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미산 세계의 환상 용장사 부처님

2012. 12. 31. 11:37문화유적 답사기/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을 찾아서

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을 찾아서

(3) 수미산 세계의 환상 용장사 부처님

     2012.11.29. 목요  흐린 후 맑음

 

삼국유사 흥법편(興法篇)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滅身) 조에서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후 서라벌 시가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寺寺星張 塔塔雁行 堅法幢 懸梵鐘" 절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하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늘어섰다.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梵鐘)을 달았다고 하였다. 또한 기이편(紀異篇)  진한 조에는, 49대 헌강왕 때에는 성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은 이웃과 서로 처마와 담이 붙어 있었고 노랫소리와 피리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여 밤낮을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화려한 서라벌, 그 둘레에는 많은 산들이 성채처럼 둘러막고 있다.

남산은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서 아주 가까운 웅장한 산으로 남쪽에 솟아 있다.

금오봉(金鰲峰 468m)과 고위산(高位山 494m)으로 이루어진 남산은 남북의 길이가 8km, 동서의 너비가 4km에 이른다.

남산의 서쪽 면을 서남산이라 부르고 동쪽 면은 동남산이라 한다.

이 산에는 선사유적, 고분, 성터, 절터, 불상, 탑 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역사의 산이고 유적의 산이다.

그래서 남산을 흔히 '신라문화의 보고' 또는 '불교유적의 노천박물관' 등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오늘도 멈추지 않고 삼국유사의 현장을 찾아 용장골로 향한다.

남산의 계곡 중에서도 가장 깊고 큰 계곡이 용장골이다.

용장사터와 관음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용장골 계곡 울퉁불퉁한 하얀 암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희디 흰 암반을 흐르는 맑은 물, 때로는 소를 만들어 나무도 담고  푸른 하늘도 담고 있다.

용장골 너른 암반 저 멀리 설잠교가 보인다.

 

계곡 가 평평한 바위에 올라 위를 올려다보니 높고 흰 바위봉 위에 하얀 삼층석탑이 푸른 하늘에 빛나고 있다.

아!  용장사 삼층석탑이다.

 

울퉁불퉁한 하얀 암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용장골

 

  

바위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용장골의 소

 

 

 

 

용장골 계곡 암반 저 멀리 설잠교가 보인다

 

  

흰 바위산 위에 하얀 삼층석탑이;푸른 하늘에 빛나고 있다.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의 골인 이곳 용장골은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7년간 은거하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등 많은 저작

(著作)을 하였던 곳이다. 또한 이곳에 머물 때 지은 시들은 매월당집에 유금오록(遊金鰲錄)이라는 제목으로 엮여 있다.

매월당은 책을 써서 석실(石室)에 넣어두고 이르길,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설잠교(雪岑橋)

그의 법명을 따 이름지은 다리를 건넌다

산길 여기저기 신우대가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대나무는 꼿꼿이 하늘로 뻗어 올라 올곧은 성품을 들어내고 있다.

선잠이 걸었을 그 금오 산록을 걷는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추세옹(贅世翁).

법호(法號)는 선잠(雪岑)이다.다섯 살 때 문리를 통하여 '오세'라 불렸다. 이색의 손자인 이계전, 권근의 문인인 김반, 그리고 윤상에게서 유학을 배웠고, 기화선사의 제자인 흥준상인에게 불교를 공부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21살 되는 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불사르고 머리 깎고 승려의 행색이 되어 9년간 전국을 방랑한다. 그가 31살 되는 해 봄 경주 남산 금오산 용장골에 산실을 짓고 7년간 은거한다. 그 뒤 일시 환속하여 안온한 생활을 꿈꾸었지만, 결국 세상의 그물을 벗어나 방랑의 길을 떠난다. 홍산 무량사에서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였으며, 민중의 삶에 깊이 동정하였다. 현전 하는 저술로는 '금오신화' '매월당집' 등이 있으며, 불교 관계 저술로는 '대화엄일승법계도주'  '십현담요해' 등이 있다. 

