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흥사의 산내암자 - 선지식의 향기를 찾아

2014. 8. 10. 12:48나를 찾아 걷는 길/雪嶽에 머물고 싶다

(5)  신흥사의 산내암자 - 선지식善知識의 향기를 찾아

         2014.7.31

 

 

大丘郡守於觀音寺盤松下請

 

太古身材獨屈蟠 淸風一葉一寒聲

 

先師面目今猶材 爲報時人洗眼看

 

 

옛 소나무 아래서 

 

억만 년 세월에 구부러진 몸이여

 

맑은 바람 한 잎에 차가운 한 소리여

 

옛 스승의 모습이 여기 있나니

 

마음의 눈을 씻고 분명히 보라.

 

 <眞覺 慧諶 >

 

9년의 침묵 속에 들어 있던 달마를 찾아온 혜가는 말했다.

 

 "제자는 오랫동안 배움을 구했으나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스승께서 평화가 없는 제자의 마음을 살펴주소서."

 

  소림굴의 어둡고 차거운 공기의 저 편에서 달마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그대의 아픈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마음의 평화를 주리라."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달마는 조용히 가르쳤다.

 

  "찾아질 수 있는 마음이라면 어찌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벌써 그대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느니라!"

 

황벽은 설했다.

 

 "선의 길을 가는 여러 벗들이여! 

 

  그대들이 마음의 근원적인 법칙(心法)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마음을 떠나서 허깨비 마음을 만들고 외부에서 붓다를 찾고자 하며, 

 

  정신적인 수행에 있어서도 번뇌를 낳는 형상의 노예가 되어 진리의 바른 길을 잃고 말 것이다. "

 

 

 "범부는 형상에 집착하고 도인은 마음에 집착한다.  형상과 마음에서 모두 벗어나야만 참된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의 집착에서 벗어나기는 쉬워도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空에 떨어져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空은 본래 空 그 자체도 없는 것. 오직 하나의 法界일뿐이다. "

 

 

임제는 설했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산승은 지금 무슨 가르침을 설하려 하는 것인가.  바로 마음의 근원적인 법칙을 설하려 한다.

 

  마음의 법칙은 형상이 없으나 순수하고 유연하게 온 누리를 관통하면서 그대의 눈앞에서 그윽하게 움직인다. "

 

 

 "선의 길을 가는 구도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진정한 견해에 대한 깨달음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산승은 지난날 계율에 대해서 마음을 두고 탐구했으며 경과 논을 연구하면서 많은 책을 찾아서 읽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세상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치료하는 약이요, 불법의 근본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언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일시에 다 던져버린 뒤, 바로 도를 묻고 참선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선문의 대스승들을 만나서 비로소 깨달음의 눈을 뜨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천하의 대선지식들의 견처를 꿰뚫어 보고 그 그릇됨과

 

  바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어머니가 낳아줌으로써 바로 안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각고분투하고 몸으로 부딪쳐 연마한 결과 하루아침에 투철히 깨달은 것이다. "

 

< 一指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서 >

 

 

적묵당을 뒤로하고 신흥사 경내를 벗어나 개울을 건너니 안양암이다.

법당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단출한 암자다.

인적 없는 고요한 법당 뜨락에 삼복염천의 뙤약볕이 내려 꽂히고 있다.

화단에는 활짝 핀 노란 원추천인국이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다.

 

안양암은 652년 향성사 창건 때 함께 건립된 암자로 당시 이름은 해운암海雲庵이었다.

그 후 빈터로 남아 있다가 1785년 준경선사가 백운동의 백운암을 해운암 자리에 옮겨 지으며 안양암이라고 불렀다.

안양암은 염불결사를 시작한 염불수행 도량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만해 한용운스님이 옥중에서 석방되어 한동안 이곳에서 요양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암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49년 비구니 이대덕 스님이 중창한 이후부터이며,

1969년 비구니 법지스님이 보수해 비구니 암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病愁  

靑山一白屋

人少病何多

浩愁不可極

白日生秋花

병든 근심 푸른 산에 흰 집 한 채

인적은 드문데 병은 어찌나 많은지

맑은 근심 끝이 없어

한낮에도 가을꽃 피어난다

<萬海 韓龍雲, 1879-1944 >

 

  

安養庵

 

 

  

안양암 법당

 

 

  

아미타 삼존불

 

 

  

안양암 요사채

 

 

포장된 도로가 끝나고부터 내원암골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요란하다.

암자 가는 길은 호젓한 산길이어야 느낌이 산다.

이곳은 길도 잘 다듬어져 있고 울산바위 가는 산행길인지라 빈번한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길이다.

