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란 매화가 무리지어 피는 황매암

2012. 7. 30. 09:52나를 찾아 걷는 길/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머리말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전남. 전북. 경남), 5개 시. 군(전북 남원시 43km, 경남 함양군 22.9km, 산청군 51.2km, 하동군 77.6km, 구례군 76.8.km) 총 271.5km (지선 14.9.km포함)로, 117개 마을을 지나는 22개 코스( 2개 지선 포함)로 이어져 있다.'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자락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또한 지리산 자락의 숱한 역사의 흔적과 문화를 볼 수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살과 마주치며 걷는 길이기도 하다.

  

람천 뚝길 따라 걷는다.

산 능선위로 흰구름이 피어오른다.

황매 속에 핀 선화를 그리며 황매암 石泉의 맑은 물을 마신다.

 

장항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노루목 당산 소나무

쳐진 푸른 솔가지에는 무수한 솔방울이 달렸다.

 

고사리 밭, 보라색 도라지꽃

비탈진 산기슭의 다랑이 논

파랗게 벼가 자라는 논배미

논두렁길을 걷는다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연화봉 촛대봉 세석 영신봉... 

지리산 주 능선을 바라보며 창원 마을길을 걷는다.

 

하안거에 들어 스님들은 자취를 찾을 수 없고 적막만이 감도는 벽송사

푸른 솔바람 소리만 들린다.

 

盡日惺惺坐 乾坤一眼中

有朋草屋來 明月與淸風

 

온종일 성성히 앉았노라니

천지가 한눈에 들어오네

벗이 있어 초암으로 찾아오니

밝은 달 맑은 바람이어라 

 

세속의 티끌을 씻어내고 소나무 아래에서 용유담 너머 멀리 산 봉오리로 피어오르는 운무를 본다.

 

돌무덤 전구형왕릉에서 잃어버린 왕국 가야의 옛 역사를 들춘다.

왕산 기슭 '유의태 약수터'  

대나무 홈통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맑고 찬물을 연거푸 마시니 흐르는 땀이 식는다.

심신이 쇄락해진다.

 

곰이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떨어져 죽었다는 웅석봉

내리를 들머리로 속살을 헤집으며  웅석산 정상에 오른다.

곰그림이 그려져 있는 웅석봉 표지석은 운무에 뒤덮여 있다.

 

장대비를 맞으며 웅석산 임도를 걷는다.

운무가  피어오르는 운리 탑동마을의 아름다움이여

 

남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백운계곡

간밤 내린 비로 떨어지는 폭포의 울림이 천둥 같다.

 

산천재 뜨락 매화나무 너머 저 멀리 천왕봉을 바라보며 남명의 시를 읊는다.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새들이 멀리 날아가 버린 빈자리에 흰 구름이 피어오른다.

 

 (1) 노란 매화가 무더기로 피는 황매암

(인월-중군마을-황매암-수성대-장항마을-백장암-매동마을)

2012. 7. 8  일요  맑음

 

 

족필(足筆)  /  이 원 규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동서울터미널에서 지리산행 07:00 시외버스에 오른다.

인월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한 후,

람천변에 있는 '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에 먼저 들린다.

며칠 일정으로 종주를 할 계획이냐 물어 10박 11일로 계획하고 있다고 대답하니, 사단법인 숲길에서 종주를 하였는데 

15박 16일이 걸렸으니 참고로 삼으라고 한다.

 

인월정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인월리를 가로지르는 람천 뒤로 월평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겹겹의 산능선이 이어진다.

구인월교를 건너다 우측 람천 중간에 '迎月臺'라 각자 한 바위가 보인다.

전해져 오기를, 영월대 평평한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인월 8경(引月八景)'이라 불렀다. 

황강폭포(荒崗瀑浦), 고역연람(古驛煙嵐), 층층괴석(層層怪石), 외뢰반암(磊磊盤岩), 풍천어적(楓川漁笛), 월평농가(月坪農歌), 

삼봉낙조(三峰落照), 백장효종(百丈曉鐘)이다.이다.

