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 닫힌 분황사엔 顧影만 비었다

2012. 12. 10. 09:36문화유적 답사기/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을 찾아서

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을 찾아서

(1) 문 닫힌 분황사엔 顧影만 비었다

2012. 11.27  화요 맑음

 

연꽃 웃고 있네

김 동 리

 

귀뚜리 소리, 귀뚜리 소리 난다

돌 속에 귀뚜리 소리 난다

 

여치 소리, 여치 소리 난다

벽 속에 여치 소리 난다

 

적멸寂滅은 차라리

우주宇宙를 채우는 꽃송이

 

십일면十一面 관음 다 돌아보고, 다시

대불大佛 앞에 서니

 

귀뚜리 소리 여치 소리

모두 간 곳 없고

 

열반涅槃은 그대로

무無를 채우는 햇빛인데

 

화강암덩이, 희멀건 화강암덩이

한 송이 연꽃 웃고 있네

 

"일연의 삼국유사는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 길 위에서 만난 이야기로 길을 찾아낸 결과가 담긴 책이다. 저자 자신이 운수(雲水)에 운명을 맡긴 승려였으므로, 길은 그의 평생 이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어느 승려와 달리 길 위의 풍경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렇게 '삼국유사'는 길 위의 책이다. 나는 이를 말할 때 '삼국유사'의 다음 두 문장을 자주 인용한다. "오늘 내가 몸소 와서 우러러 예불하고 나니 또한 분명히 믿을 만한 두 가지가 있었다." 어산불영(魚山佛影) -. 경남 밀양의 만어산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취재하고 그 끝에 붙인 말이다.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적는 데 그치지 않고, 만어산까지 직접 가서 그 소재가 되는 돌들을 직접 두드려 본 다음이었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 머물며 그분들이 남기신 아름다움을 적어 놓았었다."

포산이성(包山二聖) -.대구 달성의 비슬산에 머물던 때 썼던 시를 옮겨 적으며 붙인 말이다. 30대에 쓴 시를 70대가 되어 편찬하던 무렵까지, 무려 40년을 운수의 길 위에서 품고 다닌 셈이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길 위의 책이다. 승려 진자가 미륵선화를 찾아다닌 이야기의 끝에 붙인 일연의 시 처음 두 줄은 다음과 같다.

선화를 찾아 걸음마다 그 모습 우러르며

이르는 곳마다 가꾸었던 한결같은 공이여

첫 줄의 원문은 일보일첨(一步一瞻)이다. 일보일 배와 같은 말로 볼 수 있다. 삼보도 아닌 일보마다 새긴 진자의 정성스러운 걸음 -. 이 걸음은 다름 아닌 일연이 실천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 한결같은 공으로 이뤄 낸 책이 '삼국유사"이다. " < 고운기의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에서 >

 

오랜 침묵 끝에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현장을 찾아 길 위에 선다.

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을 찾아 경주에 도착하니 설렘으로 온통 가슴이 뛴다.

경주의 하늘은 파랗기만 하다.

오늘도 그 천년의 푸른 숨결이 연면(連綿)히 흐르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시가지를 지나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는 경주박물관에 들어서니 숭복사 쌍거북이 반긴다.

 

심금을 울리는 에밀레종 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떠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르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

연꽃 대좌 위에 무릎꿇고 앉아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든 옷자락 휘날리는 비천(飛天)의 모습은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염원하는 듯하다.

신종의 명문(銘文)에는,

"지극한 도리는 형상의 바깥까지를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커다란 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울리므로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가설을 세워서 세 가지 진여(眞如)의 깊은 뜻을 보이고 신성한 종을 달아서 일승(一乘ㆍ부처님 말씀)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하였다

중략

…이때…신령한 그릇이 이루어지니 모양은 산악이 솟은 것 같고 소리는 용이 우는 것 같았다. (그 소리) 위로는 하늘 끝까지 이르고 아래로 끝없는 지옥까지 통할 것이다.

보는 자는 기이하다 칭찬할 것이고 듣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하략)'

 

( 명문 번역 김상일 )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염원하는 향 공양 비천상

 

성덕대왕 신종

유 안 진

 

너무 깊고 너무 아픈 사연을 모아

부처님께 빌었어라

한 번 치면 서라벌이 평안했고

두 번 치면 천리까지 평안했고

세 번 타종하면 삼천리까지라

거기까지 신라땅 되었어라

금수강산으로 수 놓였어라

어지신 임금님 옥음이 되었어라

백성 어버이로 섬기었어라

끝없이 태어날 아기들을 위하여

끝없이 낳아 키울 어미들을 위하여

한 어미가 제 아기를 공양 바쳐 빌었어라

껴안고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빌었어라

에밀레- 에밀레레- 종소리 울렸어라.