적송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음식점에 들어 산채비빔밥을 주문하고 흐르는 땀을 닦는다.

정오를 훨씬 넘은 시각에 조반을 든다.

 

내원암 가는 길에는 마멸된 석종형 부도 2기가 보이고, 내원암 들어가는 갈림길 전에 석종형 부도 5기가 또 보인다. 이 부도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긴 세월 풍우에 마멸되어 경봉당. 선봉당 2기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옛 스님 忽然히 어디로 가셨소

 

風雨千年에 흐트러진 부도여

 

千年星霜에 퇴색한 부도여

 

雪嶽苦行 나그네 눈물아니 흘리리

 

 

 

석종형 부도 2기

 

 

  

석종형 부도 5기  -   내원암 중창에 힘쓴 경봉당과 선봉당 등의 부도다

 

 

                              

  

내원암과 계조암 가는 갈림길에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보인다.

꼬마 다리  해탈교를 건너니 빗돌이 서 있다.

오른쪽 빗돌에 일필휘지의 '內院庵'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국이 핀 언덕 위로 관세음보살입상이 바라보인다.

암자 오르는 호젓한 길을 걸어 돌계단을 오르니 큰 나무가 서 있는 넓은 마당에 내원암  편액이 걸린 법당이 보인다.

그 옆으로 오동나무 한 그루 우뚝 서 있고  뒤쪽으로 하얀 울산바위가 바라보인다.

왼쪽 산기슭 언덕 위 앙증스러운 산신각도 보인다.

 

법당. 요사채. 산신각만 암자지만,

이곳은 신라 고 자장율사가 창건한 능인암이 있었던 곳이고, 이후 의상대사가 중창한  禪定寺가 있던 곳이다.

원효조사, 봉정선사 등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구법을 위해 수행 정진한 곳이었으며, 천 년 향화가 끊이지 않은 선지식의 향기가

어린 곳이다.

 

요사채 옆의 돌확에는 맑은 물이 넘쳐흐른다.

돌 위에 '洗心水'라 새겨 놓았다.

맑은 물을 표주박에 떠 마시니 머리가 쇄락해지며 마음의 번뇌가 씻기는 듯하다.

 

세심수 감로찬

이 산에 솟은 감로수를 다기물로 받아놓고

스님들 대여섯 명 도담으로 지내는데

먼 사람들 이 소식 듣고 표주박 들고 와서

저마다 달 덩어리 하나 떠 마시고 가는구나

 법당에 들어 아미타부처님께 삼배한다.

 

아미타불좌상 좌우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다.

내원암 뜨락을 거닐며,  天吼山 하얀 암릉을 바라보며,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를 念佛한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 본래적

무명무상 절일 체 증지소지비여경

진성심심 극미 묘 불수자성수연성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

 

 

입구에 들어섰을 때부터 내원암을 떠나갈 때까지 절 마당 둘레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눈 푸른 납자衲子가 있다.

뙤약볕 속에서 行禪修行 중인가 보다.

 

法性偈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以多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습이 아니고   모든 법 부동하여 본래로부터 고요하네

 

이름이나 모양 없고 일체가 끊어지니   증지로써 알 뿐 다른 경계가 아니어라

 

참 성품은 깊고도 미묘하여   자성이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하나 가운데 여럿이고 여럿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이라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이 들어 있고  일체의 티끌도 또한 그러하네

 

한량없는 시간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세월이다

 

엿과 지금이 같이 있으나   어지럽지 않고 제각기 이뤄지네

 

처음 발심이 곧 깨달음이요   생사열반이 언제나 한 몸

 

이치와 현상이 밝고 분별없어   모든 부처와 보살의 경계라

 

능히 해인삼매에 들어   부사의 도리 마음대로 나투시니

 

감로법우가 허공에 가득하여   중생의 근기 따라 이익을 얻음이다

 

그러므로 행자는 근본에 돌아가   망상을 쉬지 않을 수 없고

 

참된 방편으로 여의를 잡아  분수 따라 돌아갈 자량을 얻네

 

한량없는 보배 다라니로   법계도량을 장엄하고

 

마침내 실제의 중도자리에 앉으니   예로부터 부동하여 부처라 이른다

 

(註)法性偈는 광대무변한 화엄세계의 핵심을 210자로 압축해 그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의상 대사는 통일 신라 시대 해동 화엄종의 초조다.

젊은 시절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화엄종 2조 지엄 스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화엄경〉80권을 다 배운 뒤, 화엄사상의 핵심요체를 함축한 법성게를 지어 스승에게 인가를 받았으며,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그려 게송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법성게는 해동화엄의 발원을 이루는 명문으로, 이후 한국불교가 화엄사상을 중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게송으로 여겨지게 됐다.

