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 천년 도읍지 서라벌을 찾다

2009. 11. 9. 16:22도보여행기/천년고도 경주에서 불뫼 창녕까지

(1) 신라 천년 도읍지 서라벌을 찾다

 

언제 부터인지 여행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되어왔다. 여행이 인간의 삶에 주는 일차적 의미는 권태로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즐거움에 있을 것이다. 여행이 주는 이러한 즐거움은 감성의 해방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여행의 의미는 결코 여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동시에 무언가를 새롭게 느끼고 배우는 지적 충만으로 이어진다는 데 여행의 큰 미덕이 있는 것이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 

 

경주를 사랑하는 모임(경사모)에서 주최하는 2009. 10.31.- 11. 1일  "제9회 신라의 달밤 165리 걷기 대회" 참가 안내문을 받고, 많은 흥미를 느껴 참가신청을 하였다. 이번 기회에, 천년고도 서라벌(경주) 문화유적을 답사한 후, 달밤에 그것도 교교한 보름 달빛 속에 신라의 천년고도를 밟아 보는 것이 

더욱 운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이틀 일찍 경주에 가기로 결정한다.

또한, 신라의 화랑들이 명산대천을 찾아 수도하며 무예를 익혔던 옛길을 찾아 걸어 가 보기로 한다. 화랑의 수도처 단석산 기슭의 신선사, 무예를 익힌 단석산을 오를 것이다. 단석산은 장육산,청도군의 운문산과도 연결된다.  화랑들은 운문산 가슬갑사에 머무르고 있는 원광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산자수명한 산천을 찾아  화랑들이 수련하며 무예를 익히며 가슬갑사로 갔던 옛길을 따라 걸어가 보기로 한다.

내친김에,  감과 소로 유명한 청도를 거쳐, 불뫼(화왕산) 아래 진흥왕이 옛 가야에 척경비를 세웠었고, 그리고  제2의 서라벌문화를 꽃피웠던 창녕까지 가 보기로 한다. 아울러 1억4천만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창녕 '우포늪'에서 일박하며, 깊은 상념의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한다.

 

 (1)시내권 답사

      2009. 10.29.  목요일 흐린 후 맑음

 

 06:40분발 경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달리는 차창너머로 자욱하게 깔려 있는 안개가 보인다.

안갯속을 뚫고 둥근 해가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온산이 울긋불긋하다.

풍만했던 들판은 이제 서서히 텅 비어 가고 있다.

텅 빈 충만.

 

11:10분경 경주터미널에 도착한다.

 

경주국립공원은,

소금강지구(금강산지구), 남산지구, 서악지구(선도산지구), 화랑지구(송화산지구), 토함산지구, 구미산지구, 단석산지구, 대본지구(대왕암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시내권, 낭산, 명활산지구를 더하면 문화유산을 거의 다 섭렵할 수 있다.

답사 일정계획은  첫째 날은  시내,  둘째 날은 남산지구,  셋째 넷째 날은 낭산, 명활산지구, 소금강지구를 보고, '신라의 달밤 165리 걷기 대회에 참석한 후  다섯째 날  단석산지구 답사를 위해 떠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첫째 날 일정의 첫 출발지인 국립경주박물관에 가기 위해 시내버스에 오른다.

국립경주박물관을 관람하고 답사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입구에 들어서서 걸어가다 보니, 숭복사 쌍거북비석 받침이 보인다.

 

숭복사 쌍거북비석 받침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앞에 선다.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고 오직 하나 에밀레종이 있을 뿐이다. 종의 맨 꼭대기에 종을 달기 위한 용뉴(龍紐)가 있다. 매우 날카로운 용 조각이 있고, 그 옆에는 높이 96cm의 음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음관이 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종에서 볼 수 없는 우리나라 종의 특성이다. 이곳으로 잡음이 빠져나가고 소리가 길게 울린다."

 

종의 상대와 하대에 있는 무늬 띠, 두 쌍의 비천상, 종을 치는 부분의 연꽃무늬 당좌, 9개의 연꽃 봉오리 형태의 장식인 종 상단 부분에 있는 종유 등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비범하고 아름다운 종이다.

종 중앙 부분에 비천상과 명문이 있다.

명문에는 " 신종이 만들어지니 그 모습은 산처럼 우뚝하고 그 소리는 용의 읊조림 같아 위로는 지상의 끝까지 다하고, 밑으로는 땅속까지

스며들어 보는 자는 신기함을 느낄 것이요, 소리를 듣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라고 씌어 있다.

종 한가운데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 들고 있는 비천(飛天)의 모습은 극락왕생을 간절히 염원하는 듯하다.

매시간 그리고 매 30분마다 신종이 울린다. 설치된 스피커를 통하여 녹음된 신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비천상과 명문

 

 

종 하대의 꽃무늬 띠가 아름답다.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 들고 있는 비천(飛天)의 모습은 극락왕생을 간절히 염원하는 듯하다.

 

 

금강역사 십이지신 사자상, 사자. 공작무늬 돌을 보고 고고관을 둘러본다.

 

 

 

오른쪽 원안에는 사자가 커다란 잎이 달린 나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고, 왼쪽 원안에는 나무 한 그루에 공작 2마리가 

마치 먹이를 쪼는 듯이 새겨져 있다.

 

고고관을 거쳐 미술관 안압지관 옥외선시관을 차례로 간다.

미술관의 '반가사유상'이다. 

"머리와 두 팔은 깨어져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리고, 벗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걸친 치마 자락은 서로 겹치어 주름지고 끝자락에서 물결을 이룹니다. 발가락과 발톱까지 나타낸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습니다. 바위에서 연꽃이 막 피어올라 성스러운 부처님의 발을 받치고 있는 듯합니다. 잠시 이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사유에 잠겨 보시기 바랍니다."

 

보면 볼수록 정교하고 아름답다.

바위에서 솟아 오른 연꽃이 부처님 발을 떠 받치고 있다.

