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北漢山城의 文化 遺跡을 찾아서- 용암사,대서문,무량사,중성문,노적사

2015. 10. 16. 11:32나를 찾아 걷는 길/서울의 진산(鎭山) 삼각산(三角山)

 서울의 진산(鎭山) 삼각산(三角山)

 (3) 北漢山城의 文化 遺跡을 찾아서- 용암사,대서문,무량사,중성문,노적사

 

북한산성(北漢山城)

성능의 <북한지>에 의하면, 도리(道里) 북한산성은 동쪽으로 양주목까지 거리가 60리이고, 서쪽의 고양군까지 거리가 30리이며, 남쪽의 경도

(한성부의 별칭)까지는 10리, 북쪽의 홍복산까지는 20리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 북한산성은 원래 양주목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한성부에 소속되어 있다.

 

연혁(沿革)

북한산성은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이었는데, 남평양이라고 하기도 했다. 백제의 온조왕이 이를 차지하여 온조왕 14년(BC5)에 성을 쌓았다.

총목에는 남평양성은 지금 경도(조선시대 서울인 한성부의 별칭)의 북한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개루왕 5년(132년) 임신에 북한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 26년 (371년)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개로왕 21년(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침입하여 이 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탈출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성은 폐지되었다. 조선 숙종 37년(1711) 신묘에는 온조왕의 옛터에 산성을 쌓아 이를 요새로 삼았다 하였고, 문화재청에서는 북한산성을 1968년12월5일 사적 제162호로 지정하여 이르기를,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하였다.        김윤우 저 <북한산의 역사지리>의 서문 일부를 옮겨 북한산성의 역사를 개관해 본다.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이다. 북한산이 역사상 뚜렷하게 우리의 역사와 함께한 것은 2천여 년 전의 일이다. 곧 기원전 18년 경에 비류와 온조 등의 백제 건국 집단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고구려에서 남으로 내려온 후 이 산에 올라가 국도의 자리를 조망하여 본 일이 있다.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은 이 산에 올라 신라의 국계를 정하고 비봉에 순수비를 건립하였다. 고려의 현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이 산 신혈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으며, 왕위에 오른 후 그가 승려 생활을 할 때 자신을 보호하고 돌보아 준 진관조사의 은공을 잊지 못하여 그를 국사로 봉하고 진관사를 창건하였다.

 

또 북방 거란족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에는 태조 왕건의 재궁(梓宮 :시신을 넣던 관)을 이 산 향림사에 옮겨 안치하고 북한산성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 생활를 한 적이 있다. 헌종 때 개성 현화사 초대 주지로 임명된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이 주석하였던 곳도 이 산의 삼천사이다. 후일 고려 정종.문종 때의 문신 이영간이 지은 대지국사탑비를 건립한 곳도 바로 이 절이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은 이 산 중흥동 일대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주둔하면서 중흥성을 수축하며 요동 정벌의 원대한 꿈을 키운 바 있다. 그가 머물던 곳의 산봉우리가 바로 중흥사지 근처의 장군봉이다. 고려 말 우리나라 임제종의 초조였던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普愚)가 폐사되어 가는 절을 중창하여 머물던 곳이 산성 안에 있었던 중흥사다 그 동쪽에 부속 암자를 창건하고 태고암가를 지어 진리의 등불을 밝혔던 곳이 태고사이다.

 

600년 전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는 국도의 자리와 그 맥을 살피기 위해 이 산에 올라 백운봉에서 만경대를 지나 남서쪽으로 비봉에까지 이른 적이 있다. 조선 세종 때 수양대군 등은 규표(圭表 : 천문관측 기계의 하나)를 바로잡기 위해 이 산의 보현봉에 올라가 해가 출입하는 것을 관찰한 일이 있다. 조선 선조 때에는이덕형 등이, 숙종 때에는 허적. 신완. 이기하 등 여러 대신들이 북한산성의 축성을 위해 이 산을 오르내리며 상세히 답사한 바 있다. 또한 이 산에는 고려조.조선조의 수많은 문신, 또는 문인들이 이 산을 유람하며 남긴 많은 시문과 기문이 전한다. 중흥사 앞 냇가에 있었던 산영루는 바로 이덕무.김정희 등 문명이 높은 문장가들이 시제삼아 시문을 읊었던 풍광이 뛰어난 누정이었다.