 

一然禪師는 義湘祖師를 讚한다.

잡목 헤치고 바다 건너 안개 티끌 무릅쓰고

지상사 문 들어가 좋은 보배 받았었다

찬란한 온갖 꽃이 바로 우리 고향이라

중난산 태백산이 다 같은 한 봄이다

 

652년 자장율사가 향성사와 함께 창건할 당시 명칭은 능인암이었다. 698년 화재로 소실되고 701년 의상대사가 중창한 후 선정사禪定寺라 하였다.

1642년 화재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1644년 용암스님이 선정사터에 암자를 짓고 내원암이라 하였다. 스님은 내원암에서 40여 년을 주석하였다. 그 후 내원암이 1860년에 화재로 불타자 혜봉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882년 경봉勁峰스님이 독성각을 지었으나, 1885년 다시 소실된 것을

경봉勁峰스님이 중건하였다. 예전 내원암은 비구니 도량이었다. 1914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도하던 김수영金壽永스님이 이곳이 자장과 의상의 법맥을 이은 연혁이 깊은 곳임을 인식하고 개인 재산으로 선원을 불사했다. 1936년 또 한 번의 화재로 내원암 전체가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법당과 요사채, 좌우 한 칸의 산신각만을 갖춘 조그만 암자로 남았다. 내원암內院庵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꼬마 다리 해탈교

 

 

  

內院庵 표지석

 

 

  

관세음보살 입상

 

 

  

 

 

아미타불좌상  좌우로 연꽃이 장엄되어 있다

 

내원암 편액

 

 

 

법당 너머로 하얀 울산바위가 보인다

  

돌확으로 물이 흐르는 洗心水

 

 

  

세심수 감로찬 비

 

 

 

산 신각 전경

 

 

  

山神閣

 

 

계조암 오르는 길에는 둥글둥글한 미려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돌계단을 오르니 둥글둥글한 바위. 평평한 바위. 집채만 한 바위들이 옹기종기 온통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울산바위가 계조암석굴 위로 올려다 보인다.

繼祖庵은 天吼山(울산바위) 아래에 있는 암자로, 울산바위를 병풍 삼아  앞쪽으로 권금성과 달마봉을 바라볼 수 있다.

 

계조암은 신라 진덕여왕 6년(서기 652년)慈藏律師가 건립하였고, 또한  이곳에 머물면서 향성사와 능인암을 창건하였다.

일명 목탁바위라 불리는 계조암 석굴에는 본시 신라 애장왕 당시 洞山.覺智.鳳頂 세 조사가 수행하며 설법하였던 곳이고,

그 후 慈藏律師, 元曉大師, 義湘祖師에게 계승되었다 하여 繼祖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慈藏律師(590-658)

소판 김무림의 아들로 속명은 善宗郞이다. 그의 아버지는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내놓아서 法海의 津梁으로 삼겠습니다"라고 빌며 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천성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학문을 좋아했다.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처자를 뒤로하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枯骨觀을 닦았다.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쳤다. 왕은 재상의 자리에 그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왕이 명을 받지 않으면 목을 베라고 하였지만 그는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吾寧一日持戒死 不顧百年破戒而生"고 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636년(선덕여왕 5)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 청량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7일 기도 후 꿈에 대성이 나타나 四句偈를 주었다. 이튿날 한 승려가 金點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발우 한 벌, 佛頭骨 한 조각을 가지고 와서 "일체의 법은 모두가 자성이 있는 바 없다. 法性을 이렇게 깨닫는다면 곧 노사나불을 보게 되리라"라고 사구게를 번역해 준 다음 가사 등을 주었다. 오대산은 일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거주하는 곳이니 문수보살을 친견하라고 하였다. 그 뒤 장안에서 설법하였으며, 중난산 운제사의 동쪽 산기슭에서 3년간 수도하였다.

643년 입당구법한 지 7년 만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선덕여왕은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고 大國統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통도사를 창건하여 金剛戒壇을 쌓았다. 元寧寺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을 천명하였고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하였다. 645년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 당시의 국난을 극복하고 삼국통일을  염원하였다. 그는 신라야말로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 믿었으며, 신라야말로 불국토라는 것을 믿고 강조하는 독특한 불교관을 낳았다. 이러한 사상으로 명산의 봉우리마다 불보살의 명호가 붙고, 그곳에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신라인 특유의 산악숭배가 불교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자장율사는 신라 10聖의 1人으로 추대되어 흥륜사 금당에 모셔졌다. 스님은 노년에 경주에서 벗어나 강릉에 水多寺를 세우고 수행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스님이 세운 절과 탑은 1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저서 역시 적지 않지만, 현재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일본 승려 약충의 '法事讚私記'중에 자장스님의 '阿彌陀經義記'에서 따서 옮긴 구절이 있을 뿐이다.

