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수께끼의 돌무덤 전 구형왕릉을 찾아서

2012. 8. 25. 01:45나를 찾아 걷는 길/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3) 수수께끼의 돌무덤 전 구형왕릉을 찾아서

      (세동마을-구형왕릉-왕산-쌍재-수철-지막-평촌-대장-옥산-내리 한밭마을) 

      2012. 7. 10.  화요  맑음 흐림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서 세진대를 향하여 언덕길을 오른다.

법화산 능선이 운무에 묻어 있다.

다랭이 논배미에는 벼가 새파랗게 자라고 있다.

  

법화산이 운무에 묻어 있다

 

 

 

세진대 가는 길

 

 

  

세진대(洗塵臺)

너럭바위 위에는 수령 400년의 커다란 소나무가  우뚝 서서 법화산과 엄천강, 용유담을 굽어보고 있다.

소나무 쉼터, 너럭바위 또는 세진대(洗塵臺)라 불린다.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 

축 처진 소나무 가지를 손으로 들추며 지나다녀야 한다.

바위 끝은 낭떠러지인지라 발길이 조심스러워진다.

너럭바위 오른쪽 바위에는 '洗塵臺'라 새겨져 있다.

축 처진 소나무 가지 사이 바라보니  멀리 운무가 띠를 만들며 산 능선으로 피어오르고 다.

 

세진대에서 200m 떨어진 곳에 국조단군성전인 '지리산마적천진전'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마적사(馬跡寺)가 있었던 곳이다.

그 당시 마적사를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날 때 마음과 몸을 씻고 올라갔다 하여 '세진대(洗塵臺)'라는 글자를 새겼다 한다.

소나무 아래 너럭바위에 서서 멀리 피어오르는 운무를 망연히 바라본다.

세속에 찌든 몸과 마음이 씻어지는 듯하다.

 

 

수령 400년 된 소나무 아래로 커다란 너럭바위가 보인다.

 

 

 

 

 

'洗塵臺' 각자

 

 

 

축 처진 소나무 가지

 

 

 

처진 소나무가지 사이 멀리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다.

 

 

 

용유교 용유담 그리고  피어오르는  운무가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옛  마적 사지     - 지금은 국조단군성전인 '지리산마적천진전'이 있다.

 

숙소로 돌아오니 6시 20분이다.

배낭을 메고 나서니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소나무쉼터' 주인장은 벌써 차 시동을 걸고 있다.

어제저녁 식사 시, 구형왕릉과 왕산을 넘어 수철리로 가는 앞으로의 둘레길 여정 계획을 이야기하니, 이곳부터 구형왕릉 까지는 포장도로 길이라

지루하고 힘들다며 자동차로 구형왕릉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끝내 우기신다.

그는 이곳 함양 산청의 산길을 훤히 꿰뚫고 계신 분이다.

도보로 4시간 여 걸어야 할 길을 자동차로 가니 15 분여 만에 구형왕릉 들머리 덕양전에 도착한다.

그분께 감사드린다.

 

지리산 북부 산록에는 가락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왕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깃대봉은 가락국을 상징하는 깃대를 꽂은 곳이며, 성곽의 모습이 남아 있는 왕등재는 왕이 올랐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고,

칠선계곡 쪽에는 나라가 있었던 골짜기란 뜻의 국골이 있으며 곡식을 보관했다는 '두지터'와 '얼음터'가 있다.

추성리도 국골에 있었던 추성산성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왕산(王山)에는 옛날 가락국 수로왕 및 구형왕 그리고 신라에 공훈으로 봉작된 흥무왕(김유신), 즉 삼왕(三王)의 유적이 있다.

왕산은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다.

山淸은 옛날 변한(弁韓)의 땅인데, 가락 때에는 知品川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에 山陽縣으로 고쳤고, 고려 말기에 山陰縣으로  고쳤고, 조선조에서는

그대로 산음현이라고 하다가 영조 때에 山淸縣으로 고쳤다.

