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설악 대청봉

2014. 6. 27. 11:21나를 찾아 걷는 길/雪嶽에 머물고 싶다

(1)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설악 대청봉

     2014. 6.15

  

大靑峰

 

대청봉 정상 모습

청봉에 올라 서니

청봉은 되레 어디로 가고

동해만 바라 뵈네

예가 지금 어디멘지!

멍하니 어리둥절해

장승처럼 섰소이다.

 

청봉에 올라 서니

이윽고 눈물이 돋네

즐거운 강산을 찾아

그대 왜 슬프다는가

강산에 호소하는 심정

이 나라 사람이면 아시오리다.

 

청봉에 올라 서니

남북강산 느끼 워라

뒤로는 백두 금강

앞으로는 태백 지리

이게 다 내더라시네라시네

한 가슴에 않았소 그려.

 

청봉에 올라서니

막혔던 가슴 열리는구려

마음의 제단 위에

불을 다시 밝혔거니

우리 님 훤하신 얼굴

저만 바라고 사오리다.

 

청봉에 올라서니

샘처럼 기운이 솟네

이 힘 가지고

내 갈 길 가야겠네

민족의 세례를 받고

새 몸 되어 내립니다.

- < 이 은 상 >

 

"행장을 어지러 놓은 채 책상을 향해 잠깐 멍하니 앉았다 말고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홍조鴻爪' 두 자입니다. 기러기가 멀리 가면서 발톱으로 눈 위에 자국을 내어 제 지나간 곳을 기표해 두어도 뒷날 다시 와 보면 그 눈은 다 녹고 발자국은 스러져 어딘지 알 길이 없는 것이라 옛사람이 일찍 인생의 자취 없음을 일러 '기러기 발자국'에 비겨 말했습니다. 이제 저 '설악' 명산을 찾아가는 나도 어리석어라 한 개 '홍조鴻爪'의 나그네가 아니오리까. 그러면 누가 내게 물을 것입니다. '자취 없을 걸음을 왜 짓는 거냐'라고.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머물러 있어도 또한 그 자취 없는 것이라면, 가고 오는 것을 그 누가 구태여 묻고 대답할 것입니까. 다만 나와 함께 저 강산이 여기 있고 또 강산과 함께 내가 여기 있어, 나날이 나는 저를 그리고, 철철이 저는 나를 불러,  이제 내가 가는 곳이 강산이요, 강산으로 가는 자가 나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다시 더 다른 무엇을 이야기할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누가 내게 다시 묻기를 '어리석다. 강산 곧 자연이 따로 어디 있느뇨. 네가 눕고 앉는 곳이 다 강산이어늘,  구트나 무슨 일로 설악만을 찾아가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여기서 설악 찾는 까닭을 구트나 말해야만 하겠습니까.

 

예, 설악

저 관동의 설악을 찾아가 그 빼어난 봉오리를 기어오르고, 그 맑은 못물을 굽어도 보며, 무지개 어린 긴 폭포 아래서 두 귀를 씻고, 유리 같은 반석 위에서 노래를 읊어, 갇혔던 내 영혼을 해방하고 향불 끊인 내 마음의 제단에 분향하며, 말랐던 생명의  샘을 다시 파서 재생의 은혜를 입자 함도 한 까닭이옵고, 티끌 번뇌를 바윗굴 저녁 구름에 날려 보내고, 중생의 죄업을 절간의 새벽 종소리에 훌쩍 벗어나 먼지를 떨어 버린 경지를 잠깐이나마 얻어보자 함도 한 까닭이옵고, 거룩한 대사들의 고행하고 도 닦던 일을 듣고 생각코, 매월梅月과 삼연三淵의 눈물 흔적을 보고 만지며, 거기 내 마음의 외로운 그림자를 비치어 보고, 깊은 정한을 마주 붙여서 그분을 앙모하는 그 앙모로서 내 영혼의 참모습을 앙모할 수 있기까지에 이르러야겠고, 그분들을 위로하는 그 위로로 내 영혼의 위로를 삼자 함도 한 까닭입니다. 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설악은 우리 옛 조상들의 오랜 숭배를 입어온 신령한 산, 거룩한 지역이라 후세에 끼쳐진 한 자손이 찾아가 그 영적靈跡을 더듬고 활력을 얻어 '조선'민족정신을 재인식하자, '조선'민족 신념을 재수립하자, '조선'민족 문화를 재건설하자 하는 거기에 더 큰,  더 깊은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렇듯이 이름 높은 승지를 사람마다 순례하는 건 그만두고라도, 조그마한 기행문 하나 끼친 것 없는 걸 헤아릴 때, '우리의 산악 순례에 대한 열성이 이렇게도 없구나, 우리네의 산악 순례를 위한 여유가 이렇게도 없구나' 하는 탄식과 아울러 얼른 이 기회에 내가 한 번 대답하고 나선 것도 한 까닭입니다. " < 鷺山 李殷相의 '雪嶽行脚'에서 >                              

