라 하여 하북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일제 때인 1911년 우만(于萬) 화촌(禾村) 궁근(弓根)의 세 마을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궁근정리라 하였다. 궁근정리에는 장성(長城)과 궁근정 두 행정마을이 있다. 궁근정(弓根亭)은 옛날 이곳에 화살나무과에 딸린 회나무가 정자(亭子)를 이루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또는 활과 살을 만들고 군졸들이 이곳에서 훈련하였으므로 궁근정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궁근정을 "굵은 정"(太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곧 이 지역에 굵은 정자나무가 많았으므로 "굵은 정"이라 한 것이 지금의 궁근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신라시대 군정(軍停)이 있었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 운문재 석남재와 함께 이 지역이 경주 도성을 방어하는 요충지이므로 군사조직인 "정(停)"을 두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궁근정 주변의 지명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궁근정 앞산의 장성(長城), 활쏘기를 했던 궁평(弓坪), 말을 길렀던 마두배기, 진을 쳤던 흥진(興陣), 연병장이던 사시야(射矢野), 상징적인 과녁(貫革: 활 쏘는 목표물)이던 시암(矢岩), 과녁을 세워 두었던 삽재(揷峴), 장사(壯士)들이 살았다는 우마니, 화살을 만들던 살구정(살구이정), 화살 재료를 만들던 살티(矢峴)등 군대와 관련한 지명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역시 범상한 곳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사거리 식당에서 아침식사로 된장찌개 백반을 주문하며 먹으면서 휴식도 취한다.

지도를 꺼내놓고 앞으로의 여정을 정리하며 숙지해 둔다.

 

지산 석남사 일주문을 들어선다.

산문을 들어서니 붉게 물든 단풍, 오색의 나뭇잎이 깊어지는 가을을 느끼게 한다.

 

 

 

 

청운교 섭진교 돌다리를 건너 담장을 돌아드니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이다.

"가지산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824년)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조계종 비구니 선원으로서 참선수행 도량으로 이름난 절이다. 절이 위치한 가지산을 일명 석 안산이라고도 불렀다. 예로부터 산수가 깊고 그윽하여 빼어난 준령으로 천연절경을 이룬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며 절이 석안산의 남쪽에 있다 하여 석남사라 하였다." 

 

 

대웅전

 

삼층 석가 사리탑 : 삼층 석가 사리탑. 이 탑은 원래 도의국사가 세운 15층탑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3년 삼층탑으로 복원하고 스리랑카의 사타티샤 스님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다 봉안했다.

 

수조

 

삼층석탑

 

엄나무 구유

 

 

   

부도(보물 제369호)  도의국사의 사리탑

 

 

부도(보물 제369호)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다. 하대석에는 사자와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에 있는 창 모양의 안상 속에는 꽃무늬 띠를 새겼다. 8판 연꽃대좌 위에 놓은 탑 둘레에는 신장이 새겨져 있다.

 

석남사 침계루(枕溪樓)

 

석남사 침계루(枕溪樓) 

"계곡을 베개삼은 다락"이라는 멋진 이름의 침계루 툇마루에 앉아 삼층석탑과 대웅전을 바라본다.

대웅전 뒷산 기슭에는 대나무가 바람에 일렁이고 하늘은 새파랗다.

 

대웅전 柱聯의 글이다.

摩訶大法王 마하대 법왕이여!
無短亦無長 짧은 것도 없고 또한 긴 것도 없도다.
本來非조白 본래 검거나 흰 것이 아니로되
隨處現靑黃 곳을 따라 푸르고 노란 것을 나타내도다.

 

침계루 주련의 글이다.

獅子屈中無異獸 사자굴 속에는 다른 짐승이 없고
象王行處絶孤縱 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의 발자취는 끊어졌도다.
雖知王舍一輪月 누가 알랴. 왕사성 둥근 달이
萬古光明不滅長 만고 광명을 길이 소멸하지 않는 것을

 

呵呵他日具眼者 우습도다. 다른 날 눈을 갖춘 자가
見之當發大笑矣 보고는 마땅히 큰 웃음을 발하리라.
莫謂慈容難得見 자용(부처님)을 뵙기 어렵다 하지말라.
不離祇園大道場 기원정사 큰 도량을 떠나지 않았도다.

 

因億毘耶當日事 인하여 비야리성의 당일 일을 생각하니
一聲雷震三千界 한 소리 우뢰가 삼천세계를 진동하구나.
知火知牛事希奇 불을 알고 소를 아는 일이 희유하고 기특하나
知音相見正如是 지음이 서로 만남에는 바로 이렇게 하느니라.