연꽃과 발가락 부분은 정말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반가사유상

 

많이 전시된 석물 유적을 지나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본다.

이 탑이 있던 고선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있던 절이고, 고선사터는 덕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이 탑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한다. 또한 이 탑과 너무나도 닮은 탑이 신문왕이 세운 감은사터 삼층석탑이라고 한다

고선사터 삼층석탑

 

박물관 관람을 끝낸 후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집에서 싸준 빵으로 요기를 한다.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안압지를 향하여 걸어간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가 되어버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雁鴨)들만 노닐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문무왕 19년에는 못 서편에 동궁(東宮)이 건립되었다는데, 임해전(臨海殿)은 아마도 정전 (正殿)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안압지는 동궁에 속해 있던 못인 것이다. 이곳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로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정비한 것이다.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 말까지 2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못의 둘레는 호암석(護岩石)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서암(西岩)과 남암 (南岩)은 직선으로, 북암(北岩)과 동암(東岩)은 곡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못 안에는 크고 작은 3개의 7 섬이 있었고, 물은 동쪽 북천의 지류(支流)에서 끌어온 것 같으며, 넓이와 높이가 약 40㎝정도의 화강암으로 된 수로를 통하여 들어온 물은 2개의 큰 석조를 거쳐서 못에는 폭포와 같이 낙하하도록 만들어졌다. 출수구(出水口)는 북암 중간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마개가 있어서 수위(水位)를 조절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목관(木管)을 통해서 빠져나간 물은 당시의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못 주변에서 회랑지(廻廊址)를 포함하여 26개소의 크기가 다른 건물 터가 확인되어 그중 서쪽 못가의 5개 건물 중 3개만 신라시대의 건물로 추정하여 복원했다. 초석(礎石)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모조하여 회랑지를 제외한 건물 터에만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안압지와 임해전 등 부속건물을 추정하여 50분의 1로 축소한 모형도를 만들어 원래의 임해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원지(苑池)는 동서길이 약 190평방미터의 평면 속에 15,658㎡의 못을 조성하였다. 못가의 호(湖) 안은 다음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 호안은 절묘한 굴곡의 곡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서쪽과 남쪽 호안은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을 이용하여 조성되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에 돌출시키기도 하였다. 못 속에는 삼신도(三神島)인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가 배치되었다. 남쪽 섬은 1,090㎡, 중앙섬은 66㎡, 북쪽섬은 495㎡. 못 호안 주변과 섬에는 괴석을 가득히 배치하였다. 못의 호안 높이는 동, 북, 남이 210㎝ 정도이고, 서쪽의 궁전 건물이 있는 호안은 540cm이다. 이는 못 가의 누각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도 동양인은 원림(苑林)을 한 곳에 앉아 바라보는 습성을 보여 준다. 연꽃잎이 부분적으로 서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못 바닥에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와 깔아서 물이 맑았던 것이며, 못 가운데쯤 '井'형 목조물(길이 134cm, 높이 101cm 정방형)을 못 바닥에 박아서 그곳에 연(蓮)을 심어 연뿌리가 번져 나가지 못하게 만든 시설 때문이다. 못 물의 깊이는 약 18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못을 바다로 상징하여 넓게 보이고자 한 것인데, 연꽃이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이기 때문에 못 바닥에 수초가 나지 못하게 강회나 자갈돌을 깔았던 것이다.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 가의 5개 건물 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1, 3, 5 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떠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하여 재현한 것이다." 

임해전 앞에서 연못을 바라본다.

 

임해전 앞의 연못

 

부분적으로 서식하는 연꽃은 못 가운데 "井" 형 목조물을 못 바닥에 박아서 그곳에 연을 심어 연뿌리가 번져 나가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제 보아도 항상 그 자리에 그만한 범위 안에서만 연꽃이 자라고 있다. 

 

선조들의 지혜가 대단하다.

임해전을 둘러본다.

연못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압지는 굴곡의 곡선으로  만들어 어느 곳에서 보아도 전경이 보이지 않는다.

안압지 둘레 흙길을 따라 걷는다

출수구다. 마개가 있어 수위를 조절하였다고 한다.

이쪽 방면에서 바라보는 안압지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굴곡진 흙길을 따라 걸어간다.

연못 가운데서 멀리 떨어진 깊숙이 굴곡이 진  저 끝부분이 배를 타고 내리던 곳이다.

비가 내려 물이 아무리 불어도 이곳은 항상 얕고 잔잔하여 배를 타고 내리는데 위험이 없다고 한다.

 

출수구

 

안압지 전경

 

연못 가운데서 멀리 떨어진 깊숙이 굴곡이 진  저 끝부분이 배를 타고 내리던 곳

 

대나무 오솔길을 걸어가니 물소리가 들린다.

수로 밑으로 작은 폭포가 보이고 그 물은 연못으로 떨어진다.

 

입수로

 

이 입수로위에는 수조가 있다.  북천 지류에서 끌어온 물을 모았다 흘려보내는 곳이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수조는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는 입수로에 놓여 있는데 40cm 높이의 차이를 두고 2개가 연결되어 있다.

반월형으로 안쪽은 깎아내어 물을 고이게 하였고, 가장자리에는 용으로 보이는 조각의 흔적이 있다.

잔잔히 흐르는 물을 2개의 연결된 수조에 물을 모아 폭포를 이루어 연못으로 흐르게 하였다.다.                                                                            

 

화강석으로 만든 수조

 

 

석빙고 답사를 위해 걸어간다.

'선덕여왕 영화 촬영지' 입간판이 보인다.

언덕으로 올라선다.

이곳이 바로 월성(月城)이다.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곳.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렀다.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

 

월성

 

오른쪽 둔덕길을 걸어 오른다. 노송이 빽빽하다.

언덕길을 걸어 올라선 후, 아래로 내려서니 넓은 월성 궁궐터다.  한쪽에 석빙고가 보인다.

텅 빈 궁궐터.

한 그루 나무옆에 미실의 모형사진이 보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미실의 인기가 대단한 듯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실 옆에 서서 사진 촬영을 한다.

