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 ! 물안개 피어 오르는 대왕암

2012. 12. 20. 11:00문화유적 답사기/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을 찾아서

 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을 찾아서

 (2) 아!  물안개 피어오르는 대왕암(大王岩)

      2012. 11.28.  

 

대왕암

玄 高 裕 燮

 

大王의 憂國聖靈은

燒身後 龍王되사

저바위 저길 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海天을 덮고 나는

賊鬼를 調伏하시고

 

憂國至誠이 重코 또 깊으심에

佛堂엘 들으시다

高臺에도 오르시다

後孫은 思慕하야

龍堂이요 利見臺라더라

 

英靈이 幻現하사

晝二夜一 竿竹勢로

浮往浮來 傳해주신

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에 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끝나니

 

大鐘川 覆鐘海를

烏鵲아 뉘지 마라

蒼天이 無心커늘

너울에 속절없다

아무리 微物이라도

뜻있어 운다더라.

  

깜깜한 새벽 06:30분 양남행 첫 차를 타고 꼬불꼬불 준령을 넘어 추령터널을 지나니 멀리 동해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봉길해수욕장에서 내려  차가운 해풍이 불어오는 백사장에 들어서니  구름 속에서 해가 막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새벽을 여는 갈매기 우는 소리 파도 소리 들려온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해중릉(海中陵)이 파도치는 동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大王의 憂國聖靈은

燒身後 龍王되사

저 바위 저길 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海天을 덮고 나는

賊鬼를 調伏하시고

  

쉬임 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백사장에 부서진다.

갈매기 우는 소리 파도에 묻힌다.

구름 사이로 내민 붉은 해로 바다는 온통 붉어지며  햇덩이가 바다에 어린다.

갈매기가  군무(群舞)를 또 시작한다.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대왕암은 더욱 신비로움을 더한다.

아!  물안개 피어오르는 대왕암

문무대왕의 우국성령이 깃든 대왕암

감동의 물결이 가슴으로 잔잔히 밀려온다.

 

 

 

 

 

 

 

 

 

피어 오르는 물안개로 대왕암은 신비로움을 더한다.

 

    

갈매기의 군무

 

백사장을 걸어 대종천을 향하다 뒤 돌아보니 갈매기 군무 속으로 대왕암이 보인다.

오징어 덕장을 지나 대종천 다리 위에 올라서니 아침 붉은 해가  대종천에 어려 빛나고 있다.

토함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함월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만나 이룬 대종천은 양북면의 넓은 들을 지나 동해 바다로 흘러든다.

고려 고종 몽고의 침략 시 몽고병이 황룡사 대종을 가져가기 위해 뱃길을 이용하여 운반하기 위해 하천을 이용하였는데, 

폭풍이 일어 종을 실은 배가 침몰되면서 종도 가라앉았다 한다.

이후 큰 종이 지나간 개천이라 하여 대종천(大鐘川)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뒤로부터 풍랑이 크게 일면 대종 우는 소리가 

동해 일대에 들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용당 포구의 오징어 덕장

 

大鐘川 河口

 

다리를 건너 東海口 비석을 오른쪽에 두고 대본초등교를 향하여 언덕을 오르니 이견정(利見亭) 기와지붕이 보인다.

향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문을 들어선다.

신문왕이 세웠던 이견대(利見臺) 자리에 새로 지은 이견정(利見亭)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대왕암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곳이 바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이 함께 신문왕에게 전하여 준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의 현장이다.

망연히 대종천과 대왕암을 바라본다.

 

英靈이 幻現하사

晝二夜一 竿竹勢로

浮往浮來 傳해주신

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에 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끝나니

 

삼국유사  <萬波息笛> 조를 옮겨 본다.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政明이요, 성은 김 씨다.개요 원년 신사(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金堂)의 계하(階下)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한 것 같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 어떤 책에는 천수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에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 안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왔다 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혹은 춘일이라고 쓴다- 에게 점치게 하니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을 진호(鎭護) 하시고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어 주시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에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그루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산도 또한 대나무처럼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가서 유숙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두컴컴해지더니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왕에게 받쳤다  왕은 용을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이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 같은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개 한 다음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더니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 서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었다. 태자 이공(理恭)- 곧 효소대왕-  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눈금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눈금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서 그것을 보이겠습니다." 이에 왼편 둘째 눈금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 한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다.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693)에 부례랑이 살아 돌아왔던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 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이름했다. 자세한 일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이견대 옛터에 새로 건립된 이견정(利見亭)
이견정에서 바라보이는 대왕암
동해로 대종천이 흘러드는 용당 포구