 

북한산은 이렇듯 과거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역사 창조의 주역들이 오르내린 산이요, 그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던 곳이다. 때문에 이 산에는 그들이 남긴 수많은 역사적 발자취와 그 유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성능(聖能)의 북한도(北漢圖)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숙종37년(1711년) 도성을 방어하고 국난시 임시 피난처로 이용하기 위해 왕명으로 축성하였는데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완공하였다. 수문 북쪽으로부터 용암까지는 훈련도감이, 용암 남쪽으로부터 보현봉까지는 금위영에서, 보현봉에서 수문 남쪽까지는 어영청이 각각 분담 축성하였는데 북한산의 자연조건을  그대로 활용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북한산의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돌의 형태나 크기가 다양하며,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다. 계곡부는 온전한 높이로 쌓았고, 지형이 가파른 곳은 1/2, 1/4 로 쌓거나 여장만 올렸으며, 험난한 봉우리 부분은 쌓지 않았다. 전체둘레는 약 11.6km이며, 내부면적은 5.3제곱km이며 이중 99%의 면적은 고양시에 속한다.

 

백운봉 만경봉 인수봉 원효봉 의상봉 등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둘러싼 형태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내성과 외성의 이중 성으로 쌓았다. 성벽에는 주출입시설인 대문 6곳, 보조출입시설인 암문 8곳, 수문 2곳, 총 16개의 성문을 만들었다. 현재 수문 2곳은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아 수문지라 불린다.

병사들이 성벽을 지키는 초소인 성랑 143곳, 유사시 임금의 임시 거처인 행궁, 군대가 주둔하는 군영 3곳, 승군이 주둔하던 승영사찰 13곳,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 3개소, 99개의 우물과 26개의 작은 저수지, 8개의 창고, 산영루 등 누각 3곳이 있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과 북한산 향로봉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성곽으로 서성·겹성으로도 불려지며, 북한산성의 외성에 해당한다. 탕춘대성은 숙종 39년에 공사를 착수하였으나, 진행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2년만에 홍지문과 오간수문을 준공하고 그 양쪽에 날개성(翼城) 일부를 쌓았으나 반대론에 밀려 중단되었다. 숙종 44년에 다시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다시 중단되었다.

 

북한산의 수많은 산봉우리, 주능과 지능, 그리고 수많은 계곡을 오르내리며 산성 내외에 산재한 문화 유적(文化 遺跡)을 더듬는다. 1915년과 1925년 여름의 대홍수와  그리고 일제 시대의 고의적인 훼손과 화재등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멸실된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하다.

   

 

白衣觀音無說說하는 용암사(龍岩寺둥) 

둥그스럼한 원효봉과 삐죽하게 솟아오른 의상봉을 바라보며 북한산성의 정문 격인 대서문(大西門)으로 향하는 포장 길을 걷는다.

길 양옆에는 나무껍질이 조각조각 떨어져 얼룩이 진 갈잎큰키나무 플라타너스가 무성한 잎을 달고 우뚝우뚝 서 있다.

의상봉 오르는 등산로 입구를 지나면 곧  "龍岩寺"라 새겨진  바위 표지석이 보인다.비탈길을 올라 가파른 계단을 허위허위 오른다.

수각(水閣) 바위에 천년을 이어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있는 맑고 찬 석간수(石間水)를 마신다.

심신이 쇄락해진다. 

우뚝 솟은 의상봉, 그리고 병풍처럼 둘러친 용바위와 바위벼랑에 법당 대웅전이 매달려 있는 듯하다. 

대웅전 작은 마당에 서면 고양시가 아득히 펼쳐진다.

법당 처마 밑의 물고기는 하늘을 유영하며 "뎅그렁 뎅그렁" 맑은 소리를 내고 있다. 