이곳이 그 영월대 바위인지는 확실치 않다.

 

인월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이 람천은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황산과 덕두산 사이의 좁은 협곡을 통해 인월면으로 흐른다.

산내면에서 만수천과 합류되어 흐르다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지나 임천이 되고 휴천면에 이르러 엄천강이 되어 흐른다.

 

 

 

 

 

 

 

영월대 각자가 보이고 그 뒤로 평평한 바위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월평마을이다.

'여기서부터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 제3구간 시작점입니다'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마을의 형국이 반월형처럼 생겨 월평(月坪)이라 부른다.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유래를 낳게 한 이성계장군의 황산대첩과 관련하여 달을 끌어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월정이란 정자를 

마을 북쪽 람천변에 세우고 매년 ‘인월제(引月祭)’를 지낸다고 한다.

 

"서력 380년(고려 우왕 6년) 키가 7척이 넘는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영남을 거쳐 북진을 하는데 삼도 도원수(三道 都元帥) 이성계 장군은

황산(荒山)에서 기다리며,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신궁으로 퇴치할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그믐밤이라 적군과 아군의 분별이 어려워 전투를 할 수 없어 하늘을 우러러,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자 잠시 후 칠흑 같은 그믐밤 하늘에 보름달이 떠 올라 천지가 밝아졌다. 때를 놓치지 않은 이성계 장군의 화살이 왜장 아지발도의 목구멍을 꿰뚫어 왜군을 물리쳤다.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올렸다 하여 끌 인(引), 달 월(月) 자를 써서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람천 뚝길 따라 걷는다.

한낮의 불볕이 쏟아지고 있다.

 

한가로운 전원풍경

산 능선 위로 흰구름이 피어오른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반달처럼 생긴 월평들을 지나니 중군마을이다.

임진왜란시 이곳에 중군(中軍)이 주둔한 연유로 마을을 중군리라 부르게 되었다.

 

 

 

 

 

 

 

 

 

 

농가의 외벽에 그려진 벽화가 재미있다.

중군마을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중군마을의 잣과 꿀을 선전하였고, 중군민박의 전화번호도 쓰여 있고,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꽃을 그렸다.

마을길을 따라 오른다.

반질반질한 감나무 잎이 아름답다.

한 농가의 외벽에는 잣과 호두 현수막이 걸려있다.

중군마을은 잣과 호두와 꿀을 많이 생산하는 듯하다.

밭이랑에는 막 캐어낸 토실토실한 감자가  정겹다.

 

 

 

 

 

 

 

 

 

 

갈림길에서 황매암으로 오른다.

주변에 노란 매화가  무리 지어 핀 풍경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 황매암이다.

 

 

 

 

 

절 경내에 든다. 나무 홈통으로 흘러내린 물이 연실 돌확을 흘러넘치고 있다.石泉의 물로 갈증을 해소한다. 자연석 돌받침 위에 앙증한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일장스님을 찾으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대웅전 옆 작은 뜰에는  맷돌석이 깔려있고 요사채에는 '황매암(黃梅庵)' 편액이 걸려 있다. 담장 옆 채마밭에는 해바라기가  우뚝 서서 흐드러지게 핀 보랏빛 도라지꽃을 굽어보고 있다.

황매암 뜨락에 서서 무연히 덕두산 능선을 바라본다.

 

 

 

 

 

 

 

 

  

 

 

 

 

 

 

 

 

 