 

대종천과 대왕암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에 "東海口"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니, 언덕 아래에 우현 고유섭이 쓴 '대왕암' 시비와 '나의 잊지 못하는 바다' 기념비, 그 사이에 '문무대왕 유언'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東海口' 비석

 

동해구 비석 앞에서 바라보이는 대왕암

   

문무대왕 유언 비를 가운데 두고 우현 고유섭의 대왕암 시비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문무대왕 유언' 비

  

우현 고유섭의 '대왕암'시비

 

우현 고유섭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기념비

 

대왕암이 바라 보이는 대왕암 시비 앞에 서서, 1940년 7월 '高麗時報'에 게재된 우현 고유섭의 경주기행 수필 '경주에 가거든' 말미에 쓴 '대왕암' 시가 새겨져 있다.

 

大王의 憂國聖靈은

燒身後 龍王되사

저 바위 저길 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海天을 덮고 나는

賊鬼를 調伏하시고

 

憂國至誠이 重코 또 깊으심에

佛堂엘 들으시다

高臺에도 오르시다

後孫은 思慕하야

龍堂이요 利見臺라더라

 

英靈이 幻現하사

晝二夜一 竿竹勢로

浮往浮來 傳해주신

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에 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끝나니

 

大鐘川 覆鐘海를

烏鵲아 뉘지 마라

蒼天이 無心커늘

너울에 속절없다

아무리 微物이라도

뜻있어 운다더라.

 

 우현 고유섭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1974년 10월 세운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기념비를 바라보며 그의 생을 회상해 본다.

그는 일제 강점기라는 불우한 시대에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미술사학자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간 사람이다.

"모르고 살기만 하면 무엇합니까?  하고 싶은 공부나 하다가 죽겠다"라고 말했던 우현

그의 학구적 열정을 그리워하고, 그의 40세 요절을 애석해한다.

우현 고유섭의 수필집 <전별의 병>에 있는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일부를 옮기며 그의 내면의 세계 일면을 엿본다.

          

"바다란 물 많은 곳을 이름이니 三水변에 每字를 붙인 海字가 그 뜻에서 나온 것이다.

每란 草木茂盛의 뜻으로 이 글자는 草木이 發芽 初生한다는 艸字와 衆多를 産育하는 母字와의 성형합자(聲形合字)이다.

그러므로 물이 많되 萬物이 성육(成育)을 받는 곳이 곧 바다이다.

중략...

세상 사람은 繁華한 牧丹을 좋아하듯 바다도 해금강, 해운대 같은 호화판을 좋아하겠지만 경관이 그에 바이 못한 저 龍堂浦의 바다를

나는 사랑한다.

世愛牧丹紅 裁培滿院中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이라는 말과 같이 이름이 드러난 名山大川이 아닌 중에도 실로 사랑할만한 景觀이 있는 것이니 용당포의 바다가 즉 그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경주 석굴암으로부터 흘러 나리는 물이 다른 세류와 합쳐서 大鐘川을 이루어가지고 동해로 들어가는 곳이니 대종천이 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어구에 龍堂山 臺本里란 곳이 있고 그 포구 밖에는 오직 한 그루의 岩山인 大王岩이란 돌섬이 있을 뿐이다.

明砂는 연연(蜒蜒) 히 뻗어 있고 멀리 漁村戶落이 보이며 바다에는 구름과 배와 白鷗가 떠 있을 뿐이다.

현궁남벽(玄穹藍碧)이 위아래로 어리여있고 창암벽파(蒼岩碧波)에 白砂가 어리여 있을 뿐 말없는 세계요 고요한 세계이다.

 

이미 세상의 이목에서 떠나 있는 세계, 화두에서 잊어버려지고 있는 세계, 그러나 이곳에는 무한한 이야깃거리가 숨겨져 있는 세계,

한 많은 세계, 꿈 많은 세계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천이삼백년전, 반도통일의 위업을 채 이루지 못하시고 동양의 英主 太宗 武烈王이 훙어(薨御) 하신 후 태자 문무왕이

등극하시사 세구(世寇)인 백제를 완전히 복멸(覆滅)시키시고 강적인 고구려를 멸망시키시고 다시 반도를 규유(窺覦)하던 대당제국의

반도 내에서의 근체를 완전히 제거하사 반도의 평화를 대반석 위에 건설하신 그 임군, 그 임군이 항상 걱정하신 것은 조선의 유일한 海患이었다.

