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당매는 오늘도 푸른데 솔거가 그린 유마상은 어디로 갔는가

2012. 9. 4. 00:00나를 찾아 걷는 길/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5) 정당매는 오늘도 푸른데 솔거가 그린 유마상은 어디로 갔는가

       (청계마을-단속사지-원정마을-운리마을-백운동계곡-마근담-사리) 

        2012. 7. 12.  목요   맑음

 

어젯밤, 바람 한 점 없는 습한 방에 모기향을 피어놓고, 잠자리에 누워 우중 산행을 떠 올리며 이리 뒤척 저리 뒤 척하였다.

웅석봉에서 어천 방향 길로 하산하다 임도를 만나 청계능선을 넘고 웅석남능선 기슭 임도 따라 운리 탑동마을 단속사지로 비를 맞으며

걸어 내려왔던 산행길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갔었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을 임도가 아닌 험한 산길을 내려오던 중간이었다면 낭패할 번 하였다.

인생이든 산행이든 길을 찾아 걸어갈 때에는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꼭두새벽 알람벨이 울려 일어나 행장을 꾸린다.

덜 마른 옷, 축축한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밖을 나서니 새벽 4:50분이다.

희끄무레한 여명

닭 울음소리, 개구리울음소리가 귓가를 진동한다.

청계마을을 나서 오르막 언덕길을 넘어 단속사지로 향한다.

푸르스름한 산 능선이 물결같이 흐른다.   

저 멀리 석탑이 보인다.

 

단속사는 웅석봉(1099m)에서 뻗어 나온 웅석남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옥녀봉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단속사지에서 앞을 바라보면 그윽하고 좌우를 둘러보면 우뚝하나 속박되지 않으며, 뒤를 돌아보면 막힌 듯하나 압도되지 않는다. 이렇듯 지리산 단속사의 풍경은 막힌 듯하면서도 뚫린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편 그곳은 지리산 골짜기인 듯하고, 들녘의 안인 듯하기도 하다.  광활하지는 않으나 지리산 동천에서 이만큼 확 트인 곳도 드물 것이다."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돌아서서 동네를 바라보니, 물이 감싸고 산이 에워싸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아늑하였다. 참으로 은자(隱者) 가살 만한 곳이었다. 러나 지금은 승려들이 사는 곳이 되었을 뿐 덕이 있는 고사(高士)들이 사는 곳이 되지 못하였구나!" 하였다. 옛 절터에 오르니 웅장한 대찰 단속사의 전각과 누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덩그런 쌍탑만 보인다. 옛 절터에 망연히 서서 단속사 천 년의  지난 이야기를 돌이켜 본다. 산천은 옛 그대로이고 정당매는 오늘도 푸른데 사라져 버린 석불 5백 구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은 어디로 갔는가...  '삼국사기' 솔거 전에서는 그의 그림을 일러 "세상에서 신화(神畵)로 전하여 온다"라고 하였고, 그 신화로서 황룡사 벽의 노송도와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이라 하였다. 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경주 분황사의 관음상과 함께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이 있는데, 이 유마상은 신라 때 솔거가 그렸다."라고 하였다.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중 단속사에 관한 글을 옮겨 본다.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다. 맑고 시원한 시냇물이 벌판 서쪽으로 흘러들었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 3-4리를 가니 계곡의 입구가 있었다. 계곡에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광제암문'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최고운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과 피어오르는 연기와 뽕나무 밭이 보였다. 시내 하나를 건너 1리를 가니 감나무가 겹겹이 둘러 있고, 산에는 모두 밤나무뿐이었다. 장경판각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빙 둘러져 있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 속에 절이 있고, '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이 있는데, 주춧돌과 기둥이 매우 질박하였다. 벽에는 면류관을 쓴 두 영정이 그려져 있었다. 이 절의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斷俗'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 비루하게 여겨 초상을 살펴보지 않았다.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 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예스러웠다. 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그래도 올라가 조망하고 난간에 기댈 만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라고 전한다. 강문경공의 조부 통정공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

북쪽 담장 안에 있는 정사는 주지가 평소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자 주위에는 산다수(동백나무)많았다.  그 동편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致遠堂'이라 전해온다.  당 아래에 새로 지은 가설물이 있는데, 매우 높아 5장의 깃발을 세울 만하였다. 이 절의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 5백 구가 있는데, 하나하나 둘러보니 그 모양이 각기 달라  그 기이함을 형용할 수 없었다.

