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北漢山城의 文化 遺跡을 찾아서 - 白雲洞門, 山影樓와 善政碑群

2015. 10. 24. 10:43나를 찾아 걷는 길/서울의 진산(鎭山) 삼각산(三角山)

 서울의 진산(鎭山) 삼각산(三角山)

 (4) 北漢山城의 文化 遺跡을 찾아서 - 白雲洞門山影樓善政碑群

  

내가 오르는 것은 산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큰 울음 속이다.

울음 속이 아니라

하늘 밖에 길을 열어 오는

가을의 바람 속이다

바람 속이 아니라

보우(普愚)가 여기저기 뿌려 둔

무자 화두(無字 話頭)들이다.

지금 산을 오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늙은 풀꽃을 더듬고 있는

고추잠자리다.

고추잠자리가 아니라

한덩어리 큰 바위돌이다.

< 이근배 시인의 '북한산' 중에서 >

 

' 백운동문' 각자

 

진국교를 지나 정자 쉼터에서 오르막 길을  걸어가다  좌측 가파른 돌길로 올라서면 용학사로 가는 윗 길이 있다. 

그 길섶 미끈한 바위에 "白雲洞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 새겨져 있다."

조선의 실학자 형암 이덕무의 "기유북한(記遊北漢)"에 '白雲洞門'이라 새겨진 바위를 보았다고 나온다.

성능의 북한지(北漢誌)에는, " 백운동(白雲洞) : 장군봉 아래에 있으며 문(門)에 白雲洞門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머리에 갓을 쓴 형태의 바위다.

갓 아래로 비석 모양으로 바위를 파낸 곳에 각자가 있음직한데 훼손된 듯하다. 

돌길을 걸어 용학사로 향한다.

군데군데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白雲洞門" 각자 바위

 

가로 7m, 세로5m에 이르는 화강암 바위에 '白雲洞門'리아는 글씨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언제 누가 제작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성능의 북한지에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용학사(龍鶴寺) 요사채 뒤 바위에 섬세하게 선각(線刻)한  신장상(巖刻 神將償)을 보고 산영루로 향한다.

  

용학사 대웅전

 

 

용학사 암각 신장상(神將償 )

 

 

용학사 요사채 뒤편에 있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 전체에 얼굴을 옆으로 향한 모습을 한 4구의 신장상이 음각되어 있다.

그중 2구는 위편에, 또 다른 2구는 그보다 1m 정도 아래에 자리한다.

몸체는 모두 비대하여 안정감을 보이며 부리부리한 눈과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리는 모습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두 번째 신장상은 허리춤에 귀면(鬼面)이 뚜렷하다.

 

   

 산영루(山影樓) 와  북한산성 선정비군(善政碑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멸실되어 주춧돌만 남아 있었던 곳에, 2014년 고양시에서 사진 자료등을 참고하여 산영루를 복원하였다.

 

 

   

용학사에서 주 등산로로 내려와 중흥동 계곡으로 내려선다.

하얀 암반이 산영루를 감싸고 있다.

큰 암반 위에 주춧돌을 세우고 건립한 누각, 산영루가 아름답게 솟아 있다.

매끈한 암반 위로 옥구슬 부딪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은 그 아래에 맑은 담(潭)을 만들어 놓았다.

 

성능의 북한지에는,

"산영루(山影樓)

  중흥사 앞에 옛날의 작은 다리가 있었는데, 그 위에 누각을 덮어 지었다. 그 누각이 바로 이 산영루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항해루(沆瀣樓)

 중흥사 동구에서 시냇물에 발을 디디면 언룡교가 있다. 언룡교 윗쪽에 2층 누각이 있으니 이것이 항해루이다. 승 성능이 창건하였다.

 대제학 이덕수가 지은 상량문이 있다."라고 하였다.

 

원래의 산영루(山影樓)는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만나 합수되는 지점의 연못가에 있었다.

산영루는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영루는 북한산성 축성 이전부터 있었는데 없어졌고, 지금의 산영루는 성능이 창건한 항해루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호 이익은 산영루에 뜬 달을 삼각산 8경의 하나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여유당전서>에 다산 정약용이 산영루를 유람하고 읊은 시가 전해진다.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에 날게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숲 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 꽃을 피우는데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완당전서>에 이곳을 유람했던 추사 김정희도  산영루 시를 남겼다.

 

온통 붉게 물든 솦속에는

굽이치는 냇물과 솟구친 봉우리들

먼 종소리는 빗소리에 가려 희미하고

그윽한 독경소리 찬 구름 속에 스며드네.

늙은 바위는 전생을 되새겨 보게하고

산은 깊어 종일토록 바라보게 되네

구름 안개는 걷힐 때가 없지만

좁은 오솔길은 반가이 사람 맞아주네

 

수많은 봉우리 연이어 서 있고

차가운 비는 누각에 가득하네

오랜 옛날 동쪽으로 돌아가던 날

진흥왕은 북쪽 변방을 순행했네

험한 산지에 보루를 쌓으며

드넓은 하늘 아래 유람했네

수놓은 듯 화려한 골짜기 이를 아는 듯

무성한 숲을 이뤄 매끄럽게 흐르려 하네

 

봉우리 그림자들 멋대로 옆으로 기울고

누각을 비추니 누각 안이 또한 가득하네

허공을 버티고 있는 둥근 한 기운

힘을 모아 한 가을 붙잡고 있구나

석름과 하나로 묘한 모습 이루고

천도와 호쾌함을 겨루고 있네

의당 원력을 베풀고 있으니

천지의 축이 서류를 지켜준네.