그는 용장골에 은거할 시 산실 뜰에 매화나무를 심어 매화의 달그림자가 창에 가득하였다 한다. 그래서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용장골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어라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앉았는데

깰 줄을 모르는구나 억새처마 밑에서

뜰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茸長山洞幽 不見有人來

細雨移溪竹 斜風護野梅

小窓眼共鹿 枯椅坐同灰

不覺茅畔 庭花落又開

 

그는 또 차를 재배하고 만들면서 禪茶一如의 선리(禪理)를 깨치며 살아갔던 茶人이기도 했다.

 

차를 기르다 -養茶 

해마다 차나무에 새 가지 자라는데

그늘에 키우느라 울을 엮어 보호한다

육우의 다경에는 빛깔과 맛 논했는데

관가에서는 어린 찻잎만을 바치라고 하네

봄바람 불기 전에 싹이 먼저 피고

곡우절 돌아오면 잎이 반쯤 피어나네

조용하고 따뜻한 작은 동산을 좋아하니

비에 옥 같은 꽃 드리워도 무방하리라

 

작설차 - 雀舌

남국의 봄바람 부드럽게 이르였는데

차 숲 잎새 밑에 뾰족한 부리 머금었네

연한 싹을 가려내면 아주 신령스레 통하는 것

그 맛과 풍류는 옛 홍점(鴻漸)의 다경(茶經)에 수록됐네

붉은 싹은 잎과 줄기 그 사이에서 뽑아낸 것

봉병(鳳餠). 용단(龍團) 차 이름은 그냥 모양을 본뜬 걸세

푸른 옥병 속에 넣어 타는 불로 달여낼 제

게 눈 같은 거품 생기며 솔바람 울리네

산당(山堂) 고요한 밤에 손들 빙 둘러앉아

운유(雲) 차 한번 마시면 두 눈이 밝아지네

당(黨)의 집서 조금 맛보니 저인 촌사람인가!

어찌 알리, 설다(雪茶)가 그처럼 맑은 것을

 

산속 은거 생활의 일면을 다음과 같이 읊기도 한다.

산우(山雨)

 

빈 산에 굵은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놀라 일어난 노룡 손톱과 꼬리 자라났네

작은 당에 편히 앉아 종일토록 자는데

처마에 뿌리고 남은 빗방울 선상(禪上)을 적신다

 

 

매월당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18세 때 모친의 3년 상을 송광사에서 끝내고 송광사에 주석하고 있던 흥준 준상인과의 만남을 통해 

불법을 배우며 불교의 선리(禪理) 등 정신적 감화를 받는다.

 

훗날 매월당은 "贈峻上人' 20 수를 짓는다.

차를 매개로 불도의 깊이를 더하고 차 한 잔을 통해 선가(禪家)의 정취와 깨달음의 실체를 얻는다.

'贈峻上人'의  20 수 중 일부를 옮겨 본다.

 

15.

반평생을 강해(江海)로 돌아 벗이 구름 같았네만

오늘 서로 만나니 도(道)의 맛이 참인 듯하여라

지팡이 날리며 혼자 가는데 못 속에 그림자 지고

평상 펼쳐 놓고 나뭇가에 한 몸 자주 쉬네

사천 권의 불경. 진언 가슴속에 남아 있고

백(百)하고 둘(二) 되는 산과 내 한 티끌로 변했네

기미(氣味)가 쓸쓸한 듯 함께 얘기할 벗 없는데

차 끓이는 냄비의 물 가늘게 소리 낸다

 

           17.

선(禪)의 관문(關門) 뚫으려고 갈등된 것 말하는데

벌려 있는 산봉우리 창인 양 층층이 푸르렀네

뿌리 찾아 꼭지 뽑는 것 그대 아는가, 모르는가?

잎새 따고 가지 찾는 건 나는 하지 못하네

약 방아 소리 속에 푸른 대 두드리고

차 냄비 그림자 속에 붉은 등 켜 놓았네

자연히 선가(禪家)의 취미 깨달아 알았거니

즐거이 옆 사람 향해 큰 법(上乘)을 얘기하네

 

선잠은 일곱 주 발의 차를 마신다고도 하였다.