.......

여명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서 길을 떠났다.  광대가 생황과 피리를 불면서 앞장을 서고, 석해는 길잡이가 되어 동네를 벗어났다. 돌아서서 동네를 바라보니, 물이 감싸고 산이 에워싸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아늑하였다.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승려들이 사는 곳이 되었을 뿐 덕이 있는 고사(高士)들이 사는 곳이 되지 못하였구나!  "

  

단속사 창건은,

'삼국유사'에서는 763년(경덕왕 22)에 신충이 창건했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별기에 748년(경덕왕 7)에 이준(고승전에서는 이순)이 조연소사를 개창하여단속사라고 하였다 하였고, '삼국사기'에서는 763년(경덕왕 22)에 왕의 총애를 받던 이순이 산에 들어가 중이 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였다 하였다. 위 두 기록과 단속사지 일부를 발굴하여 수습된 기와류들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판단을 하면,  이순이 748년 조연소사를 개창하여 단속사를 창건하고, 신충이 763년 단속사를 중창하여 대찰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 능선이 에워싸듯 흐른다
단속사지 쌍탑

담장을 따라 탑동마을 안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정당매와 정당비각이 있는 초입에 치자나무 하얀 꽃이 해맑게 웃고 있다.

목책으로 둘러싸인 무성한 잡초 속에 우뚝 서 있는 정당매가 보인다.

시꺼먼 그루터기가 있는 수령 630년 된 고매(古梅).

싱싱한 나뭇잎을 매단 정당매(政堂梅)는 오늘도 푸르기만 하다.

강회백이 심은 애초의 정당매는 말라죽고, 그 옆에 강회백의 증손 강구손이 새로 심은 매화가 오늘에 이르고 있어 정당매로서의 명맥을 잇고 있다.

오늘날 정당매(政堂梅)는 산청삼매(山淸三梅) 중의 하나이다.

 

강회백의 손자 강희맹은 정당매가 말라죽어 없어질까 염려하여 강회백의 유적을 만세토록 기리기 위해 말라죽을 지경이면 대대로 봉식 하게 

했던 것이다. 강구손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죽은 매화나무 옆에 새로 매화나무를 심었다. 강회백이 후손을 두었듯이 정당매도 후손을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성종 때 당시 승지였던 강구손이 증조부 강회백이 심은 정당매에 얽힌 사연을 여러 문사에게 말하여 시문을 구하여 시첩을 엮고 발문을 김일손에게 청하였다.

 

탁영 김일손의 '정당매시문후(政堂梅詩文後)'를 옮겨 본다.

 

"누각 앞에는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키가 10자 남짓 되었다. 그 아래에 오래된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반 자쯤 남아 있었다. 이 절의 승려가 그것을 가리키며 '정당매'라 하였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까닭을 묻자, 승려가 말하기를 "강통정이 어릴 적에 손수 심은 것입니다.  그 뒤 벼슬길에 나아가 정당문학에 이르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당이 세상을 떠난 지 1백여 년 뒤에, 매화나무도 죽었습니다. 증손 용휴 씨가 아버지 진산군(강희맹)의 명을 받들고 와서 그 유적을 찾아보았습니다. 죽은 매화나무를 보고 슬픈 마음이 북받쳐 그 곁에다 새로 나무를 심었는데 벌써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정당만 자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화나무도 자손을 두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강통정이 단속사에 있을 때, 초라한 서생으로 세상 밖에서 노닐다가 매화나무를 심고 떠났다. 그가 절의 승려에게 이 나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였으니 자손에게 물려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직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절의 승려가 정당매라 하고 이름을 붙여 마침내 아름다운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으니, 또한 우연일 뿐이다. 훌륭한 증손이 다시 심은 것도 강통정이 시킨 것이 아니다. 욕심을 부렸던 이문요는 그의 자손들이 평천의 꽃과 돌을 보호할 수 없었는데, 욕심이 없었던  강통정은 도리어 한 그루 매화나무를 단속사에 남겼으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조물주는 본래 욕심 있는 자를 꺼리는 법이다.