 

석빙고 문
석빙고 내부

 

미실의 모형 사진

 

 

천년을 지켜왔던 화려하고 영화로웠던 궁궐은 사라졌다.

쓸쓸한 텅 빈 궁궐 옛터를 뒤로하고 언덕을 내려선다.

조금 걸어가니 경주 김 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  "계림'이 나온다.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등 빽빽한 고목나무들이 울긋불긋 가을의 빛깔을 한참 뽐내고 있다.

계림비에는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계림

 

계림비

 

 

낙엽을 밟으며 큰 비석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향가비(鄕歌碑)다.

'찬기파랑가'가 새겨져 있다.

 

 '찬기파랑가'는 신라시대의 화랑이었던 기파랑의 높은 인격을 사모한 충담사가 그의 인물됨을 자연물에 비겨 찬양한 노래이다.

양주동해독문과 김완진 해독문을 옮겨 본다.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낭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에

나이의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조차 모르시올 화랑의 우두머리여.

      <양주동 해독>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모래 가른 물가에

기낭의 모습이 올 시 수풀이여

일오 내 자갈 벌에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갓을 쫓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김완지 해독>

 

'찬기파랑가' 가 새겨진 향가비

 

고분군을 지나니 첨성대다.

저녁 무렵에 도착하여 고색창연한 첨성대를 바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첨성대처럼 논란이 많은 문화재도 없다.

그것은 첨성대의 쓰임에 관한 이견 때문인데, 어떤 이는 천문관측대였다고 하고,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도 하며, 천문대의 상징 물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고분군

 

첨성대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터이다.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각 석단의 높이는 약 30cm이고 화강암 하나하나가 같은 형태이지만, 각 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1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방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있어, 이 창구를 통해 출입하면서 관측하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이 창구 높이까지 내부는 흙으로 메워져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 년의 날수와 같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의 정자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달 24 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첨성대는 갖가지 상징과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과 원형을 적절히 배합해 안정감 있고 온순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으로 된 것도 안정감을 표현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첨성대는 높이 9.108m, 밑 지름이 4.93m, 위 지름이 2.85m이며, 제27대 선덕여왕재위 중(632--647년)에 축조되었다.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백과사전 >  

 

 

황남동 대능원에 들어선다.

옛사람과 오늘을 사는 사람의 공존하는 터전.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23개기의 능이 솟아 있는 황남동 대능원이다.

미추왕릉을 보고, 천마총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몇 팀의 가족들과 함께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천마총은 내부를 볼 수 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었다.

"천마도는 마구장비(馬具裝備)에 그린 장식화로 경주 155호분인 천마총에서 출토되었다.

천마도가 그려진 채화판은 마구의 일종으로, 말안장과 연결되어 등자 부분에 내려뜨려진 장니(障泥) 일 것으로 추정된다. 

채화판은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치고 그 위에 고운 껍질을 입혀 종횡 사선으로 각 14줄을 누비고 가장자리에는 가죽을 대어 만든 것이다. 

중앙에 흰색으로 천마도를 그렸고 가장자리는 흰색·붉은색·갈색·검은색 선으로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장식하였다. 

천마는 흰 말이 말갈기와 꼬리털을 날카롭게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이다 "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낙타등 같이 생긴 쌍무덤인  황남대총은  발굴 후 복원하였다.

 

천마총

                      

 

낙타등 같이 생긴 쌍무덤인  황남대총

 

고분 사이 길을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이 다정스럽다.

 

 

신라는 육촌이 연합하여 국가를 건립하였고, BC 57년에 박혁거세가 화백에 결의로 왕으로 추대된 후 56대 경순왕이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긴 AD 935년까지 천년동안 계속된  왕조이다.

신라는 천년동안 서울인 경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으며,  박 씨 10 왕, 석 씨 8 왕,  김 씨 38 왕 모두 56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그중에서 세분의 여왕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51대 진성여왕이 있었다.

 

경주에는 옛사람과 공존하는 터가 있고, 또한 천년고도를 신비롭게 하는 터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수십 개가 무리를 짖어 

있는 고분이 있는 터다.

경주시 중심부에 있는 중앙대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탈해왕릉이 있는 금강산 고분군, 박 씨 왕릉이 집결되어 있는 서남산 고분군, 

헌강왕릉이 있는 동남산 고분군,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고분군 등등 많이 있다.

 

56 왕 중 박 씨 10 왕은 모두 왕릉을 찾았고, 석 씨 8 왕은 탈해왕 외는 모두 불명이며, 김 씨는 38 왕 중 9 왕의 능이 불명이다.

능을 찾지 못한 왕은 16 왕이다.

 

오늘의 답사여행은  대능원에서 마감하기로 한다.

서울에서 적어 온 사랑채 민박에 전화하니 방이 다 예약이 되어 있단다.

그래서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숙박하기로 하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걸어간다.

터미널 인근에서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은 후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니 '평일할인'이라고 쓰여 있는 모텔에서 짐을 푼다.

바로 내가 찾던 숙소다.

교통 좋고, 저렴하고, 시설도 괜찮아 불편함이 없다.

 

 

(2) 남산지구 답사

       2009.10.30  금요일  맑음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주봉인 금오산(469m)을 비롯해서 도당산, 양산, 그리고 외산의 주봉인 고위산(494m)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당산(돛대산)은 왕위를 주고받고 한 산이며,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던 장소이다. 양산에는 양산 기슭에 시조가 탄생한 우물 나정이 있다. 금오산에 대부분의 남산 유적물이 밀집해 있다.

고위산은 금오산과 마주하며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이며, 봉화대가 있고 천룡사지가 있어 천룡산이라고도 부른다.