 

이 해환을 대왕이 만세후라도 몸소 지키시고 몸소 방어코자 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마음에서 왕이 인간세에 계실 적에 벌써 國都로서 관문인

이 대종천 포구 龍堂山 山陽에 찰방어구(察防禦寇)의 뜻으로 感恩大寺를 이룩하시고 후일에 몸소 숙어(宿御) 하사 이 大願을 펴시라고 금당

아래 용혈(龍穴)을 파두게하사 백 년 후 유언으로써 지존된 옥체를 불사르게 하시고 舍利를 저 大王岩頭에 헛트리게 하시니 大王岩의 이름은

이에서 나온 것이며 헛 틀어진사리는 영혼이 응결(凝結) 되사 호국룡이 돼 시와 대종천 물줄기를 타시고 感恩寺 金堂下로 드나드 시었다.

 

그뿐이랴 이 수로의 상류에는 다시 또 察防의 秘關으로 석굴암을 경영하시니 군데군데 놓여있는 신라의 寺址는 모다 이 국방의 뜻을 갖고

배치되어 있다.

 

경주에 놀면 불국사에 놀 줄 알고 불국사에 놀고 나면 석굴암을 누구나 찾으나 다시 그곳서 山峽을 끼고 細流를 타고 가기 60여 리,

이 대종천 하류에 이르면 펑퍼짐한 原頭, 그곳서 蒼波는 벌써 보이기 시작하는데 용당산하에 버려진 感恩寺址의 高高한 三重 雙塔,

그곳서 다시 나와 바다로 가면 大王암의 森嚴한 姿態, 무심한 白鷗는 용여파(溶與波)하는데, 범피엽주(泛彼葉舟)는 풍편(風便)에 던져있고

 悠悠한 白雲은 大虛에 둥둥, 장 저 왜 송(長渚矮松)이千年古를 속삭이는데 漁舟子의 잡아오는 생복을 안주하여 대배 일음(大杯一飮) 코

5척 단신을 砂場에 던저치면 岸頭의 烏鵲聲 波頭의 白鷗聲 海香은 숨여 들고 松風은 귀에 난다. 

 

그래서 이곳 바다를 나는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 한다."

又玄 高裕燮 (1905-1944)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미술사학자이다.
1925년 보성고보 졸업 후 경성대학 철학과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했으며, 개성박물관장을 10년간 역임했고, 연희전문·이화 여전 교수를

역임하면서 국내의 명승고적·사찰을 답사·연구했다.

그의 저서로는 석탑에 대한 연구 결과물인 <조선탑파의 연구>가 유명하다.

그 외 <송도고적>  <조선미술사논총> <고려청자> <한국미술사급 미술논고> <전별의 병>등이 있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어 서라벌로 돌아가던 길

멀리 감은사 쌍탑을 바라보며 둔덕 길을 걷는다.

감은사지 뒤 대숲을 지나 잡초를 헤치고 용당산 기슭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대숲 너머로 올연히 서 있는 감은사 쌍탑이 보인다.

옷에 덕지덕지 붙은 도깨비바늘을 떼어내며 감은사지로 향한다.

 

멀리 감은사 쌍탑이 보인다

  

대숲너머로 감은사 쌍탑이 보인다

 

느티나무 사이로 보이는 감은사 쌍탑이 멋스럽다.

감은사 쌍탑을 우러르며 금당터를 살펴본다.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는,

-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金堂)의 계하(階下)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한 것 같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용당산을 뒤로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절을 완성하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이듬해(682)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했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더욱 신빙성 있게 해주는 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금당 밑의 공간이다.

중문의 남쪽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피리 부는 탑

박 수 현

 

거친 풍랑에도

대종천 타고 삼층석탑 올라

만파식적 그리 깊이 부셨나요?

천년 사직 넘나드는

열두 가락에

호국의 뜻 담아 띄우셨나요?

다시 천년 후, 그 밤에도

검푸른 바닷길 트며 돌아오신다지요

그때, 용의 비늘 시퍼렇게 살아나고

화랑들 말발굽소리 천지를 울리겠지요

우뚝한 동서 쌍탑도

뜨거운 가슴 열어 피리를 불겠지요

춤추며 한 몸이 되겠지요

해와 달로 빛나는

수중대왕이시여!

