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솔방울 주워 와서 새로 숯과 교체하고...

2011. 12. 12. 20:42도보여행기/茶山과 草衣가 걸었던 옛길을 걷다.

(4) 솔방울 주워 와서 새로 숯과 교체하고

    매화는 불어 없애 늦게 샘물 조절한다.

    2011.11.10   목요  흐림

 

새벽 숙소를 나서니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가는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우비를 꺼내 입는다.

강진읍에서 백련사까지  "정약용 남도 유배길" 따라 걸어가기로 한 계획을 바꿔 차편을 이용하기로 한다.

 

동백나무 숲 길에서  올려다보니 만경루가 보인다.

층계를 걸어 오른다.

만경루 앞뜰에는 잎이 다 떨어진 배롱나무가  구불구불한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안개에 싸인 희끄무레한 긴 산능선과 강진만이 얼굴을 보여준다.

만경루 아래 돌층계를 오르니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구불구불 꿈틀거리는 듯한 원교 이광사의 필체다.

대웅보전에 들어 부처님께 삼배한다.

신라시대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만덕산 대웅보전" 현판이 벽면에 걸려 있다

 

고풍스러운 백련사 사적비

비각 속에는 비신을 짊어진 거북이 있다.

용머리를 하였는데 이빨을 꽉 다물고 긴 수염을 목까지 늘어뜨린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고려시대 최자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가 있었으나 비신은 유실되고 귀부만 남았는데, 이후 숙종 신유년(1681)에 

다른 돌로 비를 세웠는데 귀부는 옛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비문에는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 그리고 백련결사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석축아래 치자나무에는 주황색 열매가 터질 듯 익어가고 있다.

석축 위로 마른 잎을 군데군데 매달고 쓸쓸히 서 있는 모과나무와 나신의 배롱나무가 보인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다산 정약용과 아암 혜장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윤기 나는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울울한 동백나무는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기만 하다.

 

아암 혜장이 백련사에 온 다산을 알아보지 못했다.

육안으로 그대를 못 알아봄 탄식하니

태산북두 높은 명성 다만 귀로 들었었네

불지에는 이제 와 용상회가 없느니

예전엔 궁궐 연못 봉황의 무리셨지

외론 자취 멀리 이곳 금릉 바다 닿았어도

꿈속에선 언제나 한수 구름 돌아가리

방외의 우정이 다시금 난만하데

시 속의 경계의 말 참으로 은근하다.

 

혜장이 하안거 들어 바깥 걸음을 못하자 다산은 시를 지어 보낸다.

 

긴 날을 평상에서 대나무와 마주하니

여섯 때의 종경소리 멀어서 틀리잖네

유순지 가까워서 흥 나면 갈 만하고

도솔천 높다지만 어이 닿지 못하리오

약초 언덕 조금씩 병 속 물로 적시다가

임단에서 지팡이 끝 구름다리 더디 놓아주네

하안거라 계율을 엄히 지님 아노니

경거를 줄줄이 뀀 부지런히 하시게나

 

아암 혜장의 차

 

사는 곳 온종일 송문을 닫아거니

돌샘은 변함없는 율리의 마을일세

온 언덕 구름 속에 세월을 다 잊었고

두 상자의 경전 속에 아침저녁 보낸다네

대숲 사이 찻잎은 장차 혀를 펴려 하고

울 밖의 매화 가지 이미 애를 끊누나

숲 아래 가까이 와 적막함을 이루니

새도 지조 있음을 뉘 있어 논하리오

 

나무 뒤로 만경루가 보인다

 

       

멀리 구강포가 보인다

 

                                           

대웅보전

 

  

원교 이광사가 쓴 현판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만덕산 백련사' 현판

 

                                               

원교 이광사 쓴 '만경루' 현판

 

 

대웅전 고메기에 기왓장으로 그린 연꽃이 아름답다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

보물  제1396호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 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 비수(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의 조성된 것이며, 비신과 이수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地臺石)과 더불어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하단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2조로 갈라지며 비 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의 음각선으로 고락을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 각형으로 내부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비신은 2면 비로 전·후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을 양각했다.

 

     

치자나무 열매

                                                 

만경루마루 아래 만경다설(萬景茶說)에 앉으니, 유리창 너머 배롱나무 사이로 아름다운 구강포가 바라다 보인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만 가지 경치가 보인다는 곳이다.