 

크게 남산의 서쪽면을 서남산, 동쪽면을 동남산이라고도 부른다.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고, 서남산 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길다. 남산에는 약 40여 계곡이 있는데 한두 계곡을 빼고는 유적과 전설이 없는 계곡이 없다고 한다. 남산은 돌산이다. 많은 마애불이 있을 수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서는 서라벌을 가리켜 "寺寺星張 塔塔雁行"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 행렬처럼 보인다고 묘사하였는데 그 중심에 남산이 있다. 남산은 천년동안 다듬어 온  신라인의 숨결이 담겨 있는 거대한 문화재다.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오늘의 남산 답사 경로는 서남산 삼릉에서 삼릉계곡을 걸어서 금오산에 오른 후, 능선을 타고  용장사지와  용장사 3층석탑을 보고  다시 올라와서  남산 순환길을 걸어서 이영재를 지나 봉화대 능선을 타고 칠불암을 답사한 후, 봉화골로 내려간다.

시간이 허락되는 한 동남산 기슭의 유적지를 답사한다. 보리사, 옥룡암 탑골마애조상군, 부처골 감실 여래좌상까지 답사할 계획이다.

  

 

 

오늘이 경주 도착 둘째 날 경주 남산 답사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한 후 06:00시에 숙소를 출발한다.

어둑어둑한 길을 걷는다.

대능원 담장을 끼고 걷는다.

"影光臺"라 쓰여 있는 기다란 돌이 보인다.

 

"影光臺"라 쓰여 있는 기다란 돌

 

 

영광대(影光臺)는 1860년 가을에 경주 선비들이 무너진 월성교의 석재를 운반하여 사마소경내에 대를 쌓은 것이다.  대 이름을 영광 대라 이름 지었다. 송나라 주희의 시 "天光雲影共徘徊"에 나온 글로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뜻으로, 옛사람의 책 속에는 선현의 아름다운 말과 경계로 삼아야 되는 글귀가 담겨있다는 의미이다.

문천교 위를 걸어 남천(문천)을 건넌다.

 

남천(문천)

 

신라 초기의 박 씨 임금 네 분  시조 박혁거세왕,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피사왕과 혁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의 능인 "오릉"을 지난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겨있다.

여명이 밝아오는 들길을 걷는다.

 

 

새벽의 경주 들을 바라보녀 걸어간다.

들에는 벼를 나락 가리가 깔려 있다. 

할머니가 아침 운동을 하고 계신다. 이 논밭을 가로질러가면 나정으로 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갈 수 없다고 한다.

"오늘 비 온다고 했느냐?"라고 묻는다.  "오늘이 아니고 내일 비 온다는 예보가 있다"라고 답한다.

 

도로로 다시 나와  걷는다.

서서히 남산 모습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새벽 들길을 걸어간다.

 

새벽 들길

 

나정이다.

노송이 빽빽이 둘러쳐진 언덕이다.

이 우물터에서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경주 나정(蘿井·사적 245호)이 대형 8각 목조건물터로 확인됐다. 경주시의 의뢰를 받아 지난 5월 21일부터 경주시 탑동 나정 일대 2백여 평을 발굴해 온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최근 폭 20m 크기의 8각 목조건물을 세웠던 초석과 기단의 흔적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8각 건물은 지금까지 삼국 가운데 고구려의 탑(塔) 형식으로만 알려져 왔으며, 신라에서 8각 건물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라 탑의 형식은 모두 4 각형이다. 이번에 확인된 건축의 형식이나 출토 유물 등으로 미뤄 나정은 실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던 신궁(神宮. 박혁거세를 모시는 사당) 터일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나정'과 '신궁'은 모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박혁거세 관련 전설의 일부.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정은 박혁거세가 나온 알이 발견된 곳이다. '나정 우물가에 번개 같은 이상한 기운이 드리워지고 흰말이 엎드려 절하고 있어 사람들이 가보니 말은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에 자줏빛 알이 남았는데,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는 탄생설화다."

 

갈 길이 멀어 양산제와 창림사지는 포기하고, 포석정으로 향한다.

포석정지 또한 이른 시간이라 문이 굳게 잠겨 있다.

담장 위를 기웃했으나 포석정을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 사진으로 답사를 대신한다.

 

포석정지

 

 

삼릉입구를 향하여 또 걸어간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울긋불긋한 나뭇잎은 연신 떨어져 날린다.

밭 둔덕에 도라지꽃이 피어있다.

 

 

 

삼릉계 등로 입구에 도착한다.

음식점이 모두 하나 같이 문을 열지 않았다.

문을 연 슈퍼에 들어가니 끓는 물이 준비되지 않아 라면도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차선의 방법을 계란과 우유를 사고 어저께 사둔 찰보리빵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한다. 

생수도 한 통 사서 배낭에 넣는다. 
만반의 차비를 갖추고 남산 유적답사를 위해 등로로 들어선다.

 

 

삼릉 입구부터 노송이 빽빽하다.

어느 능이든지 능 주변에는 필수적으로 노송이 우거져 있다.

배리삼능도 예외일 수 없다.

 

 

 

배리 삼릉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배리 삼릉

 

 

삼릉을 뒤로 데크 등로를 따라  걸어 오른다.

데크길이 끝나니 우둘두둘한 돌길이다.

삼릉계를 따라 오른다. 삼릉계는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이라고도 부른다.

왼쪽으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땅속에서 발견된 머리가 없는 부처다.

몸체가 풍만하고, 매듭진 가사 끈,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선명하고, 옷 주름이 유려하다.

석조여래좌상 앞을 지나 왼편 경사진 돌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돌기둥 같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마애관음보살상
마애관음보살상

 

암벽에 돋을새김을 한 관음보살상. 경북 유형문화재 제19호 마애관음보살상이다.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을 썼고,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있다,

연꽃대좌 위에 서 있고 왼손은 정병(보병)을 들고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산길을 타고 또 오른다.

계곡도 깊어지고 산길도 험해진다.

 

등로에서 왼쪽 계곡을 너머로 큰 바위가 보인다.

경사진 바위길을 오르면 두 개의 큰 바위에 새겨진 선각육존불이 나타난다.