 

감은사지 쌍탑. 탑마을 당산나무인 느티나무

 

감은사지 뒷편에서 바라본 감은사 쌍탑

 

감은사 금당터

 

축대 아래에서 올려다 본 미끈한 감은사 쌍탑

 

감은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안동삼거리에서 하차한다.

함월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기린천을 따라 신문왕이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어 서라벌로 돌아갔던 "신문왕 호국행차의 길"을 따라 걷는다.

 

골굴암 가는 길의 기린천

 

골굴사 일주문을 지난다.

붉은 단풍나무와 대나무 숲을 지나 경사진 산길을 오른다.

허위허위 길을 오르니 구멍 숭숭 뚫린 거대한 석회암 암벽이 솟아 있다.

암벽 위 높은 곳에서 스님의 독경과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암벽 제일 높은 곳에 유리로 만든 보호각 속에 멀리 동해를 바라보는 돋을새김 한 마애여래좌상이 보인다.

 

기림사 사적기에는 '함월산 반대편에 천생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골굴사는 우리나라 유일의 석굴 법당이다.

골굴암은 원효가 만년에 머물다 임종한 혈사(穴寺)로 추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혈사 부근에 설총이 한때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골굴사 일주문

 

일주문 현판

  

 

 

거대한 석회암 암벽 높은 곳에 돋을새김한 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慶州 骨窟庵 磨崖如來坐像) -

보물  제581호

 

기림사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보다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보물 제995호)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대적광전 앞뜰에서 바라보이는 마애여래좌상

  

오륜탑

    

오륜탑이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대적광전과 마애여래좌상

 

 골굴사는 선무도 무예의 본산이기도 하다.

선무도는 옛 신라의 화랑들이 수련하던 무술이라고 한다.

 

선무도(禪武道)는 불교의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법으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에 전하는 전통수행법이다. 본래는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고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전수되어 온 수행법이다. 선무도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적 방편으로 요가나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법이다.

 

기와불사를 하고 골굴사를 뒤로 한다.

 

기림사로 가는 길

마가목에는 빨간 열매가 달려 있고 잎은 곱게 단풍이 들었다.

호림마을을 지나니 논밭 너머 언덕에는 대숲이 울울하다.

 

호림마을

 

달을 품은 산 함월산(含月山)

함월산 기슭 기림사(祈林寺)에 드는 곳에 '林井聖地'  표석이 서 있다. 

林井聖地

숲 속 샘 성스러운 땅

林井! 

명징(明澄)한 이름이다.

 

무지개 모양의 임정교를 지나 '含月山祈林寺' 현판이 달린 일주문에 다다른다.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천축국(天竺國)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처음 절을 짓고 임정사(林井寺)라 불렀다.

그 뒤 원효(元曉)가 중창하고  부처님 당시 가장 중요한 절인 기원정사(祈園精舍)와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한 글자씩 따서 '기림사'라 고쳐 불렀다.

 

절로 들어가는 길에는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다.

참나무 중에서도 잎이 가장 작은 졸참나무 단풍잎이 파란 하늘에 아름답게 달려 있다.  

노송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왕문을 들어선다.

 

林井聖地 표석

    

무지개 모양의 임정교

  

기림사 일주문

   

 

졸참나무 단풍

 

천왕문

 

                                                             

사천왕상

 

함월산 기림사는 전단정과 다섯 종의 신비한 물이 솟는 절로 유명하다.

'기림사 창건 사적기'에는, "한 떨기 오색화 우담발화(優曇鉢花)는 개화난만하여 그 황홀함이 법계에 그림과 같다. 또 오처(五處)에 오종수(五種水)가 있으니 오종의 맛과 오종의 수명(水明)이 있어 기림사에 희귀함을 전하고 있다.

......

8 궁녀를 데리고 오니 성인은 금관자( -차주전자)를 주어 전단정의 물을 긷게 함에 하루에 5 백순씩 급수케 해 3년에 이르매 8 궁녀는 무상도를 수료하였다.

....

