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불뫼아래 꽃핀 제2의 경주 창녕을 찾다.

2009. 11. 14. 20:05도보여행기/천년고도 경주에서 불뫼 창녕까지

(4) 불뫼아래 꽃핀 제2의 경주 창녕을 찾다.

 

청도 읍성을 걷다.

 

"신라에 통합되기 이전 선사시대에 있어서 청도군 일대의 정치적 집단은 이서국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이서국(伊西國)이 청도에 존재했던 초기국가이다. 신라는 이서국을 합병한 후 운문일대에 화랑들의 수련장을 만들어 삼국통일을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군사적인 요충지로 신라의 서진정책(西進政策)에 따라 사용했던 당시의 군대 주둔지가 많이 남아 있다. 청도의 옛 이름은 이서, 대성, 도주, 오산등이 있다. 청도(淸道)라 함은 '山川淸麗 大道四通' 산수가 맑고 아름다우며, 큰 길이 사방으로 나 있어 교통이 편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고 한다.

 

소머리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금천버스정류장으로 가니 곧 청도에 가는 군내버스가 출발 대기 중이다.

청도역 앞 터미널에서 하차한다.

이곳에서부터 화양읍에 있는 청도읍성까지 걷는다.

 

 

청도 하면 감과 소싸움이 떠 오른다.

씨 없는 감, 청도 반시와 감말랭이도 특산물이다.

강한 투지로 맞부치는 소싸움 조형물을 보니 새로운 기분이 든다.

화양읍에 있는 청도읍성에 도착한다.

청도 선정비군
청도 읍성
도주줄다리기 정월 보름 전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

 

 

석빙고

 

청도 객사로 쓰던 도주관

 

화양읍에 있는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군내버스를 타고 풍각면으로 간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다.

정류소에서 창녕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하루에 한 번 아침 8시 15분에 출발한다고 한다.

모텔이 한군데 있다.

짐을 풀고 유숙한다.

 

 

불뫼아래 꽃핀 제2의 경주 창녕을 찾다.

 

"낙동강이 일구어 낸 창녕, 밀양지역은 경남의 노른자위 땅으로 많은 역사 유적지를 갖고 있다. 창녕은 불뫼라고 불리는 화왕산자락의 고을로 가야시대부터 통일신라, 조선 왕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답사지로 치면 가히 제2의 경주라고 불릴 만한 곳이다. 창녕은 가야시대에 빛벌(非火)가야가 자리 잡은 곳으로 오늘날 교동, 송현동에 있는 고분군이 그 당시 유적이다. 창녕지방이 6가야의 하나인 비화가야(빛벌가야)의 본거지다. 신라의 점령지가 된 후, 백제나 다른 가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 중요성에 힘입어 경주에 버금가는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창녕은 고려 태조 때 얻은 이름이다. 신라시대에는 비사벌군, 비자화군, 화왕군으로 불린 바 있다."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09. 11. 4.   수요일  맑음

 

08 :15분발  창녕행 버스에 탑승한다.

창녕 영신버스터미널 근처에서 하차한 후, 영신버스터미널에서 09 :40분 발 옥천행 버스에 오른다. 

 

 

영신버스 운행 시간표

관룡산과 관룡사를 갈려면 옥천행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우포늪을 갈려면 이방행을 타고 소목리나 장재마을에서 내리면 된다.

오늘의 일정은 관룡사와 용선대를 거쳐 관룡산, 능선을 타고 화왕산을 오른 후 자하곡 탐방로로 하산한 후, 창녕에 있는 문화유적지를

두루 답사하고 우포늪 소목리 민박집에서  묵는 것이다.

 

옥천행 버스를 타고 약 35분 정도 걸린 10:15분 종점에서 내리니 관룡사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일단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한다.

 

관룡사 주차장에서 오른쪽 계단을 밟고 올라 가면  관룡사 석장승이 우뚝 서 있다.

관룡사 석장승은 한 쌍으로 조성되어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왼쪽이 남장승, 오른쪽이 여장승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장승은 상투와 같은 둥근 머리와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 주먹코 등이 투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만 남장승의 턱이 각진데 비해 여장승은 부드러운 선을 유지하고 있다."

 

 

관룡사 석장승

 

남장승

 

여장승

 

 

 

언덕을 돌아 올라서니 날카로운 흰 암봉 능선의 구룡산이 관룡사를 감싸고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 火旺山 觀龍寺 사천왕문을 들어선다.

대웅전과 당우들  뒤로 뾰쪽 뾰족한 암봉능선 구룡산이 보인다.