대웅전 어간문에는, 구름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 무릎 굽혀 합장하며 백의관음을 올려다 보는 남순동자 , 

푸른 버들이 꽂혀 있는 정병, 그리고 바위와 대숲이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 주련을 읽는다.

白衣觀音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

甁上綠楊三際夏

巖前翠竹十方春

 

백의관음은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 

남순동자는 듣는 바 없이 듣는다.

병속의 푸른 버들 언제나 여름이고

바위 앞의 푸른 대나무 어디나 봄이라네.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차례로 친견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다가 28번째 선지식인 관음보살을 만나는 것을 뜻해서 남순동자라 한다.

두 사람은 항상 같이 있지만 말이 없다.

관음은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 남순동자는 듣는 바 없이 듣는다.

 세상 모두를 관음의 법문으로 보라

이것이 관음의 무설설(無說說)이다.

 

용암사는 1,300년 전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효 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의상 스님을 불러 의상봉 아래 석굴로 안내하였고, 

그 후 원효 스님은 원효봉 사자바위에서 의상 스님은 의상봉 두꺼비바위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참선 수행하였다 전해진다.

1960년 대 후반까지 빈터에 그 흔적만 남아 있던 곳에  1968년 노적사 주지였던 정천스님이 용암사를 중창하였다.

한 때는 신라 고찰이였지만, 산성 밖에 위치하여 승영사찰은 되지 못하였고 현재는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있다.

 

법당 외벽에는 의상봉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의상봉과 의상봉 정상의 두꺼비 바위, 그리고 용바위와 용암사 등이 묘사되어 있다. 

대웅전 주위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졸한 석등 1기가 있고,  또 거북이 등에 세워진 석탑 1기가 더 있는데 작지만 당당해 보인다. 

 

대웅전 왼쪽 능선을 따라 오른다.

용바위가 꿈틀거리며 끝 모르게 길게 뻗어 내리고 있다..

용바위 머리에 오르니 정면으로 고양시가 아득하게 펼쳐지지만 바위벼랑이어서 대웅전은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산능선을 오르면 오랜 풍우에 마모된 자그만 5층석탑이 있다.

석탑 너머로 원효봉과 용바위 그리고 대웅전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가파른 능선길을 더 오르면 거북바위가  있다.

평평한 거북바위 등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원효봉 사자바위가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병풍처럼 둘러친 용바위와 바위벼랑에 법당 대웅전이 매달려 있는 듯하다.- 멀리 원효봉이 바라보인다.

 

대웅전 편액

 

 

어간문

 

 

주련(1)

 

  

주련(2)

 

     

법당 안의 백의관음

 

   

법당 내에서 바라 본 어간문

 

 

대웅전 &nbsp;&nbsp; 외벽화

 

   

대 웅전 외벽화- 의상봉과 의상봉 정상의 뚜 꺼비 바위, 용바위와 대웅전 등이 묘사되어 있다.

 

   

대웅전 처마 밑의 풍경(風磬)

 

    

작지만 당당한 거북등 위에 세워진 석탑- 비신은 새로 만들어 끼운 듯하다

 

     

동자상

 

    

오른 손으로 은전을 들고 있는 포대화상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졸한 석등

 

      

용바위

 

                                                                            

용바위 너머로 바라보이는 조망

 

      

용바위가 150m 정도 길게 뻗어 있다

 

    

용바위에서 바라본 원효봉

 

  

용바위에서 바라본 원효봉

 

      

탑 너머 멀리 노고산이 바라보인다

 

  

거북바위

 

      

평평한 거북바위 등

 

     

거북바위 등에서 바라보이는 원효봉 사자바위

 

    

수각(水閣) 속 바위에는 천년을 이어온 석간수(石間水)가 끊임없이 솟아나 흘러 넘치고 있다

 

대서문(大西門)

대서문은 의상봉과 수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문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 이다.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육축부의 서쪽에는 성벽을 약간 밖으로 내어 쌓았다. 현재의 문루는 195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벌린 용머리 누혈(漏穴)을 바라보며 성문에 들어서 문루에 올라 바라보니 원효봉 사자바위가 실감나게 보인다.