虛空境界豈思量 허공 경계를 어찌 생각으로 헤아리겠는가?
大道淸幽理更長 대도는 맑고 그윽하여 이치 다시 길도다.
但得五湖風月在 다만 다섯 호수에 풍월이 있으면
春來依舊百花香 봄이 오면 옛날처럼 백화가 향기 풍기리.

 

 

석남계곡

 

석남사에서 나와 아름다운 석남계곡을 지난다.

덕현삼거리에서 왼쪽으로 69번 도로를 걸어간다.

가지산 능선이 아름답다.

 

가지산 능선

 

가지산 유황온천을 지나고 , 구불구불 가파른 운문령 길을 오른다.

 

 

 

운문령 정상이 가까워지니 차량들이 한쪽 줄로 죽 주차해 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가지산 등산하는 사람이 주차해 놓은 것이었다.

이곳에서 가지산과 문복산 등산로 들머리가 마주 보고 양편으로 있다.

이곳에서 출발하면 등산 시간이 많이 단축될 듯싶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 간이휴게소에서 잔치국수를 주문해서 시장기를 달랜다.

운문령에는 휴게소가 세 군데 있는데 가지산 등산을 위해서는 자기 휴게소 앞에 주차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자랑한다.

 

 

 그 앞 표지석을 넘으면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다. 

차고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운문령을 내려 걸어간다.

운문산 자연휴양림 입구를 지나고, 삼계계곡을 지나니, 삼계리다.

삼계리에는 "삼국통일의 초석, 화랑정신의 발상지 청도"라는 조형물이 서 있다.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는 화랑정신의 발상지이다. 신라 진평왕 22년(서기 600년)에 원광법사가 중국 수나라에서 수학하다 돌아와 이곳 운문산 가슬갑사에서 수도할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를 찾아와 화랑으로써 갖추어야 할 수신계를 청하였다. 이에 원광법사께서 " 불법에는 보살계가 있으나 그대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 된 몸으로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며 세속에 알맞은 계율을 전수한 것이 바로 화랑의 정신적 지주였던 세속오계이다 (삼국사기, 열전)

 

신라의 대표적 화랑인 관창, 김유신장군을 비롯한 많은 화랑들은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이곳 운문산, 장육산, 가지산, 문복산, 발백산, 혈례산, 단석산 등에서 심신을 연마하였고, 나아가 화랑의 세속오계 정신은 삼국통일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세속오계는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다. 

 

문복산에서 흘러내리는 계살피계곡에는 신라 화랑들의 정신적 도장이었던 오갑사 중 하나인 가슬갑사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계살피 계곡이라는 이름은 "가슬갑사 옆의 계곡"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삼계리는 문복산 오르는 등로가 있고, 또 반대편으론 쌍두봉 배넘이재 학소대로 오르는 등로가 있다.

이 일대는 산자수명하다는 말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쌍두봉 학소대 가는 길이다.

삼계리 계살피 계곡 입구를 지나 걸어가니, 수리덤계곡입구가 나온다.

운문산 가지산 상운산 문복산으로 둘러싸인 이곳 삼계리는 어느 곳이든 빼어난 곳이다.

오갑사를 창건하여 화랑의 수련장이 되었던 곳이다.

 

방지초교 문명분교장 앞 삼거리에서 좌측길을 택한다.

운문천을 끼고 걸어간다.  운문사 가는 길이다.

 

 

감나무에는 붉은 감잎이 석양빛에 반짝이고 있다.

왼쪽 옆으로 험준한 암봉이 우뚝 솟아 있다.

마을사람에 산 이름을 물으니 "지룡산"(658.8m)이라 한다.

음식촌 거리를 지나니 운문사 소나무 숲길이다.

옆으로 운문천이 흐르는 노송이 빽빽이 흙길을 걷는다. 

단풍잎이 석양빛에 눈 부시고, 운문천의 갈대는 바람에 은빛으로 출렁인다.

 

 

천년의 숨결이 흐르는 "호거산 운문사" 다. 

 

천년의 숨결이 흐르는 "호거산 운문사"

 

운문사 대문 역할을 하는 범종루를 지나니, 처진 소나무(반송) 뒤로  만세루가 보이고 커다란 법고가 보인다.

우측 안으로 대웅전이 장엄하게 서 있다. 

 

 

 

 

 

 

대웅전 벽화에는 원광법사가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수신계율을 전하는 모습인 "세속오계도"가  있다.  

 

 

구대웅전 창살무늬                                                                  신 대웅전 창살무늬

 

 

 

 

운문사에는 석등을 위시하여 6점의 보물이 있고,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가 있다.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삼층석탑(보물 제678호)과 석등(보물 제193호)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

 

 

불이문이다.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도량이오니 외인의 출입을 금합니다"

 

그 앞에 육바라밀 그림이 걸려 있다.