 

덕양전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

홍살문과 돌담을 두르고 있는 덕양전은 가락국 최후의 왕인 구형왕과  그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덕양전에 있는 이전기념비에는 1928년 7월의 홍수로 수정궁(태왕궁) 자리가 떠내려가서 연신문, 만동문, 화수정, 동재 고자사 등의 건물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으며,  1955년 수정궁이란 현판을 덕양전으로 고쳐 달았고 흩어졌던 건물을 덕양전으로 옮기는 작업을 끝냈다고 한다. 역대 가락국 왕의 별궁인 태왕궁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이 왕위를 아들 거 등에게 양위하고 왕후와 함께 살기 위해 왕산에 지은 별궁이다. 구형왕은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선양한 후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옮겨 살다 4년 뒤인 536년에 세상을 떠났다.

 

  

덕양전 앞의 홍살문

 

 

 

덕양전  - 가락국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

 

덕양전을 지나 수수께끼의 돌무덤을 찾아가는 길 왼편에는 비각  그리고 오른편에는 돌로 쌓은 단이 보인다.

그 단위에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에는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라 씌어 있다.

화랑시절 김유신이 그의 증조부인 구형왕릉을 찾아와 7년간 능을 보살피며 대를 쌓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후손이 이를 기려 근래에 세운 비이다.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

 

 

 

비각과 소나무쉼터 주인장

 

비각을 지나 300 여미터를 지나니 내를 건너는 돌다리와 홍살문이 보이고, 그 너머 푸른 나무숲에 둘러싸인 돌무덤이 보인다.

 

돌다리와 홍살문 너머 푸른 나무숲에 둘러싸인 돌무덤이 보인다.

 

 

 산청 전 구형왕릉 (山淸 傳 仇衡王陵)   / 사적  제214호 / 소재지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 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화재청)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기록에는 그가 가락국 10대 왕이며 재위 521-532년으로 가락국 겸지왕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신라 각간 벼슬 출충의 딸인 숙이요, 김유신의 증조부라고 씌어 있다.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 19년에 신라의 공격을 받고 항복하여 나라를 신라에 바쳤으므로 신라 왕조로부터 상등의 벼슬을 받고 김해지방을 식읍으로 허가받았다고도 한다. 그는 일명 구해(仇亥)라고도 한다.'

 

1798년 민경원이라는 유생이 왕산사의 나무함을 열어 사문(沙問) 탄영이 지은 '왕산사기'를 찾아냄으로써 이 돌무덤이 구형왕릉이란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으나,  그러나 이 기문은 이차적 자료이므로 구형왕릉이라 단정할 만한 사료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명확한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해 구형왕릉이라 확정받지 못하고 전(傳) 구형왕릉이라 불린다.

  

조선 후기 문인 홍의 영(1750-1815)이 쓴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을 옮겨 본다.

"지리산의 기슭에서 동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면 산청현이 되는 데, 건유 한 자가 그 이름을 왕산이라 했다. 산 허리를 깎아 대의 터가 평평한 것을 왕대라 하고, 대의 아래는 삼한의 고찰인 왕산사가 있고, 왕산사의 아래 수백 보가 되지 못한 곳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고 그 층계를 7급으로 하고, 그 높이는 3장은 됨직한데, 서로 전하기를 대왕릉이라 하였다. 무릇 한 산의 안은 예부터 모두 왕으로 일컬어졌는데, 대왕 산릉의 영험한 응답과 특이한 자취가 남쪽 지방에 소문이 났고, 등나무나 칡덩굴의 줄기가 그 무덤을 침범하지 못하고, 까마귀와 참새가 감히 날아서 넘지를 못했다고 한다.

......