 .........

심을 만한 식물이 한둘이 아니건만, 강통정은 어릴 적 성품이 매화처럼 고결하여 매화를 골라 심었고, 진산군(강희맹)은 세상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단아한 선비였고, 그의 형 경우(강희안) 씨는'양화록'을 지어 꽃에 대한 품평을 하면서 매화를 으뜸으로 여겼고, 승지공은 조부의 뜻을 계승하여 이 매화에 더욱 정성을 기울여 오직 시들어 부러질까 걱정하였다.  이 집안에서 대대로 숭상하는 풍류와 풍격 또한 상상할 만하다. 나는 몸이 관직에 매여 있어 꿈에서나 고향을 배회하고 있다.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옛날 거닐었던 단속사를 찾을 것이다.  그래서 달이 지고 별이 총총히 빛날 때, 매화나무 아래에서 시를 지으리라. 그리고 절의 승려를 불러 "지금부터는 정당매라 부르게나"라고 말하리라. "

 

통정의 후손들이 매화나무를 잘 보전하기 위하여 정당매 옆에 정당매각을 건립하였다.

그리곤  비문과 함께 후손들의 매화시를 보전하고 있다.

정당매와 정당매각 둘레를 보니 빼곡히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치자나무 하얀 꽃이 또 해맑게 웃는다.

  

치자나무 하얀 꽃이 해맑게 웃고 있다.

 

왼쪽의 시꺼먼 그루터기가 애초의 정당매이고, 그 옆 오른쪽 매화나무가 후손 정당매이다.

 

정당매는 오늘도 푸르다

 

 

목책에 둘러싸인 정당매

 

정당매각(政堂梅閣)

정당매각(政堂梅閣)  

통정의 후손들이 매화나무를 잘 보전하기 위하여 정당매 옆에 정당매각을 건립하고 비문과 함께 후손들의 매화시를 보전하고 있다.

 

강회백의 집안 삼대, 즉  통정공 강회백, 대민공 강석덕, 인재 강희안은 시. 서. 화에 뛰어나 모두 삼절로 불렸다. 강희안은 안경. 최경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삼절이라고 일컬어진다.  저서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다.

 

'양화소록'에 있는 '단속사 정당매' 글을 옮겨 본다.

"우리 선조 통정공께서 소년 시절 지리산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실 때, 손수 매화 한 그루를 심으셨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으셨다.

 

一氣循環往復來     천지 기운 순환하여 끊임없이 돌고 돌아

天心可見臘前梅     섣달에 핀 매화에 천심을 보네

直將殷鼎調羹實     은나라 국솥에 맛 낼 매실이

謾向山中落又開     부질없이 산 중에서 피었다 또 지누나

........

단속사의 승려들이 공의 덕을 생각하고 재주를 사랑하며,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끝내 잊지 못하였다. 그래서 매화를 공처럼 대하여

해마다 뿌리에 흙을 북돋워 잘 자라도록 돌보았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전해져 정당매라 불린다. 나뭇가지와 줄기가 여러 모양으로 구부러지고 푸른 이끼도 끼어 '매보(梅譜)'에 고매(古梅)라 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영남의 한 古物이라 하겠다.

.......   "

강회백이 벼슬살이를 하다가 후일 단속사를 찾아 손수 심은 매화를 보며 지은 시가 '斷俗寺手種梅'이다.

 

斷俗寺手種梅       단속사에서 손수 심은 매화를 보며

遇然還訪古山來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滿院淸香一樹梅     한 그루 매화 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物性也能知舊主     무심한 나무지만 옛 주인을 알아보고

慇懃更向雪中開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피었네  

 

강회백의 증손 강구손이 읊은 시다.