 

 

성벽과  대 서문의 옛 모습 뒷편으로 원효봉 백운봉 만경봉이 보인다

 

   

대서문

 

    

대서문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다

 

  

문루의 배수시설 용머리 누혈 (漏穴)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

 

       

실감나게 보이는 원효봉 사자바위

 

   

약사여래불이 있는 무량사(無量寺)

조선조 고종의 후궁인 순빈 엄씨는 지금의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과 산신탱을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영친왕 이은이다.

이로 인하여 이 절 무량사는 순빈의 원당이 되었다.

북한산성 축성과 방어를 위하여 건립된 승영사찰은 아니지만,  1900년 전후에 제작된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어 경기도 전통사찰

1호로 지정되었다.

약사전 뒷편에 약수가 있어 약수암이라고도 한다.

 

약사전 주련에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찬탄하는 게송이 걸려 있다.

약사여래불은 동방만월세계의 부처이다.

왼손에는 약병을 들고 모든 중생들의 질병과 재앙을 소멸해 주며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다.

 

十二大願接群機

一片悲心無空缺

凡夫顚倒病根深

不遇藥師罪難滅

열 두 가지 큰 원력으로  갖은 중생 건지시고
중생 향한 자비심에 모자란 것이 전혀없어라.
어리석은 중생은 제자리를 잃어 병의 뿌리 깊었으니
약사여래 못 만나면 죄 면하기 어려워라.

 

 

무량사 전경 뒤편으로 의상봉이 바라 보인다

 

    

약사전 주련

 

     

약사여래불좌상

 

   

큰 바위 아래 약수 가 솟아난다.

 

     

미 륵불

 

    

무량사에서 조망되는 원효봉 백운봉 만 경봉 노적봉

 

 

중성문(中城門), 중성 암문, 중성 수문지

보리사 입구에는 350년 수령의 향나무가 푸른 향을 내뿜고 있다. 

산성 계곡을 따라 오른다.

돌로 다듬은 둔덕 길 위로 중성문이 바라보인다.

중성문(中城門)은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의 협곡에 쌓은 중성(重城,中城)에 설치된 성문이다

대서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지역이 평탄하여 적의 공격에 취약한 구역이라 이를 보완하기 중성을 쌓았다.

이 중성의 축성은 숙종37년(1771년) 당시의 판부사 이이명이 주청하여 이듬해부터 시작하여 숙종 40년까지 순차적으로 쌓은 것이다.

이이명의 주청 내용은,

"수구(水口)가 낮고 트인 곳에는 백제 때 양중성(兩重城)의 터가 있는데 가까운 한 중성은 마땅히 쌓아야 할 곳이 수백 보에 불과하니 마땅히

총융청으로 하여금 영축하게 하고, 수구의 물이 흐르는 곳은 역시 높은 홍예문을 설치하여 그 위에 첩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의상봉은 매우 험준하기 때문에 수십보를 쌓지  못한 곳이 있으니, 마땅히 연결하여 첩을 설치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 중성에 행궁, 중흥사, 상창 등의 주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중성문 옆 계곡 암벽사이에 있던 수문은 1915년 여름 대홍수 때 터져 떠 내려 갔다.

계곡 건너편에는 시루떡 같이 차곡차곡 쌓인 암반 위로 쌓은 성벽이 보인다.

이 성벽은 기린봉 아래 북장대로 이어진다.

문루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처마 아래로 뿔같은 노적봉이 바라보인다.

뒤를 보니 중성문 여장 아래로 온통 빨간 열매로 뒤덮혀 있는 산사나무가 보인다..

중성문 옆으로 자그마한 암문이 하나 붙어 있는데 성안의 시신이 이 문으로 통과하였다 하여  시구문(屍柩門)이라 불렀다.

 

중성 수문이 있던 계곡으로 내려선다.

축성 당시 수문 성벽을 쌓을 지반을 확보하기 위해 큰 바위를 층층이 깎아 내어 계단처럼 조성해 놓은 흔적이 보인다. 