지난해 무오 영남이 큰 가뭄이 들어 봄부터 늦여름까지 한 점의 빗방울도 내리지 아니하였는데, 고을의 선비인 민경원은 남쪽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었다. 붕우들과 청결히 재계하고 우양을 두터이 장만하고, 제문을 지어서 능의 아래서 비를 빌었더니, 아침나절이  끝나지도 아니하여 큰 비가 갑자기 왔다. 민이 비에 묶여 귀가할 수가 없어, 왕산사에 머물면서 절의 승려와 신령스럽고 기이함을 말하면서, 고적을 물으니, 승려가 말하기를, '고적이 진실로 많지만 비밀이라 감히 열 수가 없다, '고 했다.  억지로 청한 뒤에 옛 나무함을 내어오니, 특별한 장식이 매우 심히 엄숙했다. 드디어 밀어서 여니, 사문(沙門) 탄영(坦瑛)이 지은 산사(山寺) 기문 한 권이 있었다. 탄영은 백 년 전 이름난 승려였다. 그 기문에 말하기를, "방장산의 동쪽 기슭에 산이 있고, 절이 있는데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는 왕릉이 있는 고로 말하길, 왕산이라 하고, 관할 수령이 능묘를 보호하는 고로 왕산사라 하니, 사(寺)는 왕의 수정궁이요, 왕은 가락국 10대 구형왕이니, 신라에 멸망하고, 여기에 와서 거처하다가 생을 마치자 장례 하니, 실로 양 나라 대통 8년이다. 왕의 증손자 대장군 흥무왕 유신이 왕대에 수로왕의 사당을 세우고, 이에 구형왕의 사당을 이 절에 세우니, 저승길에 제사를 올리고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은 까닭이다. 세세로 능묘를 닦아 9 결로 제전을 하여 향화를 그치지 않게 하고, 승려들이 정성을 다했더니, 세월이 여러 번 변함에 병화를 자주 겪음에 

절도 이미 재가 되어서 언덕 빼기만 남았다. 또 절의 벽에 먼지와 그을음 가운데 옛 현판을 얻었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가락국 구형왕이 활과 칼을 이 절에 남겨두고, 그 삶을 마침에 이 절에 장례를 하고, 돌을 쌓아 능을 만들었다. 신라 문무왕이 구형왕의 외손으로 제전 30경을 주어서 향화에 밑천하게 하였고, 왕의 증손자 대장군 유신이 7년 동안 여기에 거처하면서 능을 모셨다.'라고 하였다.  이 날에 기문과 제자를 보니, 비로소 이 산과 대와 사를 왕으로 이름 지은 것이 모두 구형왕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

드디어 벽에 쓰인 글과 활과 칼의 말로 승려에게 따져 물으니, 이에 감히 숨기지 못하고 , 감추었던 옛 자취를 모두 내어 보여주었다. 활은 좀먹고, 칼은 푸른 녹이 슬었다. 또 한 벌 왕의 옷과 두 개의 진상이 있으니, 대략 그 전형을 분변 할 수가 있으니, 그 위에 제자하 기를  "구형왕의 형상이다.'라고 되었고, 그 하나는 부인의 상으로 후빈의 복장으로 제자는 없으니, 생각해 보니, 왕비 계화 후비이다. 삼가 살펴보니, 가락국은 수로왕이 한 나라 광무 건무 18년에 일으켰다. 붉은 끈에 매달려 내려온 금궤의 알에서 나와서 신령스럽고 기이함은 헤아릴 수가 없다. 5 가야로써 나라를 삼아 거듭. 질지 등의 여러 왕을 거쳐 10세의 구형왕에 이르니, 이때 신라의 병사가 해마다 침벌 했다. 구형왕이 나라를 버리고 읍에 있는 방장산의 동쪽에 가니, 이 국사의 전함이 소여하여 상고가 가능하다. 왕의 손자 김서현이 신라에 벼슬하여 지위가 상상에 이르고, 증손자 유신에 이르러서는 위대한 공훈과 특수한 공렬이 있어 삼한을 통합함에 역사에 전함이 천고에 빛난다. 그 선조를 위하여 능침 모시기를 7년 함에 사당을 세우고, 능 앞에 대를 쌓아 평상시 활쏘기를 익히니, 이것도 가문의 족보에 전하는 바이다. 아! 구형왕과 대장군으로부터 이제까지 대개 1200년이다. 그 옛 자취와 남긴 공렬이 충분히 천지와 더불어 모두 폐할만했다."