 

舍利讚

三界輪王萬法主

鶴林晦跡幾千秋

唯有眞身舍利在

普使群生禮不休

삼계의 전륜성왕, 만법의 임금

학림에서 자취 감춰 몇 천년인고

오직 진신 '사리'만이 여기에 있어

중생들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시네

 

<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

靑山疊疊彌陀窟

滄海茫茫寂滅宮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의 굴이요

망망한 큰 바다는 적멸의 궁전이다.

< 이 시를 香山居士 白居易는 원효元曉 ,617-686의 悟道頌이라 했다 >

 

 

쌍룡바위를 지나 '神通第一羅漢石窟' 편액이 걸려 있다. 

석굴 입구 시원한 감로수를 마시고 바위 위를 바라보니 나반존자상이 보인다.

둥글둥글한 목탁 바위의 석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석굴 안은 넓기만 하다.

서늘한 기운이 바위에서 뿜어져  나온다.

아미타불좌상이 중앙에 모셔져 있고 그 뒤 석벽 둘레로 오백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삼성각 난간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바위들이 하나 같이 미려하다.

키 큰 전나무 뒤로 각이 지지 않은 모서리에 바닥이 평평하고 미끈한 바위가 유독 눈에 뜨인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이 반석은 100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하여 식당암食堂岩이라 한다.

식당암 왼쪽 모서리에 둥그런 바위가 얹여 있는데 우각석牛角石이다.   일명 흔들바위(動石)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우각석을 힘껏 혼자 밀어보니 약간 움직인다.

여러 사람이 같이 밀어보아도 역시 약간 움직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牛角石은 원래 두 개가 있었는데 불교의 영기가 넘쳐흐르는 것을 시기한 풍수지리가가 한 개를 굴려

떨어뜨렸다고 한다.

 

식당암 표면은 온통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아니 계조암 곳곳의 모든 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남명 조식은  '遊頭流錄'에서,

"높은 산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준다면,  십 층의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것이다.  바다와 산을 3백 리 길이나 유람하였지만, 오늘 하루 사이에 세 군자의 자취를 다 보았다.

..

또한 산속에서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세 군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만고에 전해질 것이니, 어떻게 바위에 이름을 새겨 만고에 전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라고 적어, 훌륭한 학문과 인품의 자취로 이름을 만고에 전해야지,  어찌 바위에 이름을 새겨 만고에 전하고자 하는가? 고 질책하며 개탄하였다.

 

계조암 입구

 

 

  

계조암 목탁바위 석굴 뒤로 울산바위가 보인다

 

 

 

감로수

 

 

  

나반존자상

 

 

  

석굴 법당에 있는  아미타불좌상과 오백나한

 

 

 

  

삼성각

 

 

  

牛角石 -  일명 흔들바위(動石)

 

 

  

食堂岩 과 牛角石

 

    

평평한  식당암에 빼곡히  새겨 놓은 이름들

 

 

  

목탁바위에 새겨 놓은 이름들

 

 

  

바위에  빼욱하게 새겨 놓은 이름들

 

 

  

식당암 앞의 전나무

 

 

울산바위에 오르다

 

설악산 울산바위  명승  제100호

 

병풍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화강암체로서 모두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부에는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 5개가 있어 근경이 훌륭하며, 시각적 풍경뿐만 아니라 예부터 ‘큰 바람 소리가 울린다’는 의미에서 ‘천후산’이라 불리고 있어 청각적 감상도 기대할 수 있는 곳이다. 울산바위는 그 자체로도 명승적 가치를 지니지만 원경도 빼어나 특히 미시령 옛길 방면에서 보이는 경치가 웅장하고 탁월한 느낌을 준다 울산바위에 대해서는 주세붕, 최연, 허적 등 조선시대의 수많은 문인들이 그 웅장함과 훌륭한 경치를 노래하였다. 울산바위 아래에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유서 깊은 계조암과 신흥사가 있어 문화적 의미가 더하며, 수많은 고시문이 전하며, 김홍도가 그린 실경산수화도 여려 편이 남아있어 미술사적 명승의 가치가 있다. 화강암의 독특한 풍화양상으로 만들어진 기암절벽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이로운 자연경관의 하나이며 속초를 중심으로 동해안에서 바라보는 울산바위는 그 특유의 기복이 심한 산형이 주변의 다른 산체들과 비교되어 더욱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울산바위는 그 자체가 가지는 명승적 가치와 더불어 빼어난 조망점의 가치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설악산은 한반도 남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화강암 지형 중 가장 높은 고도를 보이는 곳으로, 특히 울산바위는 절리를 따른 풍화와 잔류 암체의 지형을 잘 보여준다. 울산바위 아래의 계조암과 흔들바위 등지에서는 미립적인 풍화에 의한 타포니와 토르 같은 아름다운 미지형들도 나타난다.   < 문화재청 >

 

계조암을 뒤로하고 뙤약볕이 쏟아지는 무더운 산길을 오른다.오른다. 첫 전망 바위에 오른다.