聞香千里古山來       향기 찾아 천리길 옛 고향에 찾아오니

萬疊頭流一樹梅       첩첩한 두류산엔 한 그루 매화가 있네

如答雲奈追慕意       구름도 추모의 뜻 표하듯이 흐르는데

萬天風雲爛然開       하늘 가득한 바람 구름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었구려

 

<참고 문헌>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최석기 外 단속사 그 끊지 못한 천년의 이야기 / 용국

 

남명선생 시비

남명선생 시비

단속사지 쌍탑이 있는 길 어귀에는 빛바랜 돌기둥과 남명선생시비가 서 있다.

1565년 무렵 단속사는 남명과 남명학파의 강학처로 이용되었다.

사명대사 유정이 어린 시절 단속사에 머물렀을 때 남명이 유정에게 시를 써 주었

 

贈山人惟政       유정산인에 주다

花落槽淵石       꽃은 조연의 돌 위에 떨어지고

春深古寺臺       옛 절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別時勤記取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靑子政堂梅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푸른 솔 숲 사이로 보이는 당간지주와  그 뒤로 보이는 옥녀봉이 단속사 천 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깊은 상념에서 벗어난다. 원정마을 지나  백운동 계곡 건너 마근담을 지나 사리까지 걸어가야 하는 둘레길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당간지주 앞에 눈길을 놓는다 오랜 날들

한때 숲을 이루었고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간

여기까지 밀려와서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간

깃발을 올려 손짓할 수 없는 날들

나도 한때 펄럭여보고 싶었다

마음의 당간지주 나 이미 버린 지 오래였으나

독하게 일별 한 것들이 비쭉비쭉

이제 와서 고개를 내밀다니

 

때로 무너지고 싶지 않은 삶은 어디 있겠어

한 번쯤 지독하게 무너지고 나서야

결국 은산 철벽 막다른 나를 알고 나서야

문득 실려오는 매화꽃 향내음

그래 강물만이 흐르는 건 아니지 

                            

당간지주 앞에 오래 머물렀다

해묵은 빚처럼 내미는 것들을 비로소 세워 놓는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도리질을 치며 쏟아내는 내 마음의 고해성사

노을이 한쪽 산자락을 가만히 끌어내려

아린 눈 내리 쓸어 감겨 주는가

메아리만 아득하구나 저 허공

머리 푼 마음이 먼 산을 넘는다 

 ( 내 마음의 당간지주 / 박 남 준 )

 

당간지주 너머로 옥녀봉이 보인다.
당간지주 2기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4년 5월 부분을 찾아 1기는 복원하고  나머지 1기는 찾지 못한 부분은 다시 깎아 만들어 붙여 복원하였다.

 

 

겹겹의 산들이 에워싼 속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다물평생교육원을 지나,  둘레길 이정목 따라  우측으로 꼬부라져 원정마을로 향한다.

새벽의 푸른 들 위로 안개가 피어오른다.

 

 

  

 

 

원정마을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수형의 느티나무가 반긴다.

길을 걷다 뒤돌아 다시 보니 부챗살처럼 펼친 느티나무가 새벽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늠름하게 서 있다.

들에 피어오르는 운무를 보며 산간 농로를 걷는다.

비 그친 후의 이른 아침 산과 들은 푸르름을 더하고 파란 하늘은 상큼하기만 하다.

산골마을은 생기가 넘친다.  논배미 논꼬에는 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밭의 작물들은 푸른 생기로 넘쳐난다.

산새소리가 들린다.

  

 해탈

 차 성 우 

 

비 그친 아침

햇살에 빛나는

풀잎처럼

 

지니인

모든 것

다 씻어내니,

 

부질없는

몸뚱이

하나만 남네

 

  

마을을 벗어나 임도를 따라 한참 오르니 쉼터 정자가 나온다.

시원한 조망처에 배낭을 풀고 휴식을 한다.