  

부인이 죽었을 때, "나는 그대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대 나를 떠났으니/  좋은 말 굳은 맹세 모두 부질없구려/ 저 세상에서 어버이 모시고 즐겁겠지만/
나를 위해 조금 더 있질 그랬소."
라는 애도시를 지었던, 조선 중기 학자 月谷 오원(1700-1740)이 북한산 산영루를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청려장을 짚고 이러저리 냇물의 동서를 거니노라면

겹겹이 둘러쌓인 산봉우리에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해진다

가을 날의 나무들, 길 떠나려는 말을 제 자리에 묶어두고

텅 빈 누각, 차마 나로 하여금 맑은 시냇물과 이별하지 못하게 해

높은 성의 웅장한 규모, 인력의 많았음을 헤아릴 수 있겠구나

백이.숙제의 그 기백, 천년이 흘렀어도 새울음 소리 속에 전해지고 있네

원대한 지략 없는 이 못난 서생, 부끄럽기 그지없어라

지닌 것이라곤 다만 술 한독에 나막신 두짝 뿐이로세

 

  

복원한 산영루와 그 아래 암반 위로 계류가 흐른다

 

산영루

 

중흥동구에서 바라보이는 산영루

 

비석군(碑石群)에서 바라 본 산영루

    

1896년 독일인 엘렌이 찍은 산영루

  

고서화;산영루

 

 선정비석군(善政碑石群)이 있는 비석거리로 올라서니,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이 암각문은1855년(철종6)에 새긴 북한승도절목으로 모두 325자다.

명문에는 승병대장인 총섭을 임명할 때 예상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규칙 3가지를 제시해 놓았다.

이를 통애 승영사찰이 피폐하여 승도가 흩어지고 있었던 사실과 그 원인이 총섭의 부적절한 임명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를 전후하여 산성 밖의 승려가 총섭에 임용되기 시작한 것과, 불공평한 임용을 막기 위하여 다수결의 비밀 투표를 요구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암벽에 새겨진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 )

 

  

용학사 언덕 일대에 선정비(善政碑)가 즐비하게 서 있다.

이곳의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의 최고 책임자가 재임할 당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로, 현재 26기 정도 남아 있다.

비석이 아닌 암벽에 새긴 선정비도 있다.

  

선정 비석군

 

선정비석군

   

암벽에 새긴 각자

  

1896년 독일인이 찍은 산영루와 어제비각

 

1896년 독일인이 찍은 사진에 보면 산영루와 현재의 용학사 일대에 수많은 비석이 즐비하고, 오른쪽 언덕에 숙종의 어제비각이 보인다.

성능의 북한지에는,"숙종38년 (1712) 임진에 왕이 북한산성을 행행(行幸)하였다. 4월 초 10일 왕이 북한산성에 행행하여 성첩을 두루 관람하고 천연적인 험준함에 감탄하여 시 6수를 지으셨다." 고 하였다.

 

計深陰雨行新城

曉出南門鼓角鳴

驍騎數千分扈탁

風薰日永屬朱明

 

깊은 생각 끝에 궂은 비를 무릅쓰고 새로 쌓은 북한산성에 올랐도다.

새벽에 남문을 나오자 북소리와 피리소리가 울려퍼지네

날랜 기병 수천명이 대오를 나누어 호위를 하니

훈풍이 불어오는 가운데 해는 길어 어느덧 여름이 되었구나

 

西門初入一回頭

氣壯心雄寫我憂

國都咫斥金湯固

何棄吾民守漢州

 

서문으로 들어가 고개 돌려 뒤돌아보니

왕성하고 웅장한 기운과 포부 내 맘 속의 시름 절로 지워지네

국도의 지척에 금성탕지가 있으니

내 어찌 백성을 버려 수도를 지키지 않으리오?

 

間闕十里到行宮

柴丹卽在東

露積峰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도성 십리 거리의 행궁에 이르르니

높고 험한 시단봉이 바로 동쪽에 보이누나

노적봉 머리엔 아직도 구름이 덮혀있고

백운대 위에는 안개가 몽롱하구나 

 

登彼東臺若上天

千峰削立接雲烟

寇賊非徒不敢近

猿유亦必愁攀緣

 

험준한 저 동장대 하늘을 오르듯 가파르고

깎아세운 듯 무수한 봉우리 운연과 잇대었네

도적과 비도가 감히 다가오지 못하니

설사 원숭이라 한들 오를적엔 위태로움을 두려워하리라

 

仗衛己先陳返途

城東駕出亦崎嶇

徐行周覽多形勝

況是淸江興不孤

 

호송 군사 돌아갈 차비에 분주할 제

동쪽 성문 나오는 길 그 역시 험하여라

서서히 가면서 주위의 무수한 승경들을 돌아보니

한강의 맑은 물조차 산색을 더욱 아름답게 비추는구나

 

過刹道成逢坦路

風埃滿目日將暮

士女如林瞻羽

抱寃皆許駕前訴

 

사찰의 험한 길 지나니 평탄한 길 나오누나

풍진이 눈 앞에 자욱하고 해는 저물어가네

백성들이 수풀처럼 많이 나와 깃발을 바라보매

억울한 사연 있는 사람들 모두 나와 하소연하도록 허락하였네

  

산영루 앞 언덕에 숙종이 지은 이 시를 돌에 새겨 세우고 어제비각(御製碑閣)을 건립하였다.

생각하면, 이 어제비각도 산영루와 함께 복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비석거리에서 바라보이는 산영루- '어제비각'이 복원되지 않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