 

앞쪽 바위면에는 아미타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앞쪽 바위면에는 아미타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위로 서로 마주 보고, 좌우의 보살은 꽃 쟁반을 

받쳐 들고 목에 구슬 2개를 꿰어 목걸이를 하였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이다.

 

안쪽 바위면에는 석가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에는 석가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본존이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그 좌우에 방울3개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선각육존불(경북 유형문화재 제21호)의  전체적인 모습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진 선각육존불(경북 유형문화재 제21호)의  전체적인 모습이다.

 

다시 나와 등로를 따라 오르다  보니 쿵쿵 소리가 난다.

옆길을 따라 오르니 석불좌상이 보인다.  주변 정비 작업이 한창이다.

 

석불좌상은 보물 제666호

 

석불좌상은 보물 제666호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카락을 붙였고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가 있다.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아름답고 전체적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석불좌상 뒷길  경사진 길을 한참 걸어 돌아가니, 높은 바위들이 나타난다.

 

선각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59호)

 

선각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59호)은 높이 10m 되는 바위면에 새겨진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고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다.

뭉툭한 코, 얼굴은 큼지막하게 넓적하게 표현하였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쳤으며 양손의 손목까지 덮고 있다.

바위 속에서 얼굴을 내민듯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졍된다 한다.

 

 

선각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

 

 

마애불 앞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넓은 들판 뒤로 멀리 겹겹의 산들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남산의 마애불이 있는 곳은 하나 같이 앞의 전망이 좋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시 되돌아 나온다.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위로 상선암이 보인다.

 

 

상선암

 


상선암은 옛 절터에 70여 년 전 사찰이 세워진 곳이다. 절 부엌 바로 뒤에 파괴된 바위에 보살상의 하반신만 선각으로 남아 있다. 

본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완전할 경우 6미터가 넘는 대불이 된다.

상선암 툇마루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깊은 계곡 뒤로 멀리 겹겹의 산들이 달리고 있다.

울긋불긋 남산은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내고 있다.  산님들이 줄줄이 이어 올라오고 있다.

물통에 물을 하나 가득 담은 후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가니,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보인다. 상선암 마애대좌불이라고도 부른다.

 

마애석가여래좌상
마애석가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58호)

 

 

마애석가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58호)은,  

길이 6m  남북너비 4m 되는 평평한 터가 있는데 그 북면에 남향으로 높이가 7m 너비가 5m 되는 광배형으로 생긴 암벽이 있다.  이 암벽에 큰 불상을 새겨 놓았다.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누리를 굽어 살피시는 모습이다. 얼굴과 어깨는 돋을새김을 하고 옷주름, 손, 발은 부피 없는 선각으로 나타냈다.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아있고, 입술 언저리에 조용한 미소가 숨겨져 있다.

 

마애대좌불 앞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돌로 된 아름다운 남산은 물론, 멀리 장쾌히 전개되는 전망이 압권이다.

마애대좌불에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상사바위를 넘고 능선을 타고 드디어 금오산 정상에 선다. 

 

 

 

금오산에는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 뒷면에는 시가 새겨져 있다.  옮겨 본다.

 

금오산을 노래함 

최 병 익

 

높고도 신령스러운 금오산이여!

천년왕도 웅혼한 광채 품고 있구나

주인 기다리며 보내 세월 다시 천년 되었으니

오늘 누가 있어 능히 이 기운 받으련가?

 

금오산 표지석

 

 

남산 순환길 임도를 걸어 능선을 내려가니 통일전과 가는 길과 용장사지 가는 갈래길이 나온다.

 

 

 

용장사지 길로 들어서서 가파른 바위길을 내려서서 조금 가니,  용장사곡 3층석탑이 겹겹의 산을 배경으로 웅혼한 기상으로 우뚝 솟아 있다. 

감동적인 자태에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뒤로 고위봉(천룡산)이 보인다. 용장사는 선잠스님(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이며, 용장사 법당터 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 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용장사지를 내려가 보아야 하는데 올라오는 산님에게 물으니, 내려가기는 쉬우나 올라오는 길은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가파른 바위길이라고 한다. 용장골은 추후에 다시 한번 답사해야 하는 곳이기에 오늘은 가지 않기로 한다.

갈 길이 멀어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자리에 일어나 가파른 길을 되올라 나온다.

처음 갈래길에서 통일전 방향으로 남산 순환 도로를 걸어 내려간다.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삼화령 연화대좌 앞에 도착한다.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남산에는 세 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한다.

 

삼화령

 

삼화령엔 미륵불은 없어지고 연화대좌만 남아 있다.

이영재에서 칠불암 가는 길로 들어선다.

봉화대 능선을 타고 걷는다.

갈림길에서 칠불암가는 길로 내려선다.

 

 

가파른 바위길이다. 전형적인 돌산이다.

바위길을 내려서니 절벽이다. 절벽 밑이 칠불암이다. 

 

 

 

 

절벽 위 큰 바위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 길을 따라 조심조심 가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이 나온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이 불상은 칠불암 위의 곧바로 선 절벽면에 새겨져 있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인다.

머리에 삼면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상이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신선암 가는 길 칠불암 가는 길의 이정표가 기와에 이렇게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다.

후에 안 일이 자만 칠불암 스님이 이렇게 정성 들여 써 놓은 것이다.

 

 

 

가파른 암릉길을 따라 돌아 내려가니 칠불암이다.

12;30분이다. 

숙소에서 출발한 지 6시간 30분이 걸렸고, 삼릉 입구에서 8 ; 00시에 출발하였으니 4시간 30분이  걸렸다.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은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 위치한 마애삼존불과 사방불이다.

삼존불의 가운데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 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 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 보살은 본존을 향하고 있다. 사방불도 모두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칠불암 마당가로 채색한 아름다운 기와들이 세워져 있다.

하나하나 그 자체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스님의 섬세하면서도 치열한 구도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많은 것을 얻었기에 그냥 갈 수가 없다.