 

정오의 햇살이 꽂힌 단풍나무의 잎이 더욱 붉고 화사하다.

가을의 마지막 향연을 벌이고 있다.

 

숭복사지 쌍거북 비석 받침

 

단풍나무가 마지막 가을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유적지에서 옮겨 온 박물관 주변 뜰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유물들

깨지고 마모되고 색 바랜 석조유물들을 바라보며 천년 세월의 숨결을 듣는다.

고색이 도는 돌에 새겨진 형상들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가슴속에 알지 못하는 희열 같은 것이 솟아오른다.

 

 

석조유물들과 고선사터 삼층석탑

 

불교미술실에 든다.

육면체 이차돈순교비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 금강산 자추사(백률사)에 그가 순교한 후 290년이 지난  헌덕왕 9년(817) 그의 무덤을 고쳐 쌓고 세운 비석이다.

비석 한 면에는 삼국유사에 묘사된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목에서는 허연 젖이 솟구쳐 오르고, 그의 목은 땅에 구르고, 하늘은 침침해져 빛을 잃고 땅은 진동하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장면을 돌에 새겼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이차돈의 행적을 글자로 새겼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14년(527)에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교 역할을 한 사람이 이차돈이다.

삼국유사  <原宗興法 厭觸滅身> -"원종은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은 순교하다" 조에는 사인이라는 벼슬을 하던 22살 난 박염촉(596-527)의 순교가 묘사되어 있다. (원종은 법흥왕이고 박염촉은 이차돈)

 

일부를 옮겨 보면, 

"옥리가 그의 목을 베니 허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쳤다. _ '향전'은 이렇다. 사인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므로 내가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결연을 버리오니 하늘은 상서를 내려 인민에게 두루 보여주십시오." 했다. 이에 그의 머리가 날아가서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하늘은 침침해져 사양을 감추고 땅은 진동하는데 천화가 내려왔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를 적셨고 재상은 상심하여 진땀이 관에까지 흘렀다. 감천이 문득 마르니 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 지어 울었다........ 드디어 북산의 서쪽 고개(금강산)에 장사 지냈다. 나인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자추사(지금의 백률사)라 했다. 이에 집집마다 부처를 공경하면 반드시 대대의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를 행하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일연은 이차돈을 기린다. 의에 죽고 생을 버림도 놀라운 일인데天花와 흰 젖은 더욱 다정하다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죽었으나 각 절의 종소리는 서울을 뒤흔든다                

 

이차돈 순교비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면: 목에서는 허연 젖이 솟구쳐 오르고, 그의 목은 땅에 떨어져 구르고,하늘은 침침해지고 땅은 진동하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

 

 석조 반가사유상(半跏思維像)

 

반가사유상이란,

반가부좌의 준말인 '반가(半跏)'와 생각하는 불상이라는 뜻의 '사유상(思惟像)'을 합친 말로, 왼쪽 다리는 내리고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얹은 반가부좌 자세로 약간 숙인 얼굴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한다.

반가사유라는 독특한 자세는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만들어지면서 석가여래가 젊어서 왕궁을 빠져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도하면서 깊은 사유에 잠기셨던 당시의 모습이 始源이라고 한다.

 

이 석조 반가사유상은 1909년 송화산 기슭 김유신 장군 묘의 재실인 금산재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머리와 두 팔은 깨어져 없어지고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리고 윗 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는 석조 반가사유상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바위에서 불쑥 솟아올라 피어난 연꽃이 부처님의 발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연꽃을 딛고 있는 왼발의 발가락과 발톱.

신라의 손길로 돌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

마음을 향기롭게 한다.

 

금산재에서 발견된 머리와 두 팔이 없는 석조 반가사유상

 

바위에;불쑥 솟아올라 피어난 연꽃이 부처님의 발을 떠받치고 있다. 연꽃을 딛고 있는 왼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앙증스러운 오른발 발바닥

 

 반가사유상 뒤편에서 바라보니 창문에 그려진 연꽃 너머로 다보탑 석가탑이 우뚝 솟아 있다.