인월 지리산 자락 노란 매화가 무리 지어 핀 풍경이 아름다워 암자를 지었다는 50년 선수행승 일장 스님은,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958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범어사,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 이후, 1980년 지병인 심장병 악화로 토굴 생활을 시작 양산 금강암 등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행정진하였고, 1986년 제주도 신풍리에 목부원(牧夫苑)을 짓고  돌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수행정진하면서, 숙생의 화업(畵業)으로 여러 차례 불사전과 장학 모금 전을 열었다. 17년간 제주도 생활을 접고, 2004년 남원 지리산 자락에 황매암을 짓고 지금까지 修禪安居하였다.  사형인 성철 스님으로부터 건네받은 영명연수 선사의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편역 하였으며, 서산대사가 지은 부휴선사의 언해본 선가귀감(禪家龜鑑)을 현대문으로 번안하였으며 교재본으로 사용하기 위한 한문본 에는  동상스님의 주기를 그대로 옮기고 부족한 부분을 첨가하였다.  만성동귀집은 천태덕소국사의 법제자이며 법안종 문익의 법손인 북송초 영명연수 선사(永明延壽 禪師)가 찬술 한 법문 중의 하나로 불교개론서이다. 문답식 114조로 되어 있으며,  그 大意를 요약하면, 짓되 지음 없는 諸善萬行이 모두 實相에 귀착한다는 뜻을 상술한 것이다. 영명연수 선사가 永明에 있을 때 학자들에게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

"영명의 뜻을 알고 싶은가/ 문 앞에 펼쳐진 湖水이니라. /햇살 비치니 맑게 빛나고/  바람 부니 물결이 이네."

선가귀감은 "정맥(正脈)을 찾아 짚어 나가듯 산재한 경전 어록들 가운데서 그 요점만을 간추려 간명직절한 필치와 설명으로 교학과 선수행 원리, 또 그 관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여 주었고, 그 같은 바탕 위에 결정된 신심으로 올바른 수행 길을 열어 갈 수 있도록 친절하고 명쾌하게 우리 후학들을 이끄는 지침역할을 해주고 있다"

  

일장스님은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리의 황무지에서 황혼 녘에 먼 한라산을 보는 재미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눌러앉아 목부원(牧夫苑)을 짓고, 돌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수행정진하던 당시 그의 방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붙였다고 한다.

 

이곳은 앞을 봐도 아득하고
뒤를 봐도 끝이 없다.
목부자는 풀 속에 어디에 세월을 녹이면서
해 뜨면 밭에 나가 호미로 땅을 파고 해 지면 등불 아래 마음 달을 비춰 본다.
어떤 때는 흙먼지 맨발로 아이들과 뛰어놀고
어떤 때는 술에 취해 홍에 겨워 춤도 춘다.
제 성품에 맡겨놓아 버린 채
빛을 감추고 티끌 세상에 함께 묻혀
오는 인연 맞아주고 가는 인연 놓아둔다.
하늘 위에 뭇별들이 혼 없이 널려 있고
땅 위엔 온갖 생명 끝없이 벌려 있어
조금도 벗어나질 않고 낱낱이 제 자리라.
이같이 사람, 소, 날짐승, 기는 벌레
위아래가 동락(同樂)하고
거센 바람 순한 비 가고 오며 함께 사니
겁전삼매(劫前三味)의 남이 없는 곡조요
대방화엄(大方華嚴)의 멸하지 않는 설법이라.
어떤 말인들 범음(梵音)이 아니며
어떤 고소인들 난야(蘭若)가 아니겠는가.
옛사람 이르기를,
“뚜렷이 밝은 근원 태허공과 같아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다” 하였는데,
아, 오늘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얼굴 아는 사람이야 많지만
회포를 함께 할 자 드므니
소리 앞의 마음 말을 누구와 함께 나눌꼬.

此處也, 前望無際而 後仰無極
牧夫子 草裡橫身消鷹歲月
日出將田 鋤頭握地 日入挑燈心月相照
有時灰頭跣足 與童蒙同 
有時醉酒野無發呵呵之聲
放 任逍和光同塵 有綠則應 無綠則任己矣
上天星羅 下天百物 頭頭本處 物物非改
如是人畜飛禽 上下同樂
順風逆雨逝往共淞 常演劫前三味
廣說大方華嚴 何言非梵 何處非若
所以 古云 圖同太虛 無欠無餘
嗚呼 然而 今日四顧無人
識面者 多而 同懷者稀
聲前 語共與誰

 

석정, 수안, 일장 세 스님은 선서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禪悅에서 나온 그림이 禪畵이고, 자기의 글씨, 그림은 법문의 방편으로 그리고 싶을 때 그릴뿐이라고 말하는 일장스님은,

앞으로는 '마음이 그리는 데로 그릴 것'이라고 하였다. 스님의 선서화 몇 점을 감상해 본다.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길을 헤치며 수성대로 향한다.