그 아래 쪽이 중성 수문지다.

중성 수문지 하류 계곡은 암반과 집채만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큰 바위들이 겹쳐저 만든 바위 굴안 암반 위로 흘러 내리는 물소리를 듣는다. 

오! 자연이 설하는 맑고 싱그러운 법음(法音) 아닌가.

문득 고개 돌려 계곡을 내려다보니 물가에 의상봉이 어리어 있다.

 

 

보리사 입구의 수령 350년의 향나무

 

     

중성문(中城門)

 

  

정면에서 바라본 중성문

 

                

중성 암문 성안의 시신이 이 문을 통과하였다 하여 시구문(屍柩門)이라 불렀다

 

 

중성문에서 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 옛 수구문 있던 계곡건너로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문루에서 바라보이는 노적봉

 

   

중성문에서 증취봉으로 이어지는 성벽

 

         

산사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었다

 

   

축성 당시 수문 성벽을 쌓을 지반을 확보하기 위해 큰 바위를 층층이 깎아 내어 계단처럼 조성해 놓았다.그 아래 쪽에 수문이 있었다

 

  

 

 

수구문 하류 계곡

 

  

암벽을 흐르는 물소리 들리는 바 위 동굴 안

 

 

 

   의상봉이 계곡물에 반영되어 보인다. 

  

 

이슬을 쌓아 만든 노적사(露積寺

  

용혈봉에서 바라본  노적봉(露積峰)과 노적사(露積寺)

 

  

노적동 계곡을 따라 걷는다.

옛길을 걷기 위해 노적교를 지나쳐  진국교를 건넌다.

 "구 진국사" 표지석이 있는 돌계단을 오른다.

 

돌길을 걸어 노적사로 향한다.

길 가 눈 높이로 수많은 법구(法句)가 줄줄이 걸려 있다.

절 입구에 당도하니 보림당과 종각  그리고 대웅전 처마에 에워싸인 노적봉이 보인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기유북한(記遊北漢)"에,

신사년 영조37년(1761) 9월 그믐, 문수문으로 들어가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안팎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 정자. 누각을

관람하고 산성의 서문으로 나왔다고 썼다. 

진국사에 대해서,

"鎭國寺. 背山映樓 崎嶇而北 三丈石 銘曰白雲洞門 循石路 到寺門 紅樹白石 壑而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하였다.

 

노적사의 옛 이름은 진국사(鎭國寺)다.

진국사(鎭國寺)는 1712년(조선 숙종 38년) 팔도도총섭을 지낸 계파 성능(桂坡 聖能) 스님이 북한산성을 축성 관리하기 위해 북한산성 내에 창건한

11개의 승영사찰 중 하나이다

성능의 <북한지>에는,

"진국사 . 노적봉 아래 중성문 안에 있는데, 85칸으로 승 성능이 창건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노적봉은 만경봉 서쪽에 있는데, 솟아 오를 듯 한 산봉우리와 뾰죽뾰죽한 바위의 형상이 노적가리와 같으므로 노적봉이라 부른다.

중흥동의 옛 석성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조선의 실학자 유형원은,

"북한산성은 삼각산 중흥동에 있다.  절정에 걸터앉고 둘러 내려와 계곡 어귀의 석문(石門)(; 暗門)에 이르러 끝났다.

주위가 9,400자이니, 곧 삼국시대의 북한산성이다.  세속에서 일컫기를 중흥동석성(中興洞石城)이라고도 한다.

성 가운데 산봉이 있는데 우뚝하게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마치 노적가리와 같아서 노적봉이라 한다."  하였다.

 

 후 언제인지 알수 없는 때에 소실되어 빈터에는 석축만이 남아 있었다.

1960년 무위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하여  옛 진국사 터에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창하고 노적사(露積寺)라 하였다.

동인 종후(東印 宗厚) 스님이 1977년부터 주지로 부임하여 줄곳 불사에 헌신하여 당우가 빼욱한 현재와 같은 도량으로 거듭 중창하였다.