  

鷺山 李殷相은 1933년 설악산을 踏破한 기행문인 '雪嶽行脚' 가슴을 설레게 한다.

'行脚'이란 의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修行함'을 뜻한다.

鷺山은 설악산 답파를 '雪嶽行脚'이라 하였으니 遊山이 아닌 修行임을 분명히 하였다.

 

문득 설악의 높고 깊은 골로 들어서고 싶다.

한계령 서북능선을 걸어  대청봉에 오른 후,  첨봉으로 이어진 공룡능선을 넘어 마등령에서 금강문을 들어서서 

석가여래(세존봉)를 보고 싶다.

장군봉의 원효굴, 비선대의 玉流,  내원암 계조암에 머물며 수도한 고승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며 산내 암자의 목탁소리 

염불 소리로 세속의 번뇌를 씻어 보고 싶은 마음이 벼락같이 일어 배낭을 꾸려 속초행 버스에 오른다.

 

06:30분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2시간 10분 만에 한계령에 도착한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108 계단을 오른 후,  위령비를 지나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른다.                        

수 없이 많은 기이한 바위 봉우리를 보노라 발길이 자꾸 멈춰진다.

몇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선 뒤,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올라 땀방울이 흘러내릴 무렵 서북능선 위에 선다.

  

위령비

 

기이한  바위 봉우리

 

 

대청봉을 향하여 서북능선 길을 오르내리며 걷는다.

능선 길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눈에 익은 주목이 보인다.

수줍은 듯 숲 속을 밝히고 있는 인가목 연한 분홍꽃이 보인다.

이곳저곳에서 금마타리가 노란 꽃을 피워내고 있다.

모든 식물은 자기가 꽃을 피울 때를 알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 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풀이 지닌 특성과 그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생명의 신비를  꽃피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옛 스승 임제 선사는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라.

아름다움이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가 그만이 지닌 특성의 아름다움이다."

法頂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서 >

 

서북능선 길을 지킼고 서 있는  주목

 

 

수줍은 듯 숲 속을 밝히고 있는  인가목 ( 민둥인가목) 연한 분홍꽃

 

금마타리 : 마타리가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데 비해 금마타리는 고산지대에 자란다. 뿌리에서 된장 썩는 냄새가 난다고 해서 똥을 뜻하는 옛말 '말'에 줄기가 길어 '다리' 같다고 해서 말다리가 되었다가 마타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마치 줄기가 말의 다리같이 생겼다 하여 말다리로 부르다 마타리로 바뀐 것이라고도 한다. 등산 중 장이 썩는 듯한 악취가 나면 금마타리의 뿌리에서 나는 냄새다. 한방에서는 이 뿌리를 패장이라고 부르며, 약재로 사용한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나무 아래 돌덩이에 앉아 물을 마신다.

청아한  산새 소리에 고개 들어 위를 바라보니 산새는 보이지 않고 나무 잎새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나무 숨결 소리가 들린다.

벌레들이 기어간다.

 

靑山白雲圖  /  신석정

 

이 투박한 대지에 발은 붙였어도

흰 구름 이는 머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사는 산

 

언제나 숭고할 수 있는 푸른 산이

그 푸른 산이 오늘은 무척 부러워

 

하늘과 땅이 비롯하던 날 그 아득한 날 밤부터

저 산맥 위로는 푸른 별이 넘나 들었고

 

골작에는 양 떼처럼 흰구름이 몰려오고 가고

때로는 늙은 산 수려한 이마를 쓰다듬거니

 

고산식물들을 품에 안고 길러낸다는 너그러 운산

정초 한 꽃그늘에 자고 또 이는 구름과 구름

 

내 몸이 가벼이 흰 구름이 되는 날은

강 넘어 저 푸른 산 이마를 어루만지리......