불전함에 시주하고 대나무가 빼 욱한 가파른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파르스름한 머리 잿빛승복의 여승이 계단을 힘겹게 올라온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니,  놀란 듯 쳐다보는 여승의 눈과 얼굴이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모르겠다.

하산길은 온통 낙엽들로 뒤덮여 있다.

가을을 재촉하는 듯 우수수 낙엽들이 쉬임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봉화골이 끝나고부터는 마을길을 걷는다.

사과밭을 지나고  염불사를 지나고 마을을 지난다.

 

 

 

남산리 삼층석탑 앞에 도착한다.

 

 

 

 

 

        

 

 

남산리 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길을 버리고 서출지 둔덕길을 따라 걷는다.

 

 

 

서출지(사적 138호)

 

 

이곳 서출지(사적 138호)는 까마귀가 신라 소지왕의 목숨을 구한 전설이 서려 있는 연못이다.

연못가에는 조선 현종 때 임적이 지은 '이요당'이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14:20분 통일전 주차장에 도착한다.

옆에 있는 식당에서 된장찌개 백반에 생막걸리 한 병을 주문하여 식사를 한다.

통일전을 지나 헌강왕을 입구를 지나 화랑교육원에 도착한다.

 

 

 

화랑교육원 정문 옆을 지나 산기슭으로 난 둔덕길로 걸어간다.

이 길이 보리사 가는 지름길이다.

 

 

 

보리사로 오른다. 한참을 오른다.

 

 

보리사 경내를 지난다.

 

"하심"(下心)을 상징하는 나무

 

나뭇가지가 머리를 아래로 아래로 내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다듬어 "하심"(下心)을 상징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

항상 "하심"할 것을, 항상 낮은 마음으로 임하라고 일깨운다. 

하심(下心)!

저 나뭇가지처럼.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이  보인다.

 

 

 

 

 

 

 

남산 동쪽 기슭에 신라시대 보리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석불좌상이다.

남산에 남아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다.

연꽃팔각대좌 위에 앉아있는 이 불상은 석가여래좌상이다.

반쯤 감은 눈으로 이 세상을 굽어보는 모습, 풍만한 얼굴의 표정이 자비로우면서도 거룩하게 보인다.

별도로 마련된 광배에는 연꽃띠 바탕 사이사이에 작은 불상을, 그 옆에 불꽃 무늬를 새겼다.

 

옥룡암 "탑골 마애조상군'으로 오르는 길은 탑골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낙엽진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오른다.

단풍나무를 지나 다리를 건너니 옥룡암이다.

옥룡암 경내는 울긋불긋 가을의 빛깔로 황홀하다.

마치 별천지에 온 듯하다.

뒷 요사채에 들어가 보니 장작이 가득 쌓여 있고 손수레도 보인다.

조촐하고 깨끗하다.

사람들이 두런두런 오고 간다.

 

 

대웅전을 지나 걸어 오르니, 담장으로 둘러싸인 소림정사 조종육엽이라는 현판이 달린 당우가 보인다.

 

 

 

계단을 밟고 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은 은행잎과 낙엽으로 덮여 있다.

담장너머로 마애조상군이 보인다.

 

 

 

탑골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탑골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이 있는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에 3층 석탑이 있어 "탑곡'이라 부른다.

마애조상군이라는 명칭은 높이 약 10m, 사방둘레 약 30m의 바위와 주변의 바위면에 여러 상이 새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면에는 마주 선 9층 목탑과 7층 목탑 사이에 석가여래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탑 앞에는 사자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동쪽면에는 가운데에 여래상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비천상, 승려상, 보살상, 인왕산, 나무 등이 새겨져 있다.

 

 

 

 

 

남쪽면에는 삼존불이 정답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여래상과 승려상이 새겨져 있다.

 

 

 

 

서쪽면에는 능수버들과 대나무 사이에 여래조상이 새겨져 있다 .

 

 

 

 

 

 

남쪽에 있는 삼층 석탑이다. 

이 탑으로 인하여 탑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탑 뒤로는 소나무 숲이 장막을 두른 듯하다.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곳이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탑곡 옥룡암과 마애조상군을 뒤로하고 계곡 옆 오솔길을 걸어 내려온다.

낙엽이 뒤덮인 계곡은 신비롭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부처골 감실 여래좌상으로 가기 위해 사박사박 걷는다.

오솔길을 걸어가니 대나무터널이 나온다.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가파르게 오른쪽으로 오르니 감실 여래좌상이 보인다.

 

감실 여래좌상(보물 제198호)

 

 

 

 

 

 

불곡 감실 여래좌상(보물 제198호)은 자연암을 90cm나 파내어 감 실을 만든 후 조각한 여래좌상이다. 경주에서는 '할머니 부처"로 불린다. 머리 부분은 깊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고 두건은 덮어쓴 것 같은데 귀 부분까지 덮여 있다. 얼굴은 약간 숙여져 있으며, 둥글둥글하게 조각하고 눈은 은행알처럼 두툼하게 나타내었다. 어깨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옷은 양 어깨에 걸친 통견으로 하였다. 손은 옷 속에 넣어 표현되지 않았고 옷이 수직으로 흘러내려 사각형 대좌를 덮고 있다.  오른발 만을 밖으로 드러내어 부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골짜기(佛谷)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처님의 부드러운 미소를 뒤로하고 길을 되짚어 나온다.

장장 11시간의 긴 남산 답사 여행이었다

큰길 포장도로로 나와 화랑교에서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하차한다.

식사하고 어제 묵었던 숙소에서 다시 짐을 푼다.

                            

(3) 낭산, 소금강지구 답사 

     2009.10.31 토요일  맑은 후 흐림

 

새벽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며 일기예보를 듣는다.

오늘 밤부터 서울 중부지방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많이 내릴 것이고, 밤사이 전국으로 비가 확대되고 남쪽은 오늘 밤 5-20mm가 

내리고 내일 오전 중에 비가 그칠 것이라 예보한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밤이라면 "신라의 달밤 165리 걷기 대회"는 의미를 잃게 된다.