.........  "

 

승려 탄영이 쓴 왕산사 목함기(木函記)를 또한 옮겨 본다.

"산양현의 서쪽 모퉁이 방장산의 동쪽 기슭에 산이 있으니, 왕산이라 하고, 절이 있으니 왕사(王寺)라고 한다.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는 왕릉이 있다. 그러므로 왕산이라 한다. 관할 수령이 능묘를 보호하기 때문에 왕사라고 한다. 절이 본래는 구형왕의 수정궁이었다. 능은 곧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이 묻힌 玄宮(무덤)이다. 소양 대통 연간에 신라 법흥왕이 와서 가락을 공격하니, 가락의 구형왕이 차마 토지 때문에 백성을 살상시킬 수가 없어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자, 강등하여 금관군 도독으로 삼고, 뒤에 금관군 전체를 식읍으로 주었는데, 구형왕이 그것을 버리고, 여기 와서 살다 생을 마치니,  장례를 함에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다. 여지(與地)의 왕산지에 말하기를, " 산중에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어 사면이 층계가 있다. 세속에서 왕릉이라고 전하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구형왕의 손자 대각 간 서현이 궁을 버리고 절을 만들었고, 구양왕의 증손자 대장군 흥무왕이 수로왕을 사당에 추봉 하고, 이에 구형왕의 사당을 이 절에 세우니, 저승길에 조부께 제사드리고 향화를 올리고 명복을 비는 사찰이다. 인하여 능을 모시길 7년에 대를 쌓아 활쏘기를 익힌 고로 지금까지 사찰의 오른편에 김장군 사대가 있다 한다.

신라 30대 왕 법민이 분부하여 말하길, " 짐이 구형왕의 외손이다. 중사를 보내어 석공을 거느리고 가 엄연하고 청결한 제사의 의식을 하도록 하고, 왕사를 거듭 새롭게 수리하고 특별히 근처의 30경의 전답을 봉해 주어 향화를 받드는 밑천을 삼게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왕릉이 오래되어 황폐하고 왕사 또한 폐하였다. 사물이란 항상 초췌할 수가 없으니 때를 얻어서 영화롭게 되고, 道란 끝까지 막힐 수가 없으니 인물을 기다려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고려 신종 4년(1201)에 주군에 지시를 내려 왕릉을 중수하게 하고, 아울러 王寺도 수리하도록 하였다. 우리 조선조의 선조 흑룡(임진 1592)의 해에 청의(왜적)를 입은 사람들의 난리(임진왜란)에, 이 산의 절과 능묘가 모두 훼손되어 없어져, 금전(사찰)은 이미 재가 되고, 언덕만 남았다. 다만 들리는 것은 산봉우리 원숭이의 슬픈 휘파람 소리와 골짜기 새들의 슬픈 울음소리뿐이었다. 순치 7년 (조선조 효종 1년 1650)에 승려 무리가 또 이 절을 중건하여 매몰된 사당의 신주를 다른 곳에 묻고, 부처를 왕의 사당에 도로 두었다. 이미 그 일을 마침에, 사문 법영이 그 절과 무덤의 옛 자취 기록한 것을 소매에서 꺼내어 보이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거늘, 감히 문장이 천박 다는 이유로만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본기를 살펴보니, 山寺가 王으로 이름을 하게 된 것이 수로왕을 위한 사당을 건립했던 곳이요, 구형왕이 손위 하여 거처한 터이고, 흥무왕이 창건한 바의 절이고, 신라 문무왕이 봉한 산이고, 고려 신종대왕이 중건한 곳으로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로는 왕릉이 있고,  가운데는 왕의 화상과 남긴 옷 및 사용하던 활과 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가락국의 여러 왕들의 유적과 신라와 고려의 조정에서 준 바의 물건이 심히 많았으니, 왕릉본적에 말한, "능묘를 배회하니 사위성의 백옥이 아직 있고, 절 가운데 배회하니 수달의 황금이 아직 있다."라는 이 한 구절에 이미 지극히 알 수가 있다. 이제는 모두 병화에 소실되고, 다만 두 폭의 화상과 한건의 천기와 좀먹은 활과 쇠잔한 칼이 각기 하나씩 있었으나, 이 또한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호할 수가 없었기에, 나무 상자 가운데 간직하여 백세의 뒤를 기다리게 명령하였다. " 