  

나무 잎새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종덩굴

 

너덜길을 걷고 또 걸어 해발 1,604미터 높이의 끝청에 오른다

귀때기청봉, 그리고 멀리 가리봉과 주걱봉, 그리고 안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산 넘어 산 또 산......

겹겹의 산맥들이 누워 흐른다.

구름이 피어오른다.

 

 

 

 

 

 

 

 

 

끝청을 넘어 내려서니 중청과 대청이 봉긋하게 보인다.

우람한 잣나무

나무껍질이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

중청 오르는 길  자주색 꽃을 피운 수수꽃다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하늘 구름 바람 수수꽃다리......

바람결 따라 수수꽃다리가 일렁인다.

짙은 향이 코를 찌른다.

  

水流花開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 法頂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서 >

 

중청과 대청이 봉긋하게 부드럽게 보인다.
잣나무 껍질이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

 

 

수수꽃다리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머리에 이고 종일 걷는다.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에 항시 푸른 하늘 우러렀으매

이렇듯 마음 행복되노라

 

나종 죽어 서럽잖이 더욱 행복함은

하늘 푸른 고향의 그 등성이에

종시 묻히어 누웠을 수 있음이어라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란 시를 읊조린다.

 

중청 기슭에서 바라보니 대청봉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돌길을 따라 대청봉을 오른다.

하지가 머지않아 해는 길고, 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으니 마음은 여유로움으로 충만해진다.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 法頂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서 >

 

대청봉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鷺山은 대청봉에 오른 감흥과 감격을 '雪嶽行脚' 속에  '雲住峰의 구름'과 '다만 감격에 넘치는 최고봉'이라는 小題로 글을 썼다. 

 

雲住峰의 구름 

적막, 오직 적막일 것뿐인 이 청봉의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지금 내 심경은 다만 꿈속을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끝없는 시원을 느끼면서도 꿈같아서 깨고 싶도록 답답한 여기 영원한 평화를 맛보면서도 또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겨레로서의 아픔이 가슴을 눌러 주는 여기, 여기는 청봉의 고원입니다. 문득 보니 왼편 아래에 수 없는 旗幟槍劍을 휘두르는듯한 천불동의 바위들은 또 하나의 별세계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보다는 천불동의 오른편에 솟은 雲住峰에 구름 피어오르는 모양이 여기 이곳에서는 더 좋은 그림입니다. 이따금 거리에서 하늘에 구름 한 조각 떠가는 것을 우러러볼 적에도 감개에 빠지는 때가 있는데 하물며 구름이 피어 도는 신비한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지금이 오리까. 자연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구름입니다. 포구에 깔린 안개도 좋고, 나무에 걸린 새벽달도 좋고, 창에 부딪는 빗소리도 좋고, 어깨에 쌓이는 함박눈도 좋고, 이름 모를 들국화도 좋고, 구슬같이 맺히는 이슬도 좋고, 머리카락을 불리는 봄바람도 좋고, 우수수 흩듣는 나뭇잎도 좋고, 지는 해, 반짝이는 별, 성난 파도, 잔잔한 못물, 낮에 우는 뻐꾸기, 밤에 우는 기러기, 빈 산에 툭툭 떨어지는 솔방울 소리, 마을에 뭉기뭉기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길 가에 흔들리는 백양목 큰 그림자, 돌 틈으로 새어 흐르는 시냇물 소리, 어느 것 한 가지에 내 마음의 사랑이 아니 가리까 마는 그중에서도 하나만 오직 하나만 가지라 하면 나는 구름을 가지렵니다. 구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구태여 그 까닭을 말하려고는 아니합니다. 사랑함에는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실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함에는 까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까닭도 없이 다만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그것이 더 진정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왜 구름을 사랑하는지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또 누가 설사 묻는데도 대답할 말이 내게 없습니다. 더구나 구름은 나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나는 구름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괴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슬픈 것이지도 모릅니다. 괴롭고 슬픈 것이기 때문에 더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 저 운주봉을 반만 가린 구름! 내가 보아 온 숱한 구름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미묘한 구름의 풍경! 여기서도 역시 저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은 지금 끝없는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구름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문득 보니 우리는 하청봉에 올랐습니다. 이 청봉은 상하 두 봉우리로 되었는데, 실상 그 높이로는 서로 얼마의 차이 밖에 안 됩니다. 상청봉 하청봉이 둘 다 금자탑의 형상과 같아, 마치 이집트에나 온 듯합니다. '하청봉 청봉이라'하고서 여기까지 오르고서도 상청봉은 못 올라보고 그냥 돌아가는 이가 있다는 것은 심히 섭섭한 말입니다. 대개 산악 답파의 욕심으로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요, 도 산악 순례의 정성으로도 상청봉을 올라야 할 것이어니와, 그보다도 진실한 청봉적 가치를 상청봉에 오리지 않고서는 이야기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어이 저 상청봉을 향해서 오릅니다. 반드시 거기 그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니다. 다만 감격에 넘치는 최고봉