 

 

 

얼굴무늬수막새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얼굴무늬수막새는 경주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경주 시내에서는 안내판의 배경사진, 골목 담벼락, 간판 등에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 얼굴무늬수막새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수막새에 새겨진 웃는 얼굴을 두고 '신라의 미소'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작은 기와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이 수막새에 표현된 얼굴의 표정이 신라 사람들의 맑고 밝은 심성을 꾸밈없이 잘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 경주의 한 고물상에 있던 것을 경주에 살던 일본인 다나까 도시노부가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가, 30년 뒤 경주 박물관에 기증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 수막새가 발견된 장소는 경주읍 사정리 한 절터였는데 영묘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절터에서 '대영묘사', '영묘지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善德王 知機三事> 조에는 영묘사 관련 일화가 있었던 곳이다.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숨어 들어온 적, 자기 죽을 날을 미리 안 세 가지이다.

 

"靈妙寺 玉 門池에 겨울철에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사나흘 동안이나 울고 있었다. 나랏사람들이 이를 괴이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을 시켜 정병 2천 명을 뽑아서 빨리 서교로 가서 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덮쳐서 죽이라 했다. 두 각간이 명령을 받고 각각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물었다. 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매복해 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의 장군 오소란 자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 부대 1천3백 명이 오는 것을 또한 쳐서 줄 거야 한 사람도 남기자 않았다."

 

얼굴무늬수막새 - 웃는 기와

 

웃는 기와

-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 봉 직

 

옛 신라 사람들은

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

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

 

기와 하나가

처마 밑으로 떨어져

얼굴 한쪽이

금가고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

나뭇잎  뒤에 숨은

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번 웃어 주면

천 년을 가는

그런 웃음을 남기고 싶어

웃는 기와 흉내를 내봅니다.

 

돌아 나오는 박물관 뜰에는 경주 양북면 장항리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석조 불 입상(石造 佛 立像)이 보인다.

언덕 위 소나무 사이로 승소골 삼층석탑도 보인다.

 

장항리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석조 불 입상

  

승소골 삼층석탑

 

왼편으로 안압지를 바라보며 텅 빈 들판 길을 걷는다.

길 가  산수유나무의 빨간 열매가 새파란 하늘에 대비되어 인상적이다.

열매는 나무가  한 해 땀 흘려 노력한 결실이다.

황룡사지 가는 길 옆 이름 모를  옛 절터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진 허물어진 탑의 석재들이 놓여 있다.

황량한 폐사지에 들려오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

 

산수유 열매

 

이름 모를 옛 절터
길 안내하는 경주시의 캐릭터 관이,금이

 

 

발굴조사를 끝내고 건물터를 정비한 2만 여평의 옛 황룡사지는 공허하기만 하다.

금당터에 올라 사위를 둘러보며 옛 황룡사의 영화를 더듬어 본다.

신라 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 2월에 대궐을 용궁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에 고쳐서 절로 삼고 황룡사라 했다.

4대 왕 93년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대사찰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의 병화로 불타 없어지고, 이제는 초석만 남아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인도 아육왕의 황철 5만 7천 근으로 만든 금동장륙삼존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세 개의 홈파인 대좌석(臺座石)만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금당의 벽에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들던 솔거(率居)가 그린 노송도(老松圖)도 볼 수 없다.

삼국사기 권 48 <열전>에,
"솔거는 신라 때 스님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가지와 줄기에 비늘 같은 주름이 져서 까마귀와 솔개들이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쳐 떨어지곤 했다.그 후 세월이 오래되어 채색이 바래지자 스님들이 단청하여 보수를 한 뒤부터는 까마귀와 솔개들이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한다.

 

백제의 장인 아비지와 신라의 장인 2백 명을 동원하여 2년에 걸쳐 만든 높이 80m의 9층 목탑도 몽고군의 병화로 불타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탑의 무게 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심초석과 초석이 남아 옛 장엄했을 목탑을 연상시켜 준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 조에,

자장법사가 중국의 태화못 옆을 지나가다 신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황룡사의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이오. 범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그대가 본국에 돌아가 절 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는 항복해 오고 구한 이 조공을 바치니 국조가 길이 태평할 것이며,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놓아주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