 

 

전 구형왕릉 전경

 

수수께끼의 돌무덤은 경사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축조되었는데 약 1m 높이의 돌담장이 에워싸고 있다. 7개의 층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높이가 7.15m이며 방형이지만 앞면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되어 있다. 꼭대기는 타원형의 봉분 같은 모양이고, 앞면 네 번째 단 중앙에는 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의 작은 감실이 있는데 내용물도 없고 용도도 모른다. 돌무덤 앞면 중앙에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고, 석단 석등이 있으며 그 좌우에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한 쌍이 있는데 이 모든 석물들은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이 지방의 전설 중에는 구형왕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라고 하여 살아남은 군졸들이 시신을 매장하고 잡석을 하나씩 포개어 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돌무덤은 석탑의 요소가 군데군데 섞여 있고,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가야 묘제의 외형적 특징은 흙으로 덮는 높은 원형의 무덤으로, 외형적으로 판단하면 이 돌무덤이 가야와 관계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명확한 사료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구형왕릉 앞에 '傳'자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 전 구형왕릉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수많은 돌들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침묵하고 있다. 돌무덤의 수수께끼가 풀릴 날이 언제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미 1,500년 가까이 장구한  흘러갔는데도 말이다.

 

 

돌무덤 앞에는 '가락궁양왕릉'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네 번째 단의 중앙에 감실이 보인다.

 

 

'가락국양왕릉' 비석과 석등 그리고 좌우에 문인석 무인석 각각 한 쌍이 보인다

 

 

 

옆에서 본 전구형왕릉

 

 

 

 

호각

 

 

돌다리를 되돌아 건너 왕산 등산로 이정목이 있는 오른쪽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붉은 소나무가 울울히 서 있다.

소나무는 변치 않는 마음이다.

 

 

 

40여분 산길을 걸어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류의태 약수터 300m라고 표기된 이정표가 보인다.

약수터로 올라가는 좌측으로 풀더미에 묻혀 있는 4기의 석종형 부도가 보인다.

우측 산기슭은 역대 가락국 왕의 별궁인 수정궁이 있었던 곳이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이 짓고 마지막 임금 구형왕이 숨진 곳이다.

 

가락국의 유적을 찾아 돌아다녔던 지난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수정궁터는 무성한 풀숲에 가려 있다.

풀숲에는 하늘말나리가 하늘을 향해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옛 것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그립고 외롭거든  / 유응교

 

누군가가 그립고 외롭거든
꽃을 보아라.

감꽃을 보면
산 너머
시집간 누나가 떠오르고
메밀꽃을 보면
고향생각이 나리니
누군가가 그립거든 꽃을 보아라.

 

라일락 향기 바람에 날리면
천국으로 떠나간 어머님의 품이 그립고
치자 꽃향기 장독대 울타리에 번지면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지리니
어머니가 보고 싶거든
라일락 그늘아래서 치자 꽃을 바라보라

 

뜨거운 사랑 하나
이루지 못하고
멀리 떠나간 연인이 그립거든
물 위에 떨어져 흘러가는
동백꽃을 바라보라
달밤에 잠 못 들고 임이 그립거든
홀로 밤바람에 흔들리는
달맞이꽃을 바라보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그 사랑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눈부신 얼굴로
쓰러질 때까지 임을 향한
해바라기를 보아라

 

누군가가 그립고 외로워
견디기 어렵거든
그저 한없이 꽃을 보아라!

 

  

한없는 평화로움을 느끼며 '류의태약수터'를 향하여 걷고 있다.

 

'류의태 약수터  0.3KM' 이정목이 서 있다.

 

 

4기의 석종형 부도가 풀숲에 묻혀 있다.