주목나무 차탁 위 화병에 꽂은  빨간 열매 가지가 운치를 더하고 있다.

벽면으로는 각양각색의 다기들이 진열되어 있고 '萬景茶說'이라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소쿠리 안에는 이곳에서 제다한  般若餠茶, 一枝淸香, 般若茶 등이 진열되어 있다.

 

'一枝淸香'을 주문하고 커피포트에 찻물을 끓인다.

끓은 물을 숙우에 부어 한소끔 식힌다.

가져다 놓은 찻잎이 든 다관에 숙우의 찻물을 붓고 잠시 우린다.

우린 찻물을 찻잔에 따르니 연둣빛  맑은 색이다.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향을 맡으니 코 끝에 은은함이 묻어난다.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음미하니 담백하다.

맑고 은은한 담백한 차를 몇 번이고 우려내어 마신다.

 

다산과 아암은 이곳 백련사에서 인상적인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아암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교류가 지속된다.

 " 듣자니 석름봉 바로 아래서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지금은 보리 말릴 계절인지라

기도 피고 창 또한 돋아났겠네"

라고 시작되는 걸명시를 보내고 차를 얻어 마신 후, 다산이 아암에게 또 보낸 유명한 걸명소(乞茗疏)가 있다.

 

"1805년 겨울에 다산은 다시 한번 혜장에게 차를 청하는 글을 보낸다. 앞서 초여름에 얻은 차가 진작에 동이 났던 것이다. 이번엔 장난스럽게 상소문의 형식을 빌렸다. 이것이 유명한 걸명소(乞茗疏)다. 나그네는 요즘 들어 다도, 즉 차 욕심쟁이가 된 데다, 겸하여 약용에 충당하고 있다네. 글 가운데 묘한 깨달음은 육우의 다경 세 편과 온전히 통하니, 병든 숫누에는 마침내 노동의 일곱 사발 차를 다 마셔버렸다오. 비록 정기를 고갈시킨다는 기모경의 말을 잊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막힌 것을 뚫고 고질을 없앤다고 한 이찬황의 벽을 얻었다 하겠소. 아침 해가 막 떠오르며 뜬 구름은 맑은 하늘에 환히 빛나고, 낮잠에서 갓 깨어나자 밝은 달빛은 푸른 냇가에 흩어진다. 잔 구슬 같은 찻가루를 날리는 눈발처럼 흩어, 산 등불에 자순의 향을 날리고, 숯불로 새 샘물을 끓여, 야외의 자리에서 백토의 맛을 올린다. 꽃무늬 자기와 붉은 옥으로 만든 그릇의 번화함은 비록 노공만 못하고, 돌솥 푸른 연기 담박함은 한자보다 많이 부족하다네. 해안어안은 옛사람의 즐김이 한갓 깊은데, 용단봉단은 내부에서 귀하게 나눠줌을 이미 다했다. 게다가 몸에는 병이 있어 애오라지 차를 청하는 마음을 편다오. 들으니 고해를 건너가는 비결은 단나의 보시를 가장 무겁게 치고, 명산의 고액은 서초의 으뜸인 차만 한 것이 없다고 들었소. 애타게 바람을 마땅히 헤아려,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주기 바라오.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설명 시문은 훗날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일련의 걸명서와 함께 우리 차 문화사의 특별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차를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던 조선의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다산의 걸명 시문 이래 걸명의 풍조는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갔던 듯하다. 이들 시문 속에는 선인들의 차 사랑과 풍류와 해학이 오롯이 살아 있다." (정민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에서)

 

  

 

 

만경다설(萬景茶說)

 

                                        

 

 

 

 

  동백림  오솔길을 걷는다.

낙화된 동백꽃은 또 한 번 지상에서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동백나무 숲 속 여기저기에는 부도탑이 구강포를 바라보고 서 있다.

 

 

 

 

 

 

 

 

 

 

 

 

 

 

        

연못과 연못 속의 석가산    나무 홈통으로 물을 끌어와 떨어지게 하여 연못으로 물을 흘러들게 하였다.

 

                                

다산도에 의하면 연못이 상 하로 두 개가 있었으며  그 위쪽에 샘물을 파서  홈통으로 이어 연못에 물을 댔다.