할 것이오. 또 우리를 위하여 경기 남안에 정사 한 채를 지어 내 복을 빌어주오. 나도 또한 그 은덕을 갚겠소." 말을 마치자 드디어 옥을 바치더니 갑자기 형제를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을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여왕이 여러 신하에게 문의하니 여러 신하들은 아뢰었다. "공장을 백제에서 청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백제에 청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신라에 와서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이간 용춘 -혹은 용수 바 한다-이  그 일을 주관했다. 거느린 소장이 2백 명이었다. 처음 절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은 꿈에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은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다. 갑자기 땅이 진동하더니 어두컴컴한 속에서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당문으로부터 나와서 그 기둥을 세우고는 그들은 모두 사리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절탑 기둥에 관한 기록에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자이고 이하는 1백83 자라 했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1백 알을 그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과 대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연못에서 나온 용의 청을 좇았던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탑의 영검이 아니겠는가.

후에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 하다가 말했다."신라에 삼보가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이름이냐?"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대입니다."그래서 침범할 계획을 중지하였다. 주나라에 구정(九鼎)이 있기 때문에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 하니, 이러한 경우일 것이다. 기린다. 귀신이 부축한 듯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찬란한 금벽(金碧)으로 대마루는 움직인다 이에 올라 구한(九韓)만의 항복을 볼 것이랴 건곤이 특히 평안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크고 17년이나 앞서 경덕왕  13년(754)에 만든 무게 49만 7천5백81근의 황룡사의 종은 어디로 갔는가.

전하기로는, 몽고군이 배로 싣고 가다 대종천에서 배가 침몰하여 대종이 바다에 가라앉아  풍랑이 심하게 일 때면 동해 일대에 대종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한다. 동해바다에 호국의 종이 된 것인가. 금당터 장륙삼존상 대좌석 앞에서 석양빛에 내리는 황룡사지를 망연히 바라본다.

 

장륙 삼존불 대좌석에서 바라보이는 9층 목탑지

  

장육 삼존불 대좌석과 좌 우의 14개의 불대좌석

 

금동 장륙존상 대좌석(臺座石)-불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촉이 들어가게 홈을 팠다

 

9층 목탑지의 심초석과 초석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깨어진 석재

 

분황사로 가는 길에 오뚝한 당간지주가 보인다.

양 기둥사이에는 특이하게도 당간을 받치는 간대(竿臺)로 돌거북을 만들어 놓았다.

 

분황사 소유로 추정되는 당간지주

 

당간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 간대

 

분황사 문을 들어서니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 석양빛을 받고 있다.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앙상한 나무들이 서 있는 원효의 성지 분황사 경내를 거닌다.

자그마한 보광전과 범종각,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과 화쟁국사비 편, 그리고 담장 아래에는 깨어진 석등 초석과 탑의 부재들이 한 편에 놓여 있다.

'우리 꽃동산' 표지석이 서 있다.

그 앞 넓적한 바위에 앉아  빨간 감이 달린 감나무를 바라본다.

석양빛이 긴 나무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전각들은 사라지고 자그마한 전각 한 채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좌전 북쪽에 그려져 있는 천수대비와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상 또한 볼 수 없으니 안타깝다.

이곳은 원효가 머물며 '화엄경소' '사십 회 향품소'를 지었던 곳으로 원효의 숨결이 흐르는 곳이다.

님을 그리며  모전석탑을 돈다.

석탑 기단 위 네 모퉁이에는 힘찬 자세의 돌사자가  석탑을 철통같이 수호하고 있다.

석탑 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이 있고,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이 입구 양편에서 감 실을 지키고 있다.

 

희명(希明)이 분황사 천수대비(千手大悲)에 빌어 눈먼 아이가 눈을 얻은 이야기를 떠 올린다.

 

삼국유사 '芬皇寺 千手大悲 盲兒得眼' 조를 옮겨 본다.

경덕왕 때에 한기리에 사는 여자 희명의 아이가, 난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는 날 그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에 그린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 옴을 두나이다

천손 천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더옵길

둘 없는 내라

하나만으로 그윽이 고칠 것이다

아아 나에게 끼쳐주시면

놓되 쓸 자비여 얼마나 큰고

 

기린다

대말(竹馬)에 파피리로 길거리에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이 멀어버렸다

자비로운 눈을 돌리시지 않았다면

몇 춘사(春社)나 버들꽃은 못 보고 지냈을꼬?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

 

석양빛이 긴 나무 그림자를 그린다

  

탑을 수호하고 있는 석탑 기단 네 귀퉁이의 돌사자

 

탑을 수호하고 있는 석탑 기단 네 귀퉁이의 돌사자

 

석탑 1층 감실 입구의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

 

보광전 앞 뜨락 감나무에는 잎은 다 떨어지고 빨간 감이 달려 있다.