광유성인은 다시 제자를 시켜 이번에는 사라수대왕이 직접 급수 전다의 유나(維那-제를 올리는 의식절차를 지휘하는 사람)를 시킴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왕이 듣고 기뻐하며 임정사에 온다.  임정사에 온 왕은 금관자를 가지고 전단정의 물을 길어 다각(茶角)을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광유성인은 석가모니이며 사라수대왕은 곧 아미타불, 8 궁녀는 8대 보살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니 돌확에 샘물이 철철 넘쳐흐른다.

솟아나는 물을 받아 마시니 가슴이 시원해지고 머리가 명징(明澄)해 진다.

고색이 완연한 진남루를 돌아 들어가니 응진전과 진남루 처마 사이로 반송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응진전 앞에는 고색창연한 삼층석탑이 서 있다.

본래 이 석탑 자리는 오종수의 하나인 장군수 샘이 있던 곳으로 이 물을 마시면 천하무적의 장군이 나온다고 알려져 반역자가 나올까 물줄기를

메우고 그 위에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밤 탑에 귀를 대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다.

 

뜰에는 반송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다.

글씨가 굵고 힘찬 대적광전 현판이 보인다.

大寂光殿 비로자나불에 참배한다.

대적광전 화려한 꽃창살이 색 바랜  멋을 한껏 풍기고 있다.

500년 된 보리수나무는 태풍에 넘어져 죽고  어린 후계목이 화단에서 자라고 있다.

기림사 창건 사적기에 전단정의 물을 길어 차를 달였다고 하였는데 약사전에는 부처에게 차를 공양하는 벽화가 있다.

아마도 전단정의 물을 길어 차를 달였으리.

북쪽 대나무 숲에서 듬성듬성 자라는 차나무와 다섯 종의 신비한 물이 솟는 林井이 있으니 차 공양은 일상이었으리라.

 

천불전 앞 돌확에 샘물이 연실 넘쳐흐른다.

뜰에 있는 향나무는  나날이 그 향기를 더하며 푸르르고,

명부전 앞 빨간 감은 주렁주렁 새파란 하늘에 걸려 있다.

 

천왕문 안쪽의 샘물

    

진남루

 

부채살처럼 가지를 펼친 반송
응진전과 삼층석탑

   

응진전 나한상

 

500년 수령의 보리수 나무 어린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大寂光殿

  

굵고 힘찬 글씨의 대적광전 현판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대적광전 꽃창살

   

약사전

    

부처님께 차 공양하는 약사전 내벽화

 

관음전의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삼천불전

                                                                              

삼천불전 앞의 향나무

 

 

 

삼천불전 앞의 샘물

   

명부전과 삼성각

 

명부전 앞의 감나무

    

종이로 만든 후 옻칠을 한&nbsp;성보전에 있는 건칠보살좌상

 

매월당영당(梅月堂影堂)에 들어 님을 추모한다.

 

본래의 영당은 헌종 11년(1670) 경주 부사 민주면이 매월당이 은거하였던 경주 남산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鰲山祠)를 지었으나 훼철되어고 종 15년(1878)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유림의 청원으로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다.

東峰 김시습(1435-1493)은 수락산 거처를 버리고 관동으로 떠난다. 동해가에 머물던 1485년 경  모순에 찬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동봉육가(東峰六歌)를 짓는다.

 

나그네여, 동봉이란 이름의 나그네여

헝클어진 흰머리에 초라한 모습

젊어서는 서와 검을 배웠으나

시큼한 선비 짓을 부끄러워하였기에

하루아침에 가업이 뜬구름 같아져

허둥허둥 다급히 떠났으나 누구를 따르랴

아아 첫 번째 노래! 구슬픈 이 노래

검푸른 저 하늘은 도무지 모르누나

 

즐률, 가시 많은 즐률 지팡이(禪杖)

이걸 의지해 산 넘고 물 건너

북으로 말갈, 남으로 부상(扶桑)까지 노닐었다만

어느 곳에 수심 가득한 창자를 묻으랴

해는 저물었지만 내 갈 길은 멀어라

회오리바람 타고 구만리 오르면 좋으련만

아아 두 번째 노래! 구성진 노래

북풍이 얼굴을 때려 처량한 신세

 

외조부여, 날 사랑하신 외조부여

돌날 내 글 읽는 소리에 기뻐하시고

손 놓고 서자마자 글씨 셈 가르쳐주셨기에

일곱 글자 엮어서 고운 시어 지었더니

영묘(세종)께서 아시고 궁궐로 부르시매

큰 붓 휘둘러 용이 날 듯 글씨 썼도다

아아 세 번째 노래! 늘어지는 이 노래

뜻을 못 이루고 세상과 어긋나다니

 