석가산은 지금처럼 연못 속이 아닌 초당 위 산허리에 있었다.

다산사 경첩에 의하면, 바닷가에서 주워 온 수십 개 기암괴석을 쌓아 만들고, 구불구불 물길을 돌려 샘물이 돌 사이를 흘러가게 하였다.

괴석을 재주 부려 쌓아 삼층탑으로 만들고, 가운데 우묵 팬 구멍에는 한 그루 소나무를 심었다. 바위 곁에는 봉미, 즉 파초를 심었다.

둘레에는 복사꽃과 살구꽃이 피었다고 하였다.

 

석병(石屛)

 

            

다산이 직접 쓰고 새긴 "丁石" 각자

 

석병(石屛)은 초당 뒤 언덕에 있는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를 일컫는다.

다산은 이 바위에  '丁石'이라 직접 쓰고 새겼다.

바위 주변으로 자라고 있는 푸릇푸릇한 차나무가 병풍바위의 정취를 더해 준다.

 

현재 놓여있는 '다조' 는 원래의 것과는 판이하다

 

                                  

"다산은 다산초당의 4경으로 다조, 약천, 석병, 석가산 네 가지를 꼽았다.

이 가운데 다산의 차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다조와 약천이다.

 

반반하게 청석 갈아 붉은 글자 새기니

차 달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

반쯤 닫은 고기 입에 불길 깊이 스미고

짐승 두 귀 쫑긋 뚫려 가늘게 연기 나네.

솔방울 주워 와서 새로 숯과 교체하고

매화는 불어 없애 늦게 샘물 조절한다.

정기를 삭게 함은 끝내 경계해야 하니

단약 화로 만들어서 신선 됨을 배우리라.

 

"4경 중 제1경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다조, 즉 차 끓이는 부뚜막이다. 池亭 앞에 이것이 있다고 했다. 초당 앞에 놓여 있던 것이다. 2구에서 '소조'라 한 것으로 보아  작은 크기의 청석을 평평히 갈아 만든 화덕이었다. 여기에 붉은 글씨로 '다조'란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했다. 현재 초당 앞에는 꽤 큰 평평한 돌 하나가 놓여 이것을 다조로 설명한다. 다산의  1,2구 진술로 볼 때 어림없는 딴 물건이다. 생김새는 어떠했을까? 숯을 넣는 구멍은 물고기가 목구멍을 반쯤 열어 뻐끔대는 모양이고, 위쪽 양옆으로 짐승의 귀처럼 삐쭉 솟은 곳에 작은 구멍이 있어 그리로 연기가 빠져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육우가 '다경'에서 그려 보인 화로와 부뚜막의 모양을 하나로 합친 모양에 가깝다. 그러니까 속은 텅 비고 숯을 넣은 구멍은 반쯤 벌린 물고기  입 모양이며 , 찻 주전자를 안칠 자리에는 구멍이 뚫렸고, 양옆 손잡이 부분이 봉긋 솟아 여기에 연기를 배출하는 작은 구멍을 뚫은 소박한 형태의 화덕이었다. 다산은 처음에 숯을 넣어 찻물을 끓이다가 불기운이 세지면 숯을 꺼내고 솔방울을 넣어 화후를 조절했다. 6구에서 매화를 불어 없앤다 함은 물 위에 뜬 乳花를 걷어낸다는 뜻인 듯하다. 유화는 떡차를 가루 내어 끓일 때 생기는 거품이다. 7구에서 말한 차가 정기를 삭게 한다는 '침정척기'의 경계를 환기했다. 내친김에 단약을 끓이는 화로를 만들어 신선술을 배울까 싶가고 말하며 시상을 맺었다."  <정민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에서>

 

  

약천

 

다산이 池亭의 서북쪽 모서리 물웅덩이 있는 곳을 팠더니 돌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다산은  이 玉井의 맑은 물로 늘 차를 달이어 마셨다.

 

옥우물 뻘은 없고 다만 모래 깔려 있어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찬하인 듯 상쾌하다.

처음에 돌 틈에서 승장혈을 찾았더니

마침내 산속의 약 달이는 집 되었네.

여린 버들 길을 덮어 빗긴 잎이 물에 뜨고

이마 닿는 어린 도화 거꾸로 꽃이 폈다.