멀리 화채봉 대청봉 중청봉 공룡능선 황철봉이 조망된다.

소나무 푸른 숲 너머로 울산바위 암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울산바위(蔚山岩)는 해발 780m  30개의 암봉으로 이어진 전체 둘레가 4km이다.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이 바위산은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면 산 전체가 울려 흡사 산이 울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 일명 천후산天吼山이라고도 한다.

 

천후우 울음

-山詩 4   이 성 선

 

저녁 산에서

소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

고개를 돌리니

 

수천 마리 소가 등을 맞대고 가는

산능선들 가운데서

달마가 天吼牛를 몰고

하늘로 향하고 있다

 

우주 앞에

구름 옷 벗어버리고

막 새로 태어나는 설악산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철계단을 오른다.

파란 하늘엔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바위에서 내뿜는 뜨거운 열기와 하늘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부딪혀 몸에서는 폭포처럼 땀이 흘러내린다.

기이한 암봉, 푸른 바늘잎을 단 붉은 소나무, 피어오르는 흰 구름, 저 멀리 바라보이는 대청. 중청. 공룡능선. 세존봉. 황철봉 등등...

눈 맛으로 머리가 쇄락해진다.

 

비 온 뒤 

비 온 뒤의 봄산은 물결처럼 굽이치고

그 파란빛 사이사이 흰구름 가네

흰구름 흩어지면 산봉우리 드러나

산 넘어 산, 산이요 그 너머 또 산, 산이네

   < 眞覺 慧諶 >

 

신비스러운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 파여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선계에 오른 듯하다.

정상 암봉이 지호지간이다. 

울산바위 정상에 오르니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민  박 
 이 상 국

울산바위 꼭대기에는
별들의 집이 있다

어느 날 집 떠나
해 지고 어두우면

그곳에 가 자고 싶다

 

 

울산바위 암릉

 

 

 

첫번째 만나는 바위 전망대

 

 

  

암벽 등반(rock-climbing)을 하고 있다

 

 

  

계속 이어진 철계단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다

 

 

  

적송 너머로 멀리 세존봉이 보인다

 

 

  

대청봉 중청봉 그 아래로 공룡능선이 보인다.  천불동과 세존봉이 바라보인다

 

 

  

기이한 암봉

 

 

  

기묘한 암봉

 

 

  

정상에 오르는 철계단과 바위 틈에 자라는 소나무

 

 

 

푸른 바늘잎을 단 붉은 소나무 너머로 화채봉 능선과 천불동이 보인다

 

 

 

울산바위 암봉

 

 

                                                                                                 

기이한 바위 너머 대청, 중청, 공룡능선, 세존봉이 바라보인다

 

 

  

울산바위 정상

 

 

  

울산바위 정상에서의 조망

 

 

 

 

울산바위 정상 아래의 조망대가 보인다

 

 

  

기이한  바위 들

 

 

  

정상 아래의 조망대 -  항아리 모양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정상 아래의 조망대에서의 조망

 

 

  

정상 아래의 조망대-  신비스런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 파여 있다

 

 

하산하여 신흥사를 거쳐 극락교를 지나 세심교를 건넌다.

빗방울이 '후드득'하고 한 번 떨어진다.

멀리 천불동 쪽을 바라보니 하얀 비가 묻어오고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서둘러 통일대불을 지나 설다원雪茶院 처마 밑에 들어서니 천둥 번개가 친다.

산이 울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며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

어느 듯 길은 도랑되어 물이 질펀히 흐른다.

처마의 落水가 튕겨 바지 깃을 적신다.

 

  

비 오는 날, 하나 

어제부터 줄곧 장대비가 오고 있네

걸어가려도 배를 타려도 이 모두 불편하니

저 비에 몸을 적시지 않으려거든

이 방안에 넉넉히 앉아 있게나

 

人雨示衆 

昨朝今日雨連連 陸步船行總不便

要得渾身都莫濕 錚如屋裡坐安然

<眞覺 慧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