어머니, 맹자 어머니 같으셨던 어머니

날 기르시느라 고생하시고 살 곳도 가리셨지

진작에 공자를 배우게 하셔서

경학으로 요순시대를 회복하라 기대하셨다만

어찌 알았으랴, 유생이란 이름이 날 그르쳐

십 년을 외지로 나다닐 줄을

아아 네 번째 노래! 답답한 이 노래

골짝에 우는 까마귀는 제 어미를 먹이건만

 

푸른 하늘에 씻은 듯 구름 한 점 없고

거센 바람은 마른풀을 할퀴누나

우두커니 수심에 잠겨 창공을 바라보매

장구한 하늘 아래 싸라기 같은 내 존재

고독을 못내 괴로워하면서

남들과 기호를 같이하지 못하다니

아아 다섯 번째 노래! 애간장 끊는 이 노래

영혼이여, 사방 어디로 돌아가랴

 

활을 당겨 천랑 별을 쏘려 하였건만

태일 별이 하늘 중앙에 있고

긴 칼 뽑아 여우를 치려 하였더니

백호가 산모퉁이에 버티고 섰네

공개한 이 마음을  토로하지 못하고

방약무인하게 휘파람 불어 본다

아아 여섯 번째 노래! 노래하다간 한숨짓네

장대한 뜻은 꺾이고 수염만 매만질 뿐

 

매월당영당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

 

 명부전 뒤 대숲을 지나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신문왕 호국 행차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만파식적을 얻어 서라벌로 돌아가는 신문왕 호국행차길 따라 기림계곡 옆을 걷는다.

 

 

 

기림계곡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

왕은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 서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었다. 태자 이공(理恭)- 곧 효소대왕-  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눈금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눈금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서 그것을 보이겠습니다." 이에 왼편 둘째 눈금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 한다.

 

기림사 계곡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린다.

심상치 않은 바위가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를 이리저리 건너 앞으로 나아가니 기둥처럼 서 있는 바위 사이로 암벽을 타고 흐르는 폭포가 보인다.

암벽으로 둘러싸인 깊고 푸른 소에 굉음을 내며 폭포가 힘차게 떨어지고 있다.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뻥 뚫린다.

 

아! 용연(龍淵)이다

쉬임 없이 굉음을 내며 물줄기가 바위를 타고 쏟아진다.

막 폭포의 물줄기를 타고 꼬리를 치며 솟아 오른 용이 푸른 하늘로 날아가는 듯하다.

수심 깊은 용연에는 맑고 푸른 물이 파문 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현장을 걷는 즐거움이여.

 

  

용연과 용연폭포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쉬었던 수레가 다시 출발한다.

가랑잎으로 뒤덮인 호젓한 산길에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불령(佛嶺)에 도착하니 봉표(封標)가 있다.

바위에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연경의 묘에 쓸 향탄(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복표를 세운다)"라 새겨져 있다.

 

가랑잎에 발이 푹푹 빠지며 걷는다.

숯가마터도 지난다.

신문왕이 잠시 쉬며 손을 씻었던 '세수방'을 지나 가파른 고개를 오르니 수렛재다.

수레가 넘어 다녔던 고개라는 의미의 '수렛재'

급한 경사길이 아마도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구부려졌다는 '말고부리'인 듯하다.

이곳에서 함월산 정상을 다녀올까 하다  해가 너무나 짧아져 포기하고 모차골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니 마차가 다니던 길이란 의미의 마차골 곧 '모차골'에 당도한다.

 

호젓한 신문왕 호국 행차길

 

영봉표(佛嶺封標)

 

발이 푹푹 빠지는 낙엽 쌓인 산길

 

수렛재 오르는 가파른 산길

 

수렛재

 

모차골

추령을 향하여 걷는다.

석양빛이 내리는 길  세찬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길 위의 가랑잎을 말아 올린다.

추원마을 언덕 감나무에는 까마귀가 감을 쪼고 있다.

빨간 감을 쪼던 까마귀 하늘로 날아오른다.

수렛재를 힘들게 넘어 추령 고개에 도착한 신문왕 호국 행차 수레는 오늘 여기서 멈춘다.

 

감을 쪼던 까마귀 하늘로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