 

 함구(緘口) 

 이 성 부

 

오래 산에 다니다 보니
높이 올라 먼데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래 높은 데 오르다 보니
나는 자꾸 낮은 데만 들여다보고
내가 더 낮게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매사를 깊고 넓게 생각하며
낮은 데로만 흐르는 물처럼
맑게 살아라 하고 산이 가르쳤습니다
비바람 눈보라를 산에서 만나면
그것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내 버릇이었는데
어느 사이 그것들을 피해 내려오거나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올라갈 때가 많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낮은 데가 더 잘 보이고
내가 더 고요해진다는 것을 갈수록 알겠습니다나
나도 한 마리 미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입을 다물어 나의 고요함도 산에 보탭니다 

 

 

산 마을을 조망하며 임도를 걷는다.  안개 낀 산중 소나무 숲길을 걸어 산 허리를 돌아 오른다.

간밤에 내린 호우로 인하여 산 골짜기에 만들어진 작은 폭포들이 가는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해 춘다.

 

고요한 산길.  이따금 정적을 깨뜨리고 산새가 쪽쪽쪽 노래한다.

나무 숲 속 바위 아래 수북한 가랑잎과 소나무 바늘잎 속에 노루발풀이 솟아 있다.

'노루발!' 하고 이름을 부르며 발길을 멈추고 허리 굽혀 눈맞춤한다.

잎이 노루의 발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밑동에 모여난 두껍게 보이는 뿌리잎은 둥근데 무늬가 나 있다.

쭉 솟아 오른 여러 꽃줄기 끝 총상꽃차례에 조발조발 연황백색 꽃이 아래를 향해 피었는데 긴 암술대를 쑥 내밀고 있다.

 

노루발 

김 승 기 

 

깜깜한 솔숲 송진 내를 맡아야만

꽃을 피우느냐

 

지상 고뇌의 소리를

날마다 하늘에 올리는

소녀의 기도

 

합장한 손이 노루발을 닮았네

 

물소리 얼어붙은 겨울산을

푸르게 품어 안으며 깨어 있었더냐

얇디얇은 비늘 잎 한 장

그 넓은 치맛자락으로 따뜻하게

온산을 덮었네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하얀 종소리

벅찬 가슴으로 아프더냐

깊은 산속 외로운 겨울강을

일찍 서둘러 건너왔으면서도

느리고 느리게 새잎 틔우며

한여름 되어서야 풍경으로 우느냐

 

노루를 닮아서 순하게 맑은 눈동자여

산 그림자 비치는 우물 안

감춰둔 꽃술을 언제 보여 주려나

  

산중에서 홀로 피었다 지는 해맑은 꽃들...

꽃이 보일 적마다 이름을 가만히 부르며 발길을 멈추었다 또 걷는다.

노루발 :    꽃줄기 끝 총상꽃차례에 조발조발 연황백색 꽃이 아래를 향해 피었는데 긴 암술대를 쑥 내밀고 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우렁찬 계곡의 물소리가 들린다.

간밤에 내린 폭우로 계곡의 흰 바위에 부딪치며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 물줄기의 기세가 등등한다.

백운계곡이다.

수많은 리본이 달린 나뭇가지 아래 통나무 다리를 걷는다..

마근담 1.9 Km 이정표가 보인다.

마근담으로 넘어가기 전에 남명 조식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백운계곡을 보기 위해 임도를 따라 마을까지 내려선다.

 

백운동 계곡 통나무 다리

 

  

마을이 시작되는 머리에 닿는다.

허기가 느껴져 백운계곡 가에 있는 영신펜션 식당으로 들어간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식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  안된다는 것을 간곡히 부탁하니 산채비빔밥을 해 주겠단다.

한 참을 기다려 감사히 먹고, 수통에 찬 물을 한 통 가득 채우고 일어서니 기운이 솟구친다.

 

나이 드신 펜션 주인에 '용문동천' '백운동' 각자가 있는 바위 위치를 물으니 영신펜션 마당에 있다고 하며 위치를 가르쳐 준다.

놀랍게도 마당가 철조망 울타리 바로 뒤편에 용문동천 각자가 있는 바위가 있다.

일찍이 남명 조식이 제자들과 노닐며 남겼다는  '白雲洞'  '龍門洞天' 글씨가 바위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철조망 울타리 뒤편에 '용문동천' 각자 바위가 있다.