또한 네팔의 팔탄타쉬 사원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모셔와 진신사리탑을 건립하고 당우를 적멸궁이라 하였다

경내에는 조선 숙종 때 진국사 창건 당시의 석사자상과 석축이 남아 있고 와편이 산재해 있어, 2001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뿔같은 노적봉(露積峰)이 절 마당으로 내려왔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노적(露積)은 감로(甘露)가 가득한 것을 뜻하니 노적봉은 "감로가 차곡차곡 쌓인 산봉우리"를 의미한다.

감로(甘露)란 불법의 가르침을 통해 얻어지는 오묘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노적봉을 뜰 안에 두었으니 오묘한 깨달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절이다.

 

적멸궁(寂滅宮) 주련을 읽어본다.

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體同

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解渺難窮

 

부처님께서 온 세상에 두루 계시니

삼세의 여래가 모두 한 몸이네

크나큰 원력은 구름같이 항상 끝이 없어라

넓디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여 끝이 없어라

 

문수보살을 태운 것으로 보이는 등에 말안장을 둘른 석사자상(石獅子像)이 이제는 진신사리탑을 지키고 있다.

불국사 조실이였던 성림 월산(聖林 月山) 스님 기념비문에는 그의 임종게가 새겨져 있다.

 

일생 동안 돌고 돌았지만

아직 한 걸음조차 옮긴 바 없네

본래부터 그 자리는

천지 이전의 것이었네

 

廻廻一生 未移一步 本來其位 天地以前

  

갖가지 표정을 한 오백나한상이 모셔져 있는 나한전

나한전(羅漢殿) 주련의 글씨가 담백하고 소박한 멋을 풍기고 있다.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옛 부처님 나시기 전에

한 원상이 있었으니

석가도 오히려 몰랐거늘

가섭이 어찌 능히 전할 것인가

어느 선방(禪房)에 온 듯하다.

 

돌아서서 나오는 길

바위 아래에 익모초가 보인다.

줄기에 잎이 마주 난 익모초가 잎겨드랑이에 연한 홍자색 꽃을 층층이 돌려가며 꽃을 피우고 있다.

 

익모초 구절초 피는 양지바른 곳
작은 샘물로 솟아나 찾아오는 텃새 철새
불러모으며
들릴 듯 말 듯 한 숨소리로
흘러 흘러가는 모습이고 싶었다
어느 곳까지 흘러갈 지 알지 못하지만
그냥 그렇게 떠나는
...

  <김명석의  "찬비'  에서 >

 

진국교(鎭國橋)

 

    

노적사(구 진국사) 오르는 돌계단

 

    

 

 노적사 중창비문

"이곳에 고대로부터 진국사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병난으로 소실되어 빈터만 남게 된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불자님돌이 힘을 모아

 본 사찰을 서기 1960년 단기 2504년에 중창하였다.   이에 그 공덕을 후대에 전하고져 이 비를 세운다."  서기1978년(불기2522년) 주지 박종후

  

보림당과 종각 그리고 대웅전 처마에 에워싸인 노적봉

 

   

대웅전의 편액은 성림 월산(聖林 月山 ) 스님의 글씨다

 

    

 

 

노적봉을 품에 안은 노적사

 

 

적멸궁

 

   

불상 대신 창문을 통하여 진신사리탑이 보인다

 

 

네팔의 팔탄타쉬 사 원의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옮겨 모신  진신사리탑

 

 

석사자상 <고양시 향토문화재>

 

  

등에 말안장을 덮고 대좌를 장방향으로 얹은 것이 문수보살님을 태웠던 석사자로 보고 있다.

 

 

성림당 월산 대종사 기념비

 

  

약병을 든&nbsp; 미륵불

 

    

약사불

 

   

나한전

 

 

나한전 주련

 

    

나한전 주련

 

      

극락전의 아미타불

 

       

바위 위를 덮어 동굴을 만들어 건립된 삼성각

 

      

삼성각 내부 :굴러떨어질 것 같은 바위 앞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익모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