 

구름도 잠시 쉬어가고, 천년의 숨결이 흐르는 곳

호거산 운문사(虎踞山 雲門寺)!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 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뿐이다. 그 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함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제2차 중수는 신라말 보양국사가 하였고,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라 사액하면서 운문사라 불리어오고 있다. 제3차 중수는 고려 숙종 때 원응국사가 하였고, 고려 고종 때(서기 1750) 일연선사가 주지로 주석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고, 1958년에 비구니 전문학원을 개설한 이래 1958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약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 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두루두루 경내를 둘러본다.

불이문 앞에서 학인스님에게 묻는다.

"호거산 운문사라 하는데 호거산은 어느 산을 가리키는 것인지요?"

손으로 대웅전 뒤 암봉을 가리키며,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 호거산이라고..." 

지룡산을 호거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석양이 지는 경내다.

긴 그림자가 진다.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저녁예불에 참석하고 싶어 서성 거렸는데, 아직도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시장기도 느껴지고, 옷도 부실하게 입어 몸이 오슬오슬 떨린다.

 

내일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로 하고 마을로 향한다.

학인 스님들이 밭에서 배추를 손질하고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청규를 실천하고 있다.

치열한 구도의 삶

꺼질 줄 모르는 열정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내려오는 길 내내 칼바람이 불어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음식촌 마을 가는 길은 석양이 잔빛을 남기며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하얀 집"에서 식사하고 숙박을 청하니, 이층으로 안내해 준다.

"내일 새벽 예불에 참석할 수 있지요?"하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새벽 백일기도를 다니는 중이라고 한다.

새벽 3시경에 차로 가니 그때 일어나서 같이 가자고 한다.

 

2009. 11. 3  화요일  맑음 

 

새벽 3시에 집 주변에서 기다리니,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신다.

차에 동승하고 운문사로 향한다.

아침예불이 끝나고 자기는 할 일이 있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으니 기다려 차를 타고 가도 되고,  아니면 걸어 내려가야 된다고 한다.

걸어서 집으로 갈 것이라고 답해 준다.

범종루에서 "조금 있으면 법고와 범종을 치니까 구경하고,  대웅전에 들어가 문옆 공간에 앉아 예불에 참여하면 된다"라고 나직이 일러 주고는 백일기도처로 향한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두툼한 옷을 준비해 오지 않아 밖에서 법고와 범종소리를 듣기가 어려워, 소종을 치며 종송을 하고 있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간다.

대웅전 바닥 가득히 오와 열을 맞춘 방석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놓여있다.

공간에 방석을 놓고 삼배하고 가부좌하고 앉는다.

 

법고 소리가 울린다.

낮았다 높았다 빨랐다 느렸다 리드미칼 한 법고 소리가 울린다.

축생의 중생들 가죽 소리 듣고 진리를 얻으라고 두드린다.

목어, 운 판, 이어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28번 범종소리를 듣는다.

이 종소리 듣는 모든 중생이 번뇌를 여의며, 지혜가 생겨나라고 종을 울린다.

범종이 끝날 무렵 눈을 뜨니 대웅전 법당 안 가득히 학인 스님들이 질서 정연히 앉아 있다.

 

더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자세다.

파르스름한 머리, 장삼 가사 법의를 걸친 엄숙한 자세다.

구도의 삶을 사는 거룩한 모습이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여 명 학인스님들의 장엄한 예불소리가 울려 퍼진다.  

절을 할 때는 소리가 낮아졌다가, 일어서면 다시 장엄하게 소리가 높아진다.

절하고 일어서는 동작이 일사불란하고 깃털처럼 가볍다.

정진과 고행이 없이는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치열한 구도의 삶의 표징처럼

거룩하고 숭고한 모습이다.

 

반야심경을 외우고,

백팔예불 대참회를 한다.

대자대비민중생 대희대사제함식 상호광명이 장엄 중등지심귀명례(일 배)

 ........                          

108배를 하며 참회하는 예불을 올리고 끝난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예불을 마치고는 방석을 걷어 쌓아 두고, 개방된 3면의 문으로 질서 정연히 일순간에 안행으로 사라진다.

학인 스님들의 장엄한 예불소리가 귓전에 남아 있는 텅 빈 대웅전에 홀로 서서 여운을 느껴본다. 

운문사에는 보물 7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운문사 학인스님의 거룩한 예불 모습과 장엄한 예불 소리가  더 큰 감동을 주는 보물이다.

 

운문사를 찾은 이유도 예불에 참여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만 더 두툼하게 가져갔더라면 도량석과 법고 목어 운 판 범종을 울리는 전 과정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훗날 아내와 함께 다시 찾고 싶다.

 

숙소로 돌아와 훈훈한 방에서 잠시 눈을 부친 후, 출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니 06:55분이다.

오갑사중 현존하는 갑사인 대작갑사인 운문사는 보았고, 소작갑사로도 불리는 대비갑사(현 대비사)를 찾아 길을 떠난다.