달이 없는 신라의 거리를 무슨 의미로 걸을 것인가?

생각타가 일단 오전 중에  금일의 답사일정을 끝마치고, 일기예보 상황을 보고 "신라의 달밤 165리 걷기 대회"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다.

 

 06:30분 숙소를 출발하여 소머리국밥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시내버스를 타고 사천왕 사지 앞에서 내리니 시간은 07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걷는다. 

낭산 문화유적 답사가 시작된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산허리는 잘록하여 높이는 108m로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낭산 남쪽 능선아래 사천왕 사지 가 있다.

사천왕사 당간지주를 지나니 사천왕사 지다.

  

 

이른 시간이라 입구문이 잠겨 있다.

사천왕 사지는 지금 한창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문무왕 10년(670년)에 당나라와 전쟁을 하던 신라가 명랑법사(明朗法師)의 건의로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도량을 세우고 문두루비법 (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호국사찰뿐만 아니라 밀교사찰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문무왕 19년(679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다고 한다.

 

사천왕사하면 월명대사가 생각난다. 월명은 승려이면서 동시에 풍월도에 소속된 화랑이었다. 또한 음악인이고 문학인이기도 하다. 월명이 머무르던 사천왕사 앞길에서 피리를 불면 지나가던 달조차 멈추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월명은 향가 작가로서 "도솔가'와 "제망매가" 두 편의 향가를 남겼다. 월명대사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제망매가"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나뭇잎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를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제망매가 해독문을 옮겨 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여기에 있는데 두려워하면서

'나는 갑니다'하는 말도

미처 다하지 못하고 (저승으로) 갔느냐?

오는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에서 (너를) 만나 보게 될 나

도를 닦아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노라.

 

짙은 안개에 뒤덮인 사천왕 사지 앞을 걸어 선덕여왕릉을 찾아 발길을 떼어 놓는다.

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 오른다.

안갯속의 노송들이 신비롭고 신령스러워 보인다.

노송들 사이로 안개에 싸인 능이 보인다.

 

짙은 안개 속의 노송

 

 

 

 

짙은 아침 안개가 깔린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김춘추, 김유신 등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짙은 아침 안개가 깔린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

 

 

구불구불 자란 노송을 지나 능선을 타고 넘으니, 능지탑지가 나온다.

능지탑지(기념물 제34호)능지탑,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고도 부른다.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원형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고 나머지 돌은 옆에 모아 두었다.

이 탑지는 문무대왕의 시신 화장터로 추정된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 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된다.

 

능지탑지(기념물 제34호)는 능지탑, 능지탑 또는 연화탑

 

 

중생사 마애삼존불을 찾아 길을 따라 걸어간다.

오르막 길이다.  허름한 공터에 도착하니 개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안으로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개가 뛰어나오며 짖는다.

여기가 아닌가 싶어 입구로 되돌아 옆길 마을길로 들어선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바로 집뒤에 마애 삼존불이 있다고 한다.

집뒤 언덕을 오르니 지장전 안에 마애삼존불이 있다. 아까 갔었던 중생 사지 안쪽이다.

 

마애삼존불(보물 제665호)

마애삼존불(보물 제665호)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본존은 두건을 쓰고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비슷하다. 몸과 머리에서 빛을 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왼쪽 신장상은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오른쪽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 악귀를 몰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사람에게 독서당 가는 길을 물으니 논둑 밭둑길 끝나는 곳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서 가라고 한다.

안개가 자욱하여 산이 보이지 않으니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안개가 짙게 깔린 논둑 밭둑길을 걸으니 이슬이 신발과 바지자락을 적신다.

철길을 따라 난 길을 한 참 걸어가니, 문창후최 선생독서당 입구 비석을 발견하여 옆길을 따라 걸어간다. 

 

 

 

잡초가 무성한 둔덕길을 따라가니 밭이다.

이리저리 밭둑을 걸어서 가니 포장도로와 만난다.

독서당을 갈려면 비석표시길로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길이 새로 생긴 모양이다.

큰길을 따라가야 한다.

안갯속이라 독서당을 발견 못해 가는 것을 포기하고 황복사지라고 표시된 길로 걸어간다.

구황리(황복사지) 삼층 석탑(국보 제37호)이다.

 

구황리(황복사지) 삼층 석탑(국보 제37호)

 

구황리(황복사지) 삼층 석탑(국보 제37호

이 석탑은 높이 7.3m인데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석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43년 이 탑을 수리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좌상. 여래입상과 금동 사리함이 나왔다. 여래좌상의 높이는 12.2cm로 국보 제79호이며, 여래입상은 높이 14cm로 국보 제80호이다. 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에 이 탑을 새웠다고 한다.

 

마을길을 따라 계속 앞으로 간다.

안개가 너무 짙어 산이 시야가 트이지 않아 방향을 잡기가 무척 어렵다.

한 참을 걷고 또 걷는다.

 

 

 

들판 가운데로 난 길을 걷는다. 계속 돌아 나가란다.

마을이 나타나면 좌측으로 가면 진평왕릉이 나온단다.

 

 

안개 낀 느티나무 옆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진평왕릉(사적 제180호)

 

진평왕릉(사적 제180호)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을 쌓았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경주 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 백제와의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 진. 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다음이 설총무덤을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쉼터에 앉아 지도를 꺼내 놓고 나침반을 올려놓고 방향을 잡아보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다.

자전거를 타고 진평왕릉으로 가고 있는 사람을 따라가며 소리쳐 부른다.

길을 물으니,  이 근처 유적지인 설총무덤과 보문사지 등 유적지를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걷는다.

진평왕릉에서 달 뜨는 것을 보면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마을 속에 있는 설총무덤에 먼저 도착한다.

 

傳 홍유후 설총묘(기념물 제130호)

 

 

傳 홍유후 설총묘(기념물 제130호)

이 묘는 신라 중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설총의 무덤이라고 전해온다.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대사이며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그는 이두를 정리하여 향찰을 집대성하였고, 저술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이 "화왕계"가 전해진다. 고려 현종 때  홍유후라는 시호를 추증받았고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조선 인조 때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다.