 

'龍門洞天' 각자 바위

 

'龍門洞天' 각자

 

마당 한 모서리에 놓여 있는 '白雲洞' 각자 바위

 

'白雲洞' 각자

 

 웅석봉에서 갈라져 나온 달뜨기 능선 자락이 길게 뻗어 나와 덕천강가에 닿으면서 계류를 쏟아 내는데 이 계곡이 백운동 계곡이다.

" 지리 산록 중에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계곡이 백운동 계곡이다.

일찍이 남명이 남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之所) 등의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으며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는 글을 지은 작품의 현장이기도 하다. 백운동 용문폭포 각자 바위를 뒤로하고 오르면, 목욕을 하면 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多知沼)가 있다.  폭이 26m, 길이가 30m에 달하는데 주변이 모두 바위라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줄을 잇는다. 또한 높이 4m 여의 백운폭포와 다섯 곳의 폭포와 담(潭)이 있다 하여 이름도 오담폭포인 곳을 비롯해 ‘영남제일천석’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등천대(登天臺)는 정말 계류의 물보라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거세다. 이외에도 옳은 소리만을 듣는다는 청의소(聽義沼), 아함소, 장군소, 용소 등의 소(沼)와 탈속폭포, 용문폭포, 십 오담폭포, 칠성폭포, 수왕성폭포 등이 있으며 사림 학파의 거두로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적 자주였던 남명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안빈낙도(安彬樂道)의 풍류를 되새길 수 있는 계곡이다. "         (산청문화관광)

 

 

등천대(登天臺) 일대

 

'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각자
바위 오른쪽 끝ㅌ에  '등천대(登天臺)' 각자가 보인다.

 

'용문폭포(龍門瀑布)'  '용문천(龍門川)' 각자 바위

 

'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 각자    '용문천'이라 각자 된 바위 뒤에 새겨져 있디.   아마도 그의 제자들이 남명선생이 지팡이와 짚신을 벗어 두었던 곳에 이 글자를 새긴 듯하다.

 

용문폭포

 

백운폭포

 

어제 내린 호우로 백운동 계곡은 우렁찬 폭포소리로 귀가 먹먹하다.

계곡산행으로 통나무다리가 있는 곳까지 오르려 계획했으나 엄청나게 쏟아지는 물로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 

마근담을 거쳐 사리로 가는 둘레길을 가기 위해 임도를 따라 오른다.

산기슭 작은 산골짜기 암반 위로 물이 흐르고 있다.

마근담으로 가는 갈림길 직전 계곡으로 내려서 마지막으로 희디 흰 암반을 타고 급히 흘러 내려가는 백운계곡의 물길을 바라본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눕혀 놓은 것 같은 백운계곡.

그래서 남명 조식은 희디 흰 너럭바위와 수많은 푸른 소와 폭포를 거느린 이곳 백운계곡을 일러 용이 사는 '용문동천'이라 하였다.

 

남명은 '백운동에 놀며'라는 시를 남겼다. 

 

遊白雲洞
天下莫雄所可羞
一生筋力在封留
靑山無限春風面
西伐東政定未收

 

백운동에 놀며
천하의 막웅들이여 부끄럽지 않은가
일생동안 휘둘렀다는 힘이 고작 조그마한 땅 한 조각 차지하는 데 있었으니 말이다
청산은 언제나 청산 그대로이다
서를 치고 동을 친들 땅은 영원히 땅 그대로 인 게야

 

 

마근담 1.9Km 이정표가 있는 곳에 다시 올라왔다.

둘레길 이정표 따라  산길을 걷는다.

 

 

백운동 마을 사람과 마근담 마을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길, 그 길 따라 걷는다.

산새소리가 들리는 울울한 참나무 소나무 숲길을 호젓이 걷는다,

허리만큼 자란 산죽 위로 바람이 불어온다.

싱싱한 푸른 산죽의 맑은 향이 묻어온다.

두상꽃차례에 연한 자주색 꽃 일월비비추가 다소곳 고개 숙이고 있다.