담 삭이고 고질 나음 그 공 기록할 만하니

틈날 때 벽간차를 끓이기에 알맞다오.

                (다산사 경첩)

  

담장 아래 구멍 하나 샘물 솟는데

돌의 정기 천 년 지나 액체가 됐네

사슴 마셔 새롭게 난 흔적이 있고

범이 후빈 옛 자취는 찾을 수 없네

                 (다암시첩)

  

 

 

       

 

  

다산이 기거했던 곳은 동암이다.

동암을 송풍구 또는 송풍암이라고도 부른다.

다산은 이곳에 2,000여 권의 서적을 쌓아두고 본격적인 저술에 들어갔으며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하였다. 

다산은 이곳 다산초당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서 차 바구니와 차 맷돌을 갖추고 직접 찻 잎을 따서 제다 하여 마셨다.

 

곡우 지나 새 차가 비로소 기를 펴자

차 바구니 차 맷돌을 조금씩 정돈하다

동방엔 예로부터 다세가 없었거니

앞마을에 개 짖어도 염려하지 않는도다

 

뿌리의 길

 

                                            

동백나무 대나무  차나무 가득한 만덕산 자락 다산초당을 뒤로한다.

소나무 억센 뿌리의 길을 걸어 귤동마을로 향한다.

시인 정호승은 '뿌리의 길'을 걸으며 노래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귤동마을

 

                                                   

대흥사에서 다산초당을 오갔던 초의가 걸었던 옛길을 따라 걷는다.

도암면 항촌리  농로는 하얗게 핀 억새꽃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억새 너머로 주작 덕룡 능선이 아름답게 조망된다.

 

 

 

 

 

 

 

 

 

'학동' 마을 표지석이 서 있다.

'학동'이라 쓴 글씨 옆으로 '다산 선생 따님 묘소'가 병기되어 있다.

문득, 강진 유배시절 다산이 강진에 사는 친구 집에 출가시킨 외동딸에게 그려 준 매조도가 생각난다.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 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다 병든 부인 홍 씨는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이에 다산은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며있는 빛바랜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훈계의 글이 든 '하피첩'을 만들어 보내주고,  외동딸에게는 매조도(梅鳥圖)를 그려 준다.

이 '매조도' 그림 아래쪽에는  4언율시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列其芳 惠然其來
亥止亥樓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其實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 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텅 빈 들녘 무언의 소리를 들으며 주작 덕룡능선을 바라보며 걷는다.

 '주작산 자연휴양림'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 따라  수양리 마을로 들어선다.

논과 밭 둔덕에는 억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삼 인천 물가 우거진  갈대 너머로 아름다운 주작 덕룡 바위 능선이 흐르고 있다.

수양리 마을은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주작 덕룡 바위 능선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농가 앞 밭에는 연기기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밭에는 늙은 호박이 뒹굴고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산골 마을의 정경에 흠뻑 취해 걷다 보니 '봉양제'다.

저수지 둔덕은 온통 하얀 억새가 뒤덮여 있다.

바람이 불적마다  은빛으로 출렁이고 있다.

노란 산국도 군데군데 보인다.

 

 

 

 

 

'봉양제' 저수지

 

    

 

 

주작산 자연휴양림은  봉양제를 지나고 나서도참을 걸어 오르는 길이다.

초의가 스승 다산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두륜산 대흥사와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을 오갔던 옛길이다.

 

초의는 다산의 승려 제자다.

당시 다산은 48세, 초의는 24세였다.

초의가 선지식을 찾아 헤맸으나 실망하다 1809년 다산초당을 찾아 이곳에서 적거 하던 다산의 제자가 된다..

초의는 애틋하게 다산을 숭모했고, 다산은 초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초의가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배울 당시에는 다산은 이미 차를 자급자족하던 때였으므로 그 제다법이 그대로 초의에게 이어졌다. 우리 차의 시대를 활짝 연 초의는 다산으로부터 차를 전승받았으니, 실로 다산은  우리 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상념에 젖어 걷다 문득 고개를 든다.

주작산 계곡

푸른 나뭇잎을 달고 있는 동백나무 가지 끝에 빨간 동백꽃이 하늘을 향하여 꽃봉오리를 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