 

閑中經數卷

渴來茶七梡

한가하면 경전 두어 권 읽고

목마르면 일곱 사발의 차를 마시네

 

칠완차(七椀茶)를 마신다는 것은 차를 마실 때 느껴지는 일곱 가지 변화를 말한다.

첫째 잔은 입술과 목을 적셔주고, 둘째 잔은 고민을 씻어주고, 셋째 잔은 무뎌진 붓끝이 풀리고,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이 솟아 평생의 불만이 사라지고,

다섯째 잔은 살과 뼈를 맑게 하고, 여섯째 잔은 신선의 영과 통하게 하고,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두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茶詩를 또 옮겨 본다

 

대 홈통 - 죽견(竹筧)筧)

대 쪼개어 찬 샘물 끌어 놓았더니

졸졸졸 밤새도록 울어대누나!

돌아서 오니 깊은 시냇물이 말랐고

나누어 내도 적은 구유 평평하다네

가는 소리 꿈과 섞여 목이 메고

맑은 운치 차 끓이는 데 들어간다네

찬 두레박 내리는 힘 허비하지 않고

은상을 백 척이나 끌 수 있다네

 

竹引寒泉

琅琅終夜鳴

轉來深澗

分出小槽平

細聲和夢咽

淸韻入茶烹

不費垂寒

銀床百尺牽

 

설잠교

 

  

 

 

여기저기;푸르게 자라고 있는 신우대

 

  

올곧게 뻗은 대나무

 

여기저기 푸르게 피어 있는 신우대와 올곧게 뻗은 대나무를 보다 산길을 오른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둘러쳐 있고 노송들로 에워싸인 곳에  세 개의 둥그런 반석 위 연꽃 대좌에 머리 없는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가의 대덕 대현은 남산의 용장사에 살며 그 절에 있는 미륵불상을 돌며 예배하였는데 불상도 또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하였는데  그 미륵불상이 이 삼륜대좌불이다.

古靑은 삼륜대좌불 하대석 위는 수미산 정상인 사왕천이고 세 개의 쟁반을 포개어 놓은 듯한 신기한 모양을 한 이 대좌는 차례차례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이라 생각하였고 도솔천에 미륵불이 계시어 많은 보살들과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였다.

 

암벽 뒤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삼륜대좌불이 마치 구름 속에 떠 있는 환상을 느낀다.

벽면처럼 둘러친 기암 위 높은 곳에 삼층석탑이 솟아 있다.

 

고청 윤경렬이 쓴 삼륜대좌불에 관한 글을 옮겨 본다.

"기슭에서 약 200m 솟은 바위산은 수미산이 되고, 자연석으로 된 기단석 위는 사왕천이 된다.

둥글고 넓은 첫째 원반석 위는 첫 구름층으로 도리천이 되고, 둘째 원반석 위는 야마천이 되며, 연꽃송이로 장엄한 셋째층은 미륵보살이 

계신 도솔천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 위 불정토의 모습을 지상에 실현하려 한 것은 삼국통일을 이루려 하던 신라 사람들의 꿈이었다.

거대한 자연 바위산은 창조주의 작품이다. 곱게 다듬은 대좌와 불상은 인간의 작품이다.

창조주의 작품과 인간의 작품이 연결되는 하대석을 창조주와 인간의 합작으로 하여 자연에 연결시켜 놓은 착상이야말로 자연을 숭배하는 

우리 조상님들의 크나큰 지혜가 아닐까!

이 석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 겹으로 핀 연꽃송이 위에 앉아계신 부처님과 대좌 위로 흘러내린 옷자락들이 아주 섬세하게 새겨져 인공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비해 기단에서부터 층층이 쌓인 기둥돌이나 원반석이 너무 소박하기 때문에 생기는 거리감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신경을 쓴 흔적을 볼 수 있다.