 

 

산죽
일월비비추

 

 

사리(絲里) 임도를 걷는다.

'마근담 농촌체험휴양마을' 입간판을 지난다.

 

마근담 골짜기 끝자락에 감투봉이 있어 마치 담처럼 막아서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 '막은담'

이 '막은담'이었던 이름이 한자 표기 과정에서 애초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마근담(麻根淡)이 됐다고 한다.

 

 

깊은 산골짜기 마근담 계곡을 따른 길을 걷는다.

흑염소 방목장을 지나고 손장굴 입구 표지목도 지난다.

울창한 나무와 숲 속을 흐르는 마근담계곡은  흰 암반과 소와 폭포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계곡이다.

계곡 따라 걸어 사리마을에 도착한다.

 

흑염소 방목장

 

 

사리마을 버스정류장 슈퍼 평상에 배낭을 푼다.

맥주 1캔을 사서 목을 축여 갈증을 푼다.

 

 

 

산천재 앞뜰의 '南冥梅'라 부르는 매화나무  산천재에서는 멀리 천왕봉이 바라보인다.

 

산천재 앞뜰에는 오늘도 싱싱한 잎을 단 매화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남명 조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 된 위인이다.

남명 조식은 61세가 되던 해(1561)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이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고, 뜰 앞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그는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를 몹시 사랑했으며, 이 매화나무를 보며 시를 지었다.

 

남명이 사랑했던 이 매화나무는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져 자랐는데 지금도 건강히 자라고 있다.

해마다 3월 말이면 어김없이 연한 분홍꽃을 피운다.

450년 긴 세월을 간직한 고매(古梅),  이 남명매(南冥梅)는 산청삼매 중의 하나다.

 

밑에서 부  크게 세 갈래로 갈라져 자란 남명매(南冥梅)

 

앞쪽으로 덕천강이 흐른다

 

 

산천(山天)이란 '주역' 대축괘(大畜卦)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덕산 시냇가 정자  앞뜰을 서성이며 남명 조식은 나직이 시를 읊는다.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쓰다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鐘

非大구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장중한 울림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산천재에는 벽화 세 점이 있다.

툇마루에 올라서서 보면 산천제' 현판 정면 위에 노송 아래서 신선이 바둑을 두는 그림이 있는데 이는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이다. 중국 진시황 때 난리를 피하여 산시 성 상산에 들어가 숨은 선비 네 사람 즉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 선생을 말하는데 그들은 벼슬을 하지 않고, 오랜 세월 상산에 숨어 지냈는데 하산하였을 때 다 같이 80여 세가 되어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 되어 이렇게 불렀다 한다. 툇마루 왼편 윗벽에는 농부가 소를 몰고 밭을 가는 그림이 있는데 이는 농본의 사상을 후진에게 일러주는 내용이다. 툇마루 오른편 윗벽에는 버드나무 밑에 귀를 씻는 선비와 귀 씻은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몰고 상류 쪽으로 가는 농부의 그림이 있는데, 이는'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허유와 소부의 고사를 그린 것이다.

허유라는 은자는 요 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맡아 달라는 말을 듣고 거절한 뒤,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강물에 귀를 씻었다.

그러자 소부라는 이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 쪽으로 소를 몰고 올라갔다고 한다. 선비는 허유고 농부는 소부이다.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올곧은 산림처사로 고고하게 살았던 남명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   네 명의 신선이 노송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그림

 

경작도 :   농부가 소를 몰며 밭을 가는 그림

 

허유소부 고사도 :  선비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귀를 씻고 있고, 농부는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 쪽으로  소를 몰고 올라가는 그림

 

 담장을 나서니 배롱나무에는 붉은 꽃 두 송이만 보이고 가지 끝마다 온통 둥근 열매가 조발조발 달려 있다.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가슴에 전해진 장중한 울림이 아직도 남아 있다.

 

 

 

꽃피는 기간이 길어 '목백일홍'이라 부르기도 하는 배롱나무 가지 끝에 둥근 열매가 조발조발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