 

"관룡사는 1,500여 년 전에 건립(내물왕 39년)된 천년고찰로 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이며, 원효대사가 제자 1,000여 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화 한 도량이다. 관룡사 이름의 유래는 원효대사가 제자와 함께 100일 기도를 마친 날 화왕산 정상 월영삼지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여觀龍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 뒷산을 구룡산이라 하였다."

 

 

대웅전과 당우들  뒤로 뾰쪽 뾰족한 암봉능선 구룡산이 보인다.

 

대웅전 (보물 제212호)  초창은 1401년, 중건은 1617-1618년

 

약사전(보물 제146호)  지붕이 기둥간격에 비하여 두 배 가까이 길어 균형 잡힌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약사전 석가여래좌상(보물 제519호)

 

약사전 석가여래좌상(보물 제519호)  높은 대좌 위에 특이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관룡산 오르는 길로 500m 걸어가면 용선대가 있다.

아득하게 높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절벽 암반 용선대 부처님이 보인다.

 

바위 벼랑 암반 위의 용선대 부처님이 바라보인다

 

 

경사진 길을 오르다 갈림길에서 왼쪽 바윗길을 올라서니 용선대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觀龍寺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은(보물 제295호)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양감이 줄어들고 약간 위축된 모습이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앉은 자세에서는 다소 둔중함이 느껴진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형(半球形)의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觀龍寺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은(보물 제295호)

                         

                         

 

반야용선(般若龍船)은 고해의 바다에서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배다. 지혜의 배다.

"원아 속승 반야선" (원컨대 빨리 반야선을 타게 해 주소서)을 기원하곤 한다.

암반전체가 배다. 용선이다. 반야용선인 것이다.

단아한 얼굴 표정 자비로운 미소를 띤 모습으로,  

비바람  1,300여 년 세월 동안 변함없이 사바세계를 굽어 보시며, 

수많은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안내해 주고 있으시다. 

고달픈 수 많은 중생을 어루만져 주고 있으시다.

대좌 한쪽에서 명문(銘文)이 발견되어 통일신라시대인 722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원래는 부처님이 마을을 보고 있었는데, 일제 때 남향에서 동향으로 부처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좌대에 틈새가 생기고, 괴어 놓은 주먹돌이 있다고 한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관룡산 정상에 오른다

 

 

능선을 따라 걷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니 임도와 만난다.

허준이 삼적사에서 대풍창(나병) 환자를 돌보는 과정을 촬영한 드라마 촬영 세트장을 지난다.

화왕산성 동문을 오른다.

 

화왕산성

화왕산 정상부 험준한 암벽을 이용해 골짜기를 둘러싼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 다시 쌓았고, 그 이듬해에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 성을 근거로 의병활동을 하면서 내성을 쌓았다 한다. 성안에는 군창과 9개의 샘, 그리고 3개의 연못이 있었다 한다. 현재 3개의 연못은 확인된다.

움퍽 파인 5만여 평의 억새평원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화왕산성

 

화왕산 정상에서의 조망

 

화왕산 표석

 

화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압권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평원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마른 황토흙이 풀석풀석 일어나는 자하곡 탐방로로 날래게 하산한다.

 

창녕 문화유적을 찾아 나선다.

 

창녕 송현동 고분군

 

창녕 송현동 고분군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비화가야의 왕릉과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추정된다. 원래 80 여기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17기 정도의 봉토분이 확인되고 잇다.

 

창녕 교동군 고분군  가야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창녕 송현동 석불좌상(보물 제75호)

 

창녕 송현동 석불좌상(보물 제75호)

자연암석을 반원형으로 다듬어 두드러진 돋을새김으로 부처를 새긴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이다.

 

 

진흥왕 척경비(拓境碑) (국보 제33호)

 

 

 

진흥왕 척경비(拓境碑) (국보 제33호)

이 비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기념비이다.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창녕 석빙고

 

창녕 술정리 동삼층탑(국보 제34호)

 

 

창녕 술정리 동삼층탑(국보 제34호)

크기와 조각 수법이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될 만한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위풍이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 1965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용기가 발견되었다.

 

창녕 문화유적을 답사를 끝내고,

영신버스터미널 근처 식육점 식당에 들어가 삼겹살과 소주를 주문하여 출출한 배를 채운다.

 

17:30분 이방행 버스에 탑승하고,

소목마을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우포늪 소목마을로 간다.

 

 

 

해가 금방 떨어진다.

길이 깜깜하여 이리저리 헤맨 후에야 전화 걸어 두었던 민박집을 찾아 짐을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