즉 북모양으로 된 기둥돌의 윤곽선은 직선으로 되어 하대석에 어울리도록 직선에 가깝고 2층 기둥돌의 윤곽선은 조금 더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3층 기둥돌의 윤곽선은 아주 원만한 곡선으로 되어 위의 연꽃이나 옷주름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다.

지금 이 불상은 머리가 없어서 부처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연꽃 대좌를 덮고 잔물결 치듯이 흘러내린 옷주름에서 무한히 밝고 즐거운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삼국유사  <현유가 해화엄(賢瑜伽 海華嚴)> 조에, 유가종의 개조 대현(大賢) 대덕은 남산의 용장사에 살고 있었다. 그 절에는 미륵불의 석조 장륙상이 있었는데 대현이 늘 불상의 주위를 돌면 불상도 또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총혜롭고 명변(明辨)하고 정세(精細)하고 민첩하여 판단과 분별이 명백했다..... 기린다. 남산의 불상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을 돌렸네 청구의 불교가 다시 중천에 높아졌구나 궁정의 솟구친 맑은 저 물이향연(香煙)에서 생긴 줄 누구가 알리

 

삼륜대좌불이 마치 구름속에 떠;있는 환상을 느낀다.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그리고 벽면처럼 둘러친 기암 위로 삼층석탑이 보인다

 

  

 

 

장곡 석조여래 좌불인 삼륜대좌불

 

  

하늘하늘 물결치듯 옷자락이 흘러내려 연꽃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

 

                            

삼륜대좌불 하층 기단은 커다란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데 거북이 형상을 한 듯하다.

 

삼륜대좌불 옆으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무심히 바위면을 바라보다 흠칫 놀란다.

바위 속에 계신 부처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석가여래(釋迦如來)!

넓게 핀 연꽃 위에 앉은 부처님은 하늘에 떠 있는 듯 환상적이 느낌이 든다.

 

연꽃  위에 촉지항마인상을 하고 결가부좌한 석가여래의 얼굴에서 온화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다.

반달 같은 눈썹, 예리한 콧등, 굳게 다문 입술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워 미묘하기까지 하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삼륜대좌불을 바라보기도 하고, 암봉 위의 삼층석탑을 바라보기도 한다.

 

수미산에 서서 시공(時空)을 넘나 든다.

아! 영고성쇠(榮枯盛衰) 제행무상(諸行無常)이여

석양이 소나무 가지에 걸렸다.

천산(千産)과 만산(萬山)을 모조리 밟고 나서

골짝 문을 굳게 닫고 백운으로 잠갔네

만송(萬松) 고개 위에 한 간 집을 지으니

중과 백운 서로 대해 언제나 한가하네

                  -  雪岑

 

"남산의 불교유적 중에서도 용장사지 및 탑상은 그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칠불암 석불, 탑곡 마애조상군과 더불어 남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산의 정상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산능선에 3층석탑, 삼륜대좌불,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목조건물은 능선 옆의 골짜기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대지위에 배치하였을 당시 용장사의 모습은 참으로 비범한 사관(寺觀)을 지녔을 것이라는데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뿐만 아니고 용장사는 대현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발전하였던 유가 법상종의 종찰로 짐작되는 사원이었고, 또 조선왕조 초기에는 김시습이

오래 머물면서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작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8세기에서 16세기말까지 연면히 산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곳이다.

이러한 사실은 용장사지에서 출토된 '元統二年(AD 1334) 甲戌三月日 茸長寺' 명 와편(瓦片)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오른쪽에 있는 '太平二年八月' 銘文을 통하여 서기 977년 또는 102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애여래좌상의 조성연대가 밝혀짐에 따라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남산 및 경주지역에서의 불교조상 활동이 연면히 이루어져 왔음을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박흥국의 '경주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의 명문과 조성연대'에서>

 

마애 석가여래 좌상(磨崖 釋迦如來 坐像)

 

  

넓게 핀 연꽃 위에 앉은 부처님은 하늘에 떠 있는 듯 환상적이 느낌이 든다.