새벽길은 공기가 차갑다.

떨어지고 남은 붉은 감나무잎이 나무 끝에 매달려 있다.

 

운문천변의 감나무가 있는 산골 마을의 정경이 운치가 있다.
굴뚝에서는 아침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운문사에서 대비사를 갈려면 산을 하나 넘으면 되지만, 운문댐 아름다운 길과  임당리 산골 마을길을 걸어 보고 싶어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방지초교 문명분교를 지난다. 논은 이미 추수를 끝내고 텅 비어 있다. 감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걷는다. 운문댐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마을 정신 발상지 방음동 새마을 동산 앞을 지난다.

 

 

 

 

운문댐옆 단풍 든 벚나무 가로수길을 걸어간다.

아름다운 길이다.

 

 

운문댐이 본모습을 드러낸다.

 

운문댐

 

운곡정사, 원모재를 지난다.  "운문댐하류보 유원지" 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 길로 가기 위해 좌측으로 걸어 들어간다.

모텔등이 많은 지역을 통과하고 하니 소로다.

소로와 산길 마을길이다.

 

소망마을을 지난다.

임호사랑방을 지난다

 

 

 

임당리 명포마을에 도착한다.

청도 임당리 김 씨고택에 둘러보러 들어가는 길 입구의 토담과 감나무가 있는 집이 너무나 정감이 간다.

 

 

김씨 고택

 

대비사 가는 길을 물으니, 이 마을길로 계속 올라가서 산고개를 넘으면 제일 빠르다고 한다. 

임당리 명포마을 계곡길과 박곡리 골안마을 계곡길을 연결한 고갯길이다

 

 

온통 감나무만 심은 마을이다.

붉은 감잎은 땅에 떨어지고 있다.

 

붉은 감잎은 땅에 떨어지고 있는 산마을 길

 

산기슭 갈림길이 나온다.

연등이 달린 길을 선택하여 오른다.

연등이 달린 언덕길을 계속 올라 넘어선다.

 

 

 

"소작갑사 유적지"팻말이 보인다.

 

 

 

"소작갑사" 또는 대비갑사(현 대비사)의 원래 위치다

 

이곳이 원래의 "소작갑사" 또는 대비갑사(현 대비사)의 원래 위치다.

유적지 앞으로 골안못이 있고 멀리 알프스 연봉이 흐르고 있다.

박곡리 골안마을을 걸어 내려온다.

감나무에서 감을 추수하고 있다.

감나무마을

청도는 감나무 고장이다.

 

  

 

 

 

 

 

 

빨갛게 익은 홍시가 매달려 있다

 

 

박곡리 골안마을을 지나 대비사 가는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니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203호)이 나온다.

 

 

 

 

박곡리 석조 석가여래좌상은 몇 차례의 화재와 인위적인 파손을 당해 원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도 예술적 안목과 세련된 솜씨를 느낄 수 있다. 풍만하면서도 박력 있는 모습 힘찬 어깨와 당당한 가슴 몸에 밀착된 법의 등에서 강건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조각 수법을 볼 수 있다. 석굴암 불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불상 중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대비지" 제방을 오르는 경사진 길을 오른다.

대비지 둘레를 돌아 저편 끝 지점에 대비사가 있다.

대비지 긴 길을 돌아 들어간다.

 

 

 

 

 

 

이곳 대비사(大悲寺)는 오갑사 중의 하나로 소작갑사 또는 대비갑사라고 하며 진평왕 22년(600년) 원광법사가 중창하였다. 이 사찰을 대비사라고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다. 일설에는 당시의 신라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 절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당초에는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고 11기의 고승대덕의 부도가 이곳에 있다.

 

   

 

대비사 대웅전 (보물 제834호)

 

 

 

 

대웅전 (보물 제834호)은 전체 구성이 짜임새 있고 공포도 견실하게 짜여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둥근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두고 그 위에 다포계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기둥사이에는 각각 2개의 공간포를 두었는데 그 간격의 정연함이 우수하다."

 

 

 

 

부도 가는 길이다.

대비사 들어오는 길 게시판에 걸려있는  글이다.

                        

게시판에 걸려있는  글

 

 

 

배낭을 내려놓고 경내를 둘러보고 있는데, 요사채 보수 공사 트럭이 짐을 싣고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 나가기가 싫어 금천면까지 동승을 청하니 쾌히 응락한다.

요사채를 보수하려 뜯어보니 건물자재가 워낙 낡아 재사용이 힘들다고 한다.

천면에 도착하자 잘하는 음식점을 가르쳐 준다.

감사드린다.

 

소머리국밥 집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다. 

천년의 숨결이 흐르는 길 화랑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은 이것으로 끝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