 

 

 

약수터 가는 길

 

풀숲에는 하늘말나리가 하늘을 향해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柳義泰 약수터

신의 류의태 선생은 물에는 무릇 33가지 종류의 물이 있다 하였으며, 또한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물을 가려서 써야 한다고 하였다. 물 중에 으뜸은 정화수(井華水)이고, 두 번째로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한 한천수(寒天水)인데, 장복하면 반위(위암)를 다스린다고 하였는데,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돌너덜 아래 자리 잡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

대롱을 따라 흐르는 물을 수통에 받아 연거푸 마시니 땀으로 흥건한 몸이 서늘해진다. 수통에 물을 가득 꼭꼭 채우고 일어서니, 큰 물통에 이미 물을 받고 쉬고 있는 장년으로 보이는 분이 있어 약수에 대해 물으니, "여름에는 차고 시원하며 눈 내리는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명한 약수"라고 한다. 긴 세월이 흘러 것만 오늘도 변함없이 왕산의 정기받은 샘물은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쪽쪽쪽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철망에 매어 놓은 리본이 바람에 펄럭인다.

 

약수터 옆에 서 있는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류의태 약수터 유래

 류의태 선생은 1516년(중종 11년)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에서 출생하여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의 스승으로 당대(조선 중기) 최고의 신의로 알려져

 있으며, 선생의 몸을 제자 허준에게 시술토록 하여 해부의학의 효시를 이룬 살신성인의 의술가이시다.

 류의태 선생은 산청군(당시 산음현) 금서면 화계지구에서 의술활동을 하였으며, 왕산의 자생약초에 본 약수터의 물로 탕액을 조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 약수는 돌너덜 아래의 서출동류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고 있다."

돌 너 널  아래의 류의태약수터

 

 

 

 

 

  

리본이 매달린 철조망 옆 통나무 다리를 건너 망경대를 향하여 걷는다.

빼 욱한 소나무 숲을 지나고, 산수국 군락지도 지난다.

너덜지대를 지나  또다시 소나무숲을 지난다.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니 잠자리 떼가 무리 지어 날아오른다.

잠자리 떼 따라 눈길을 위로 주니 하얀 망경대(望京臺) 표지석이 보인다.

40분 걸려 평평한 땅이 있는 망경대 바위군에 도착한다.

 

 

 

 

 

 

 

 

 

 

 

잠자리 떼가   무리 지어   날아오르고  있다.

 

 

바위군들이 모여 있는 이 망경대는 선비의 충절이 깃들어 있는 바위다.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를 지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는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 두문동 72인의 유신 가운데 한분으로,

고려에 끝까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지리산 기슭인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 왕산 중턱 바위에 올라 송경(고려의 수도)을 향해 절을 하며 고려를 그리워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절개와 의리를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망경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바위채송화, 산수국, 터리풀, 큰 까치수영 등 풀숲에 핀 야생화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구절양장으로 흐르는 경호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위채송화

 

산수국

 

 

 

큰 까치수영

 

 

구절양장 으로 흐르는 경호강

 

한글로 '왕산'이라 써진 표지석이 있는 봉우리에 오른다.

그런데 이 봉우리는 왕산 정상이 아니다.  어느 모 산악회에서 잘못 알고 세운 표지석이다.

필봉너머 멀리 웅석봉과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왕산 정상으로 잘못 알고 세운 표지석

 

 

 

필봉너머 웅석봉과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이름 모르는 노란 야생화가 군락을 지어 피어 있다.

수많은 잠자리 떼가 날고 있다.

붉은 엉겅퀴 꽃이 보인다. 엉겅퀴 열매 위에 잠자리가 앉아 있다.

소나무 사이로 붓끝이 연상되어 이름 지은 필봉(筆峰)이 바라다 보인다.

혹자는 여인의 가슴을 연상해 유방봉, 유두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높이는 이웃한 왕산보다 75m가  낮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필봉이 먼저 시야에 들어오고 인상적이다.

 

 

 

 

 

 

 

붓끝처럼  뾰족한  필봉

 

 

왕산 정상에 도착한다.

구형왕릉에서 3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한문으로 '王山'이라 써진 표지석이 바위군 위에 우뚝 서 있다.