 

 

반달같은 눈썹, 예리한 콧등, 굳게 다문 입술로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워 미묘하기만 하다.

 

 

연꽃 대좌의 정면 연꽃 잎은 크고 양옆으로 가면서 점점 작게 조각하여 끝에 가서는 구름같이 사라지게 하였다.

 

 

석양이 소나무 가지에 걸렸다.

 

울퉁불퉁한 길을 오르니 암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암벽에 걸려 있는 밧줄을 잡고 오른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또 한 번 가로막는 암벽의 밧줄을 잡고 오른다.

자연 암반 위에 쌓아 올린 삼층석탑이 석양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다.

석탑 뒤로 이무기 능선과 고위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높이가 4.5m에 불과한  이 자그마한 삼층탑이 참으로 장엄하게 보인다.

8만 유순되는 수미산을 하층 기단으로 삼았으니 그럴 법하다.

고위산을 바라보며 장엄하게 서 있는 용장사 삼층석탑을 언제까지나 바라본다.

 

영원한 신라인 고청 윤경렬은,

" 이 탑은 계곡에서 약 200미터나 되는 높은 바위산을 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충 기단을 쌓고 옥신과 옥개를 얹어 삼층탑을 쌓았으니 

하층 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되는 수미산이 되는 것이다. 바위산 산정은 사왕천이며 상층기단은 도리천이다.

그 위층들은 구름 위에 뜬 여러 부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높이 5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탑으로서 하늘 세계에 연결되는 크나큰 감격을 나타내었으니 이러한 아름다움은 재주로도 나타낼 수 없고 

힘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맑고 깨끗한 부처님 세계를 그리는 신앙의 정열만이 이런 오묘한 세계를 구상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하였다.

 

높이 솟은 바위산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고 찰주공만 남아 있다.

 

 

                                                                            

 

  

 

 

   

금오산 정상을 향하여 오르다 보니 모전석탑 흔적으로 보이는 석조물이 있다.

비범해 보이는 미끈하고 네모진 반듯한 석조물을 바라보니, 눈앞이 환해지는 듯 머리가 맑아진다.

 

금오산(金鰲山 468m) 정상에 오른다.

경주 남산을 금오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당나라 때 시인 고운(顧雲)이 신라의 최치원에게  준 시에서 "내가 듣자니 동해에 세 마리 금오가 있어,

금오가 머리에 산을 이어 높디높다 하네"라고 한 데서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전망대에 서서 바라보니, 경주평야를 가로질러 형산강이 흐르고 선도산 송화산 금곡산  그리고 대능원 도당산 월성 등이 한눈에 바라 보인다.

경주평야가 석양빛에 물들고 있다.

 

경주慶州 남산南山

오 세 영

 

경주 남산엔

아직도 옛 신라인新羅人들이 살고 있다 하더라.

욕된 삶이 싫어 속된 인연이 싫어

몸을 벗어버리고, 색을 벗어버리고 마침내 이 땅을 벗어나

남산 그 어드메

온전히 혼령으로 살아 있다 하더라.

 

경주 남산엔

아직도 옛 신라인이 신라말로 신라를 살고 있다 하더라.

낮에 굳어버린 저 돌부처,

모로 누워 침묵한 저 돌미륵,

그러나 그대 보리라.

 

달빛 푸르게 쏟아지는 어는 봄밤엔

돌부처 피가 돌아 숨 쉬는 것을,

돌미륵 벌떡 일어나 춤추는 것을,

햇빛 부신 낮이 아니라 어둠 짙은 밤이 아니라

처용處容이 춤추던 꼭 그 밝은 달밤에

 

그대

남산 솔바람에 실려 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그 영원한 소리를 들으리라.

 

비범해 보이는 미끈하고 네모진 반듯한;석조물

 

                  

금오산 정상 표지석

 

  

경주평야가 석양 빛에 물들고 있다.경주 평야를 흐르는 형산강, 선도산 송화산 금곡산이 보인다. 대능원 계림 도당산 월성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