 

하청봉에서 약 40분 만에야 상청봉에 올랐습니다.

최고봉 위에 오르기가 무섭게 그야말로 긴 바람 한 줄기가 간장 속까지 파고들어 옵니다.

봉 머리에 오르는 길로 벅찬 감격에 저도 몰래 '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윽고 바라보니 제일 먼저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동해입니다.  망망한 무변 대해를 바라보는 때에 물과 하늘 얼린 속으로 내 몸과 마음마저 따라 들어가는 듯 함을 느낍니다.

나는 지금 기쁜지 슬픈지를 모르겠습니다. 나 스스로 내 정을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청봉에 올라 서니

청봉은 되레 어디로 가고

동해만 바라 뵈네

예가 지금 어디멘지!

멍하니 어리둥절해

'장승'처럼 섰소이다.

 

저 해변 쪽으로는 왼편으로부터 거진, 속초진, 대포, 낙산, 양양, 강릉등 고을과 마을들이 줄지어 늘어섰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면 좋으련마는, 티끌세상 살림살이가 여기 와서까지 저렇게도 또렷이 보일 게 뭣이겠습니까.

이같이 높은 봉 위에 올랐건마는 신선이 되기는커녕, 인간의 번뇌가 가슴을 더 태우는 것을 어찌하리까.

왜 나는 이 상청봉의 장엄한 자연 속에서 눈물을 짓는 것입니까. 지금 이 순간 가슴을 메우는 내 슬픔 속에는 '나'된 슬픔도 있습니다. '우리네'된 슬픔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람'된 슬픔도 있읍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슬픔을 참지 못하여 위대한 자연 앞에 나와 '울음'으로 내 뜻을 표하는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청봉에 올라 서니

이윽고 눈물이 돋네

즐거운 강산을 찾아

그대 왜 슬프다는가

강산에 호소하는 심정

이 나라 사람이면 아시오리다

 

다시 서남쪽으로 조핏골 너머 향로봉!   그 가까이로는 오색령 백운동 뒷 봉우리들!  설악산 1만 봉우리들이 모두 다 무릎 아래 깔려읍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서북 사이 아득한 구름 밖에 높이 솟은 먼 산 봉우리 하나를 바라봅니다. 저것이 금강산 비로봉!   높이는 1,638미터. 여기 이 청봉의 높이는 1,708미터.  청봉이 약 70미터나 더 높은 셈입니다. 이 같이 두 봉우리가 서로 높이 솟아올라, '장군' '멍군'을 마지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설악산은 물론 백두산 큰 줄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설악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산맥이 오직 백두산으로서 조종을 삼는 것이요, 더욱이 南師古 같은 이는 육지에서 뿐 아니라 바닷속으로 뻗혀서 제주도 한라산과 일본 섬의 여러 산에까지 미쳤다했고, 이수광도 그의 지봉유설에 '이 말이 유리하다'하 하여 같은 의견인 것을 말했습니다.

......

 