하늘말나리가 하늘을 향해 피어 있고,  잠자리 떼들이 무리 지어 나르고 있다.

 

 

 

 

 

 

수성대를 지나고 계곡을 건너니 무인판매대가 있는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산모롱이를 도는 길의 나무  숲에는 온통 산수국꽃으로 덮여 있다.

다람쥐가 산오솔길을 넘나들고 있다.

산새소리 매미소리 계곡의 물소리로 산속이 왁자지껄 요란스럽다.

 

멀리 장항마을이 보인다.

 

 

 

 

 

 

 

 

남원시 산내면 장항리

노루목 당산 소나무가 우뚝 서서 장항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용트림하는듯한  소나무 사방으로 푸른 솔가지가 쳐져 내렸다. 솔방울을 조발조발 달고 있다.

수령 400년 소나무의 자태가 신령스럽다.

 

"장항마을은 백두대간 지리산의 한 능선인 덕두산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한 자락이 부챗살처럼 흘러내린 남쪽에는 살강골과 

바람골을 가운데로는 뒷골을 그리고 북쪽으로는 높고 듬직한 갯골을 만들어 마을을 아늑히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풍요로운 마을이다.

이 당산이 있는 자락은 갯골로서, 마치 노루가 목을 길게 내민 형국이기 때문에 옛 이름은 노루목이라 불렸으며, 지금은 노루장(獐) 목항(項) 자를

써서 장항리로 부른다.

노루목에는 세 개의 당산이 있는데, 이곳에 당산을 모신 사연은 북쪽이 텅 비어 북풍이 고스란히 마을로 넘어오기 때문에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당산을 세워 그 허함을 막고 문을 닫아 복을 가두어 마을의 지리적 허함을 극복하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해마다 정원 보름에 세 곳의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이곳 윗당산에서만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제를 지낸다.

수고는 18m이고 수관폭이 15m에 달하며, 사방으로 가지가 고르게 자라 매우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 소나무는 마을이 형성될 무렵인 

1600년대부터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전해온다.

소나무 주변에 쌓아 올린 석단은 당산제를 마치고 제물을 묻어 당산신을 비롯해 산신령과 산짐승 그리고 온갖 미물들에게도 정성을 들이는 헌식의 장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지리산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자라온 소나무를 마을 수호신처럼 여기고 있으며, 소나무의 보호와 더불어 유서 깊은 고유의 당산제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당산 소나무와 석단 석단(石壇)은 당산제를 마치고 제물을 묻어 두는 곳으로 당산신을 비롯해 산신령과 산짐승 그리고 온갖 미물들에게도 정성을 드리는 헌식의 장이다

 

 

 

 

 

 

 

 

 

 

 

장항마을 장항쉼터에서 배낭을 벗어 놓고 흐르는 땀을 닦는다.

잔치국수를 시켜 시장기를 달랜다.

장항교를 건넌다.

  

 

  

백장암을 가기 위해 장항교를 건너 인월방향으로 60번 도로를 따라  걷는다.

변강쇠 백장공원이 보인다.

백장공원 길가 옆으로 팔도 장승들이 서 있다.

 

 

 

 

  

 

 

  

수청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장암으로 가는 산길은 구불구불 오르는 길이다.

땀을 뻘뻘 올리며 송림이 우거진 산길을 걸어 오른다.

 

 

 

 

 

 

  나무 두 그루가 사천왕처럼 지키고 있는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대숲에 둘러싸인 백장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층석탑 석등  그리고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그리고 백장선원으로 이루어진 소박하고 정갈한 절이다.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한 실상사에 딸린 암자이다.

창건 년대가 불분명하지만 실상사의 창건과 역사를 같이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실상사의 

모든 승려들이 이곳 백장암으로 피난을 와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요사채 앞마당을 지나  용이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긴 나무홈통으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을 한껏 마시고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운다.