지리산의 동쪽 기슭에 산이 있고 절이 있는데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는 왕릉이 있어 왕산이라 부른다 하였다.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전설을 안고 있는 왕산은 지리산 동북부 산청군 금서면 일대에 돌출한 높이  923m의 산이다.

 

왕산 정상에 서면 천왕봉이 마주 보이고 겹겹의 지리산 능선이 시원히 조망된다.

천왕봉 중봉 하봉 능선, 써레봉 능선,  하봉 쑥밭재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 긴 능선이 한눈에 조망된다.

 

 

 

 

천왕봉과  능선

 

 

 

 

 

 

 

 

 

  

정상 주변에 바로 쌍재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서 있다.

쌍재로 가는 하산길로 내려선다.

사람의 왕래가 드문 탓인지 길이 희미한 곳이 있어 집중하며 하산한다.

수플 속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일월비비추가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일월비비추

 

 

 

 

  

30분 정도 하산하니 평탄한 지대에 도착한다.

잡초가 무성하여 길이 보이지 않는다.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니 멀리 이정표가 보이고 리본이 펄럭이고 있다.

노란 뱀무 군락과 잡풀을 헤치며 걷는다.

하얀 개망초 군락지를 지나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한참 걸어 내려가니 쌍재 이정목이 반겨준다.

왕산 정상에서 출발한 지 47분 걸려 쌍재에 도착한다.

 

뱀무 군락

 

 

 

 

 

개망초 군락

 

 

 

 

 

고등재로 가는 길에는 시원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산불 감시 초소에 오르니 지리산 능선이 시원히 조망된다.

 

 

 

 

 

산불 감시 초소

 

 

고등재 내려간다.

붓끝 같이 생긴 필봉이 이곳에서 바라보니 여인의 유두가 연상된다.

멀리 수철리 향양리 평촌리 매촌리 마을이 보인다.

산도라지꽃이 피어 있다.

나무를 베어낸 참나무 둥글에는 나이테가 선명하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니 모든 풀들은 납작 땅으로 엎드린다.

고등재에 도착한다.

 

 

필봉 또는 유두봉이라 부른다 - 여인의 유두를 연상시킨다

 

 

 

 

 

산도라지 꽃

 

 

 

참나무 둥걸

 

 

 

고등재

 

고등재에서 수철마을로 내려가는 임도를 따라 걷는다.

필봉은 언제나 따라오고 있다.

눈을 들면 필봉이 보인다.

보랏빛 꽃이 만개한 도라지 밭을 지나니 수철마을로 내려가는 구불구불한 길이 보인다.

산골 마을의 아름다운 정경이 전개된다.

원추천인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수철가든. 민박집에서 배낭을 풀고 된장찌개백반을 주문한다.

시계는 1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구형왕릉에서 출발한 지 6시간 25분이 소요되었다.

이 시간이면 내리까지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반찬 하나 남기지 않고 뚝딱 식사를 마치니 여주인이 "굉장히 시장하셨네 보네요" 한다.

수통에 담아 갈 차가운 물 한 통을 청하니 쾌히 승낙한다.

주렁주렁 달린 수세미를 촬영한다.

 

수철마을 내려가는 임도 -왕산과 필봉이 바라보인다

 

 

 

 

보랏빛 꽃이 핀  도라지밭

 

 

수철마을 길

 

 

 

원추천인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멋진 위치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수철가든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수세미

 

논배미의 파릇한 벼.

가지런한 벼 고랑사이로 보이는 논물의 정경이 아름답다.

이른 새벽에 보는 논배미의 파르스름한 논물이  더 아름답다.