산 마루에 높이 올랐을 때, 사람마다 그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저 홍진만장 속에서 헤매고 싸우는 현실 지옥의 비참한 창생을 생각함과 또 우리 자신의 환경과 운명을 생각함에는 거의 일치할 줄 압니다. 나는 지금 이 높고 엄숙한 지극한 곳에 올라, 저 구름 안개 아래로 천봉만학을 내려다보고 또 멀리 끝없이 열린 동해를 가슴에 안고 서서, 인간의 온갖 고뇌를 그야말로 테두리 밖에 나와 들여다보는 것 같아, 나 스스로를 훨씬 더 분명히 알고 또 가야 할 길을 훨신 더 또렷이 깨닫는 것입니다. 온갖 유혹의 '그을음'에 그을어 하마 희미해질 뻔한 내 지조의 거울을 이 '밝뫼'위에 올라 다시금 힘차게 불 붙입니다. 이 나라 사람으로서 달려 나가는 길에 무슨 험난이 있나 없나를 이 횃불로 비쳐 인제 주저 없이 갈 것입니다. 지금 멀리 내려다보이는 저 티끌 속의 세상!   저 속에서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우리들이면서 오늘도 또 무슨 일로 서로 다투며 시기하며 훼욕하며 음해해서야 될 일입니까. 어떤 처지에 있기에 서로를 등져서 될 일입니까. 보십시오. 현실의 고통은 얼마나 하며 정신의 번뇌는 얼마나 한지 생각할수록 애달프기만 한 형제, 내 자매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서 온갖 쓰라린 생각을 이 새로운 힘과 용기로 다 물리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이 청봉을 내립니다. 스스로 내 걸음, 걸음이 그 무슨 '광명을 향한 신조'를 분명히 지녔습니다. 의심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이 산에 들어왔던 최대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내 머리 위에 내린 민족의 세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청봉에 올라 서니

샘처럼 기운이 솟네

이 힘 가지고

내 갈 길 가야겠네

민족의 세례를 받고

새 몸 되어 내립니다.

 

중청대피소 앞에서의 조망

 

눈잣나무

 

대청봉 위로  뭉게구름 이 피어 오르고 있다

 

 

 

대청봉 오르는 길의 암괴와 뭉게 구름

  

대청봉 오르는 길의 하얀 돌비늘의 암괴들

 

 

마가목 흰꽃 너머로 공룡능선 천불동 울산바위 동해가 바라보인다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대청봉 정상

 

 

청봉에 올라 서니

청봉은 되레 어디로 가고

동해만 바라 뵈네

예가 지금 어디멘지!

멍하니 어리둥절해

장승처럼 섰소이다.

 

청봉에 올라 서니

이윽고 눈물이 돋네

즐거운 강산을 찾아

그대 왜 슬프다는가

강산에 호소하는 심정

이 나라 사람이면 아시오리다.

 

청봉에 올라 서니

남북강산 느끼 워라

뒤로는 백두 금강

앞으로는 태백 지리

이게 다 내더라시네라시네

한 가슴에 않았소 그려.

 

청봉에 올라서니

막혔던 가슴 열리는구려

마음의 제단 위에

불을 다시 밝혔거니

우리 님 훤하신 얼굴

저만 바라고 사오리다.

 

청봉에 올라서니

샘처럼 기운이 솟네

이 힘 가지고

내 갈 길 가야겠네

민족의 세례를 받고

새 몸 되어 내립니다.

노산의  '雪嶽行脚'에서

 

 

 

 

 

 

 

 

낙산 양양 강릉 등 동해가 바라보인다

 

 

소청봉 가는 길 섶에 수수꽃다리가 활짝 피어 있다.

맑은 향이 코끝을 찌른다.

수수꽃다리 너머로 대청봉이 보인다.

흰인가목도 피어 있다.

소청봉에 내려서니 부처바위에 둘러싸인 봉정암에서 성지순례 온 대중들의 저녁 예불 소리가 메아리 되어 설악골에 울려 퍼진다.

봉정암의 부처바위와 용아장성의 첨봉尖峰들이 합장하고 서 있는 듯하다.

  

공룡능선과 울산바위 천불동

 

 

봉정암의  부처바위와  용아장성 첨봉들이 합장하고 서 있는 듯하다

 

중청

 

수수꽃다리 너머로 대청봉이 보인다

 

  

 

흰인가목

 

 

소청대피소는 숙소와 화장실 취사장 취사수 등이 한 평면에 있어 편리하다.

새로 건립되어 깨끗한 소청대피소에 들어 도착 신고를 하니 "더운 날씨에 고생 많으셨다" 한다.

나이 들었다고 독방을 배정해 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

침상 위에 배낭 풀고 휴식 후 대피소를 나서니 장엄한 일몰이 진행되고 있다.

  

장엄한 배경

 -山詩 28 이성선

 

풀잎은 장엄하다

그 뒤에 일몰이 섰다

 

누군가 죽고

산맥이 엎드리고

 

밤이 돌아와 곁에

짐승처럼 눕다

 

소청대피소

 

 

소청대피소에서의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