기와불사를 한 뒤 대웅전에 참배하고, 대웅전 기단에 서서 석등과 삼층석탑을 바라본다.

 

새로 건립되어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 앞에는, 옛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깨어지고 마모된 고색의 삼층석탑과 석등이 우뚝 서 있다.

섬세한 조각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 (百丈庵 三層石塔)!

수청산 구불구불한 산길을 허위허위 폭염 속을 걸어온 보상을 해 준다.

 

지대석에서 3층 옥개석까지 섬세한 조각이 가득한 고색창연한 삼층석탑을 대하니 더위에 지친 몸은 사라지고 눈망울만 초롱초롱해진다.

층층마다 비신 하단에는 난간을 조각하였다.

1층 비신 한 면에는 문비형과 좌우에 보살상 사천왕상을 조각하였고, 나머지 세 면에는 불구를 든 보살상 사천왕상 동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2층 비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 2구씩, 3층 비신 각 면에는 천인좌상을 조각하였고,

1,2층 옥개석에는앙련이 조각된 네모난 돌을 끼웠고, 3층 옥개석 밑에는 삼존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영화 보개 보륜 수연 등이 찰주에 차례로 꽂혀있는 온전한 모습이다.

삼층석탑을 빙빙 돌며 돌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예술품을 완상 한다.

 

보물 제40호 백장암 석등(百丈庵 石燈)

난간을 두른 석등은 처음 보는 듯하다. 정교한 조각이 삼층석탑과 짝을 이룬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 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대웅전 오르는 계단 옆에는 수련 꽃봉오리가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고요히 석등과 석탑 그리고 멀리 산 능선을 바라본다.

옛 역사를 간직하고 우뚝 서 있는 고색의 삼층석탑처럼....

지나간 젊은 시절을 되돌아본다.

 

산에 길 있네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어디인지도 모를

허상(虛像)의 내가
허상뿐인 나를 찾아 헤매던 길

잘게 분해된 시간
빛바랜 햇살로 증발하는 오후의
느릅나무 숲, 으름덩굴 사이로 열려 있네

털어버려, 그냥
훌훌 털어버리라는 허허로운 바람의 길

시월이 멈추어 선 산자락
내 젊은 날이 중년(中年)의 내 어깨에 손 얹으면
야윈 오솔길은 제 혼자 두런거리며 간다
아득한 그리움 지나 더 아득한 그리움으로
산 넘어 산, 그 넘어 산으로

백장암 뒤란 대숲을 건너, 저 - 편
잊힌 어느 가을의 모퉁이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사람아
만남과 이별,
어제와 내일이 윤회(輪廻)할 그 길 위
네 눈빛만큼이나 한없이 투명한 하늘
아쉬운 날들의 사랑 같은 노을이 진다 

-서진암 가는 길 / 권경업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과 석등

 

 


용이 꿈틀거리듯 구불구불한 나무홈통으로 흘러내리는 샘물

 

 

 

 

석등과 삼층석탑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제40호 백장암 석등

 

 

 

 

 

석종형 부도 3기와  석물

 

  

내려 올 적에는 찻길을 버리고 '솔바람길'  숲길로 들어서 송림 속 산길을 걷는다.

백장교를 건너 매동마을로 향한다.

퇴수정 입간판이 서 있다.

숲길로 내려가니 퇴수정(退修亭)이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의 냇가 옆에 있는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이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단련하기 위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정자 앞으로 만수천이 흐르고  울창한 나무 그리고  정자 뒤의  높게 솟은 암석으로 경치가 수려하다.

암석 옆 길을 따라 냇가로 내려서니  평평한 너른 암반 위로 물이 흐른다.

암반 위에서는 한 젊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다.

작지만 미려한 풍광을 가지고 있다.

 

 

퇴수정

 

 

 

 

 

 

사당인 관선재

매동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매동마을지리산둘레길 안내센터가 보인다.

민박집에 들어 배낭을 풀고 샤워하고 저녁을 먹은 후 휴식한다.

뙤약볕 속을 무던히도 걸은 오늘 하루다.

모기향을 피워 놓고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