 

보문리 유적은 논 밭 한가운데 흩어져 있다고 한다.

그곳까지 차례차례 안내해 주고는 마을로 돌아가신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연화문 당간지주 (보물 제910호)

 

보문리 석조(보물 제64호)

 

보문리 사지(사적 제390호)

 

보문리 당간지주(보물 제123호)

 

 

낭산 주변의 유적지 답사를 끝내고 나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다리도 많이 지쳐있다.

명활산성 가는 것은 포기하고 구황교를 걸어 북천을 건넌다.

구황 교을 걸어 북천을 건넌다.

숭덕전(문화재자료 제255호)을 지나고 신라 4대 탈해왕릉(사적 제174호)에 도착한다. 

 

 

 

 

그 옆에 표암(기념물 제54호)이 있다.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 한다.

 

 

 

 

탈해왕릉과 표암뒷 길이 소금강산지구 등로이다.

 

 

소금강산 기슭의 백률사를 산을 넘어가기로 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등로를 따라 걸어 오른다.

한참을 가니 이곳저곳 등로가 많이도 나 있다. 이정표도 없어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능선을 타고 걷는다.

한 기슭을 내려가다 오른쪽에 집이 보이는 듯하여 되돌아 그곳으로 내려가니 백률사 칠성각이다.

칠성각 옆으로 내려서니 백률사 대웅전(문화재자료 제4호)이 나온다.

 

백률사 대웅전(문화재자료 제4호)

 

백률사 대웅전(문화재자료 제4호)

 

백률사는 불교를 국법으로 허용해 줄 것을 주장하다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머리가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라 금강산에 떨어졌는데 그 자리에 ‘자추사’ 즉 백률사를 세우고 이차돈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이차돈 순교비(공양당)가 있던 곳이다. 지금 이 순교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섯 모 난 기둥 같은 빗돌에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새겼다. 가운데 면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새겼다. 두 손을 맞잡고 바르게 서서 머리를 내민 이차돈의 몸은 이미 머리가 몸에서 떠나 있다. 머리는 몸에서 햇살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발 앞에 떨어져 있다. 사방에는 꽃이 휘날려 떨어지고 대지는 파도처럼 진동하여 온 천지자연이 모두 이차돈의 숭고한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이차돈 순교비


나머지 다섯 면에는 네모칸[井間]을 치서 한 면마다 7줄이 되고 한 줄에 25자가 되도록 칸을 마련하여 

각 칸마다 글자 크기 3cm 정도의 글씨를 써 새겼다.. 

비문의 대강은 이렇다.
“818년(헌덕왕 10년) 8월 10일에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법흥왕은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여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걱정이 많았다.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천하에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하고 한탄하였다. 이때 이차돈이라는 사람이 있어 왕에게 나아가 자신에게 묻기를 청했다. 왕은 주저하였으나 이차돈이 재차 간청하자 불법을 펴고 싶은 마음을 말하였다. 이차돈이 자신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목을 치게 하면 신하와 백성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방책을 건의했다. 왕이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무고한 목숨을 상하겠느냐고 하자 이차돈은 자신이 비록 죽어도 불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일이라고 우겼다. 왕은 이런 사람이라면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 뜻을 따랐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불법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결국 이차돈을 처형하게 되었다. 관리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 가운데서 흰 우유가 한 길장이나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북산에 안장하고 서산에 사당을 세웠다.”

 

일연스님의 시를 옮겨 본다.

대의 위한 희생만도 놀라운 일이거든 
하늘 꽃과 흰 젖 기적 더욱 미쁘오이다.
칼날이 한번 번쩍 그 몸이 죽으시매
절마다 쇠북소리 새벌을 진동하네.
                        - 염촉을 위하여 


이차돈은 왕족의 후손으로 성은 박이고 자는 염촉, 염도, 거차돈, 처도라고도 한다. 경주에는 예부터 삼기팔괴(三奇八怪)  즉 세 가지 진기한 물건과 여덟 가지 괴상한 풍경이 있다고 한다. 그중 팔괴 중 백률송순(栢栗松筍)이 있다. 백률사에는 넓은 대숲이 있다. 이 지방에 잇는 대나무들은 보통 가느다란 것뿐인데 백률사의 것은 굵은 대나무들이다. 특히 봄이 되어 이 대밭에 죽순이 돋아날 때에는 굵은 것들이 한꺼번 에 힘차게 돋아나서 송홧가루 날리는 송순과 같아  그 정경을 찬미하여 "백률송순"이라 부른 것이다.

 

 

 

 

 

 

 

백률사 대웅전을 뒤로하고 대나무숲을 지나 내려오니 , 굴불사지 석불상(보물 제121호)을 만난다.

이 불상은 소금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약 3m의 바위에 여러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 형태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황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와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불렀다고 한다.

 

 

 

서쪽면의 아미타 삼존불은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 있게 표현되었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 입상을 세워 삼존불의 모습이다.

 

남쪽면에는 원래 삼존입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떼어갔다.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뛰어나다.

 

 

동쪽면의 약사여래좌상은 양 발을 무릎 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보인다.

 

 

북쪽면은 오른쪽에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 입상이 서 있는데 둥글고 예쁜 얼굴, 굴곡 있는 우아한 자세등 그 표현이 뛰어나다. 왼쪽에는 6개의 손이 달려있는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소금강지구의 문화유적 답사도 끝났다.

내 안의 부처를 찾아 돌아다녔던 3일간은, 나름 행복하였다.

삼국유사에서 묘사하였듯이 절은 별과 같이 많고 탑은 기러기 행렬과 같았다.

부처님은 처처에 앉아 시방세계를 굽어보고 있었다.

부처님의 미소

보일 듯 말 듯 조용한 미소가 피어난다.

부모미생 전본래면목을 찾고자 내일도 또한 나그네의 발길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