보광전에 들어 약사여래에 삼배한다.

원효성사 진영에 삼배하고 조용히 가부좌하고 앉는다.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을 학자이자 사상가이다.

파계와 이적을 보인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고승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자장은 律師라 하였고 의상은 法師라 했고 원효를 聖師라 했다.

'무애' 박을 들고 춤추고 노래하고 시를 읊조리며 속박을 받지 않는 무애행으로 교화하는 원효성사

노상에서 조서를 받아 '三昧經의 소(疏)'를 지었는데 그때 붓과 벼루를 소의 머리에 놓아두었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그의 아들 설총이 원효성사의 유해를 부수어 만든 진용 소상에 설총이 지극히 공경 예배하니 그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는 소상이 있다"라고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적고 있으니,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

 

원효성사의 속성은 설(薛)씨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잉피공인데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그이 아버지는 담네 내 말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의 남쪽 -지금의 장산군- 불지촌 북쪽 밤나무골이며 사라수 아래에서 탄생했다. 

마을의 이름은 불지촌인데, 혹 발지촌이라고도 한다.

 

성사는 출가하자 그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이름을 초개사라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라 했다.

성사의 아명은 誓幢이요, 第名은 新幢이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다.

해산할 즈음에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는데, 그때는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617)이었다.

 

성사는 탄생하자 총명하고 뛰어나 학문을 스승 없이 하게 되었고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하였다.

성사는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원효는 일부러 물속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성사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아기를 배더니 설총을 낳았는데, 설총은 나면서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했다.

그는 신라 십현 중의 한 분이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통달하고 이 회(理會)하여 6경 문학을 훈해했으므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직업으로직업으로 하는 이는 그 훈해를 이어받아가며 끊어지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고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했다.

성사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란 문구에서 따서 이름 지어 무애라 하며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는 컸던 것이다.

성사가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고 스스로 원효라 일컬은 것은, 모두 불일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란 말도 또한 우리말이니 그 당시의 사람은 모두 우리말로써 새벽이라 했다.

일찍이 분황사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 회 향품'에 이르러 그만 그쳤었다.

 

또 일찍이 송사로 말미암아 몸을 1백 소나무에 나뉘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位階의 初地라고 일컬었다.

또한 바다 용의 권유에 따라 노상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의 소'를 지었다.

그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이라 했는데, 이는 또한 本覺.始覺 등 이각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또한 氣味가 상통해 唱하고 화답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眞容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 사모하여 극도의 슬픈 뜻을 표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니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으므로,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가 거주한 적이 있는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기린다.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축(三昧軸)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만가풍(萬街風)에 걸었다

달 밝은 요석궁엔 봄 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고영(顧影)만 비었다.

( 삼국유사 <元曉不羈> 조에서 )

 

보광전

 

보광전 앞뜰의 감나무

 

보광전 약사여래 입상

 

 약사여래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의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 이십오 일 조성야"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영조 50년(1774)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효성사 진영(眞影)

  

보광전 수미단의 주악천인상

 

삼룡변어정

 

고려시대 만들어진 원효를 기리는 고려 숙종(1101) 때 세워진 화쟁국사 비편

 

추사 김정희 절 근처에서 비대를 발견 확인하고, 비대좌 위에 '此新羅和諍國師之碑跡' 이라 새긴 각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경내 한 모퉁이에 있는 약사불

 

담장 아래에는 깨어진 석등 초석과 탑의 부재들이 한 편에 놓여 있다

       

범종각

 

목어

 

분황사 경내 '우리 꽃 동산'

  

석탑 주위의 나무들이 석양빛으로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반월성엔 석양빛이 쏟아진다.

둥근달이 떠 올랐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첨성대에 뿌리고 있다.

 

첨성대

문 효 치

 

 

별이 보여요

 

저 별 너머로

 

그대 얼굴 보여요

 

천년을 삭혀 온

 

긴 숨소리 들려요

 

하늘의 치마를 들추고

 

속살로 들어가는 길

 

별의 더운 눈물로 씻어낸

 

미소가 떠돌아요

 

반월성에 석양빛이 쏟아진다

 

둥근 달이 떴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첨성대에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