지막마을로 가는 논두렁길을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산들바람 속삭임에
속살이 간지러운 녹색 들판은
춤사위를 풀고
한가로운 백로가
논배미 적막 속에 부리를 박는다

 

호젓함이 서러운 논두렁 길에

달빛에 가슴 젖어
밤을 새운 달맞이꽃
졸음에 겨워하며 눈을 감는다

 

길마를 벗어던진 늙은 황소가
걸쭉한 울음을 흘리는 날에
풋사과 낯 붉히는 잠자리 사랑놀음
하늘에 새겨지는 그림이 된다

 

외줄기 산길 끝
바람 머문 메밀밭
산지기 허수아비 외로움을 씻으려
쪽쪽대는 산새들을 불러 모은다

풍경  /  최 해 춘 ) 

 

  

논배미 가지런한 벼 고랑 사이로 보이는 논물 - 정경이 아름답다

 

 

 

 

 

 

지막마을에는 춘해대와 춘래정이 있다.

이곳은 남명 조식과  덕계 오건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명 조식이 제자인 덕계 오 건을 찾아 춘해대와 춘래정에서 정담을 나누며 놀던 곳이다.

필봉 자락 울창한 나무숲이 우거진 계곡 암벽 위에 춘래대가 있고, 맞은편 언덕 위에 춘래정이 있다.

 

 

울창한 나무  숲 속에   춘해대와  춘래정이 있다   뒤로는 필봉이 보인다.

 

 

 

작은 개울에 큰 바위 암벽이 있고 그 위가  춘래대이다.

 

 

 

노거수들이 춘래대가 있는 개울을 뒤덮고 있다.

 

 

 

춘래대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춘래정 그러나 지금은 울창한 나무숲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춘래정

 

 

춘래정 앞의 울창한 수목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멀리 산청읍 방면으로 산능선이 아련히 보인다.

푸른 논 사이로 시원히 뚫린 길을 걸어 평촌마을로 향한다.

점점 하늘에는 구름에 몰려오고 있다.

지막마을 번답들을 지난다.

길가 감나무에는 조잘 조발이 감이 달려 있다.

멀리 해동선원의 부처상이 보인다.

 

 

 

 

 

 

 

 

 

 

 

 

 

 

평촌마을 금서천 위에 놓인 평촌교를 건넌다

 

 

 

 

 

금서천

 

금서천 천변  폐교된 매촌초등학교에 해동선원이 있다

운동장에는 수많은 부처상이 세워져 있다.

스님 이야기로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한다.

 

운동장에 세워진 돌부처

 

 

폐교된 매촌초등학교 건물

 

 

교적비

 

폐교된 매촌초등학교 터에는 해동선원이 들어섰다.

운동장에는 수 많은 부처상이 세워져 있다.

스님 이야기로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한다.

 

운동장에 세워진 해동선원의 돌부처

 

 

 

돌부처 의 수인 -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대장마을로 가는 길가 밤나무에는 밤송이가 영글어 가고 있다.

농가 울안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길가 호두나무에는 동그란 호도가 조발조발 달려 있다.

 

 

 

 

 

대장마을 가는 길

 

 

 

밤송이

 

 

 

무화과

 

 

 

 

 

호도나무

 

 

대장마을을 지나 경호강에 다다른다.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후드득 갑자기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얼른 경호강 다리 교각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한다.

인월 남강을 흐르던 물이 만수천 임천 엄천강을 거쳐 이곳 경호강을 흐르고 있다.

경호 1교를 건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며 비가 뿌린다.

우의를 입고 경호강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멀리 웅석봉이 건너다 보인다.

산청고등학교를 지나 내리교를 건넌다. 

 

 

 

경호강

 

 

경호1교

 

 

 

 

 

내리교 -웅석봉이 보인다

 

경호강 래프팅 간판이 보이고 펜션 숙박촌이 보인다.

민박 가격 네고가 여의치 않아  지성마을 쪽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니 '지성 농촌체험마을' 간판이 보인다.

여직원이 가격도 알맞고 식사도 해결되는 민박집을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거리가 다소 멀고 길 찾기도 힘드니 자동차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한다.

들을 지나 경호강변이 가까운 산청읍 내리 한밭마을의 한 농가로 안내해 준다.  

그 여직원에 감사드린다.

 

지치도록  무던히도 걸은 하루다.

농가 민박 대자리가 깔린  깨끗이 정돈된 방에서 하룻밤 유숙한다.

 

 

깨끗이  정돈된  농가 민박집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