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3. 12:28ㆍ도보여행기/茶山과 草衣가 걸었던 옛길을 걷다.
(3)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고...
푸른 차밭과 월출산 능선을 바라보며 걷는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 능선 아래에는 천년고찰 월출산 무위사(無爲寺)가 있다.
무위란 무엇인가?
무위는 한자로는 無爲이고, 梵語로는 asamskrta 다.
국어사전에는
1.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음. 또는 이룬 것이 없음.
2. <불교>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생멸(生滅)의 변화를 떠난 것.
3. <철학> 중국의 노장 철학에서, 자연에 따라 행하고 인위를 가하지 않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불문에서는 因緣에 依하여 生成되지 아니하는 永遠不變의 超 時間的인 절대적인 眞實이며, 大乘에서는 眞如. 唯識에서는 空과 同一시한다.
生.住.異.滅. 4相의 轉變이 없는 眞理로서,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상(實相)은 無爲의 다른 이름이다.
선종(禪宗)에서 사용되는 의미는, 아무런 행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행위에 있어 물고기가 물속을 가듯이, 새가 창공을 날듯이 걸림이 없는 행동을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는 것을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된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무위(無爲)이다.
무위를 생각해 보며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과 해탈문을 넘어서니, 돌계단 위로 국보 제13호인 무위사 극락보전이 보인다.
조촐하고 아담하다.
그러기에 절의 경내는 여백이 많다.
그래서 절은 물고기가 물속을 가듯이, 새가 창공을 날듯이, 아무런 걸림이 없는 듯 보인다.
배례석 앞에 서서 극락보전에 합장한다.
검소하고 소박한 것에서만 풍기는 은은한 향이 묻어난다.
극락보전에 들어 아미타삼존불에 삼배한다.
가부좌하고 앉아 아미타부처님을 우러른다.
고개 돌려 사면벽을 바라보니 벽면마다 가득해야 할 벽화가 보이지 않는다.
벽면의 벽화를 뜯어 벽화보존각으로 옮겼으니 공허하기만 하다.
겉은 조촐하고 검소하지만, 내면은 사면벽화가 불전을 화려하게 장엄한 서방극락정토 모습을 눈에 떠 올려 본다.
극락보전 (極樂寶殿) 국보 제13호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우리나라 대표 목조건축의 하나로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묘사한 건물이다. 1983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명문에 따르면, 세종 12년(1430)에 건립하였고, 효령대군이 공사에 깊이 관여한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 집이다.
법당 내부에는 조선 성종 7년(1476)에 그림을 끝맺었다는 화기가 적혀있는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와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월출산 무위사(月出山 無爲寺)
'무위사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로 창건하였고 도선국사가 중창하면서 갈옥사, 고려시대에 선각대사 형미가 3 창하면서 모옥사라 개명하였고,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선사가 4 창하고 비로소 절 이름을 무위사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선각대사 부도비의 제목에 '무위갑사'라고 적혀있고, 비문 속에도 신라 효공왕에 왕건이 선각대사를 무위갑사에 머물도록 청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그 이전부터 무위사로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가지 활동 기록이 보이는 등 자못 활기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結社)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통폐합의 2 차정리 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보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내영도 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 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잰 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 천불전 · 시왕전이 있었다. 당시의 주지는 극잠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하였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1974년 극락보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원형대로 뜯어내어 '벽화 보존각'으로 이전하였다. 아미타삼존벽화와 백의관음도는 극락보전에 남아 있고, 나머지 29점의 벽화는 '벽화 보존각'에 진열되어 있다.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국보 제313호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 2불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아미타여래삼존좌상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2호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며, 연꽃대좌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 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 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극락전백의 관음도 (極樂殿白衣觀音圖)
보물 제1314호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 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 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써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 쪽으로는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 마리가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극락전내벽사면벽화 (極樂殿內壁四面壁畵)
보물 제1315호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를 포함하여 총 29점이다.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보존각에 보관. 진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으로 극락보전 안쪽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아미타내영도는 흙벽에 채색된 것으로 극락전 서측벽 중앙에 그려진 벽화이다.
사람이 죽을 때나 수행이 성숙해지면 아미타불이 마중 나와서 서방극락으로 인도해 간다는 내용을 도상화한 것이다.
아미타불과 8 보살 8 지구가 구름 위에서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왕생자를 맞이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삼존불화(三尊佛畵) ,
설법도라고도 불린다.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삼존불 사이와 주위로는 합장한 채 본존을 향하고 있는 입상의 두 보살상과 6 지구를 배치하였으며, 멀리 뒤로는 마치 기암의 월출산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암산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활달한 필치에 적황색의 색조, 당당한 체구의 인물 형태 등에서 고려 색채가 어느 정도 엿보이긴 하지만, 사각형의 얼굴과 연꽃대좌의 형식적인 꽃잎 표현 등 조선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존불의 낮은 육계와 정상계주, 고식(古式)의 눈ㆍ코ㆍ입 표현, 다소 위로 올라간 왼손, 회화성이 돋보이는 자연스러운 옷주름 처리 등은 이 삼존불도를 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의 그림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정면을 향하여 앉아있는 모습의 보살상으로 어깨 위로는 보발이 드리워져 있으며, 둥근 모양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다. 채색이 많이 박락되어 정확한 형태는 잘 알 수 없지만 연꽃 자방 위에 앉아 선정인을 취하고 있는 듯하며, 머리에는 보관의 흔적이 보인다. 벽 테두리선과 세련된 필치가 보이다.
연화당초향로도(蓮華唐草香爐圖)
향목을 꽂은 중앙의 향로를 중심으로 연화 당초문을 좌우대칭되게 묘사하였다.
자연스러운 당초무늬와는 달리 연꽃이 도안화되어 다소 경직된 느낌이다.
오불도(五佛圖)
삼존불도 위쪽 벽화에 그려진 오불도로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짓고 있는 다섯 부처그림이다.
모두 연화좌 위에 길상좌(吉祥坐)한 자세로 적색 대의를 입었으며, 육계가 뾰족하고 정상계주가 빨갛게 처리되어있다.
본래 벽화 위에 덧그린 것으로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내영도 위쪽 벽에 그려진 오불도로 중앙의 항마촉지인 부처를 중심 하여 하품중생인을 지은 부처를 좌우에 각각 2구씩 배치하였다. 적색 대의에 육계가 뾰족하며 정상계주는 빨갛게 처리하여 동벽의 오불도와 같은 솜씨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보상모란문도(寶相牧丹文圖)
중앙에 화분을 마련하고 그곳으로부터 가지가 뻗어 나온 것처럼 표현한 그림으로, 흰색과 붉은색의 탐스러운 모란문을
거의 좌우 대칭 되게 배열하였다. 꽃과 꽃 사이의 여백을 짙은 녹색의 잎사귀로 빈 틈 없이 꽉 채워놓아 무성한 느낌을 준다.
18∼19세기경에 덧 그린 그림으로 떨어져 나간 벽체 밑 부분 그림을 보면 매우 세련된 필치와 선명한 색채를 엿볼 수 있다.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無爲寺 先覺大師偏光塔碑)
보물 제507호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 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 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 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 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샘물이 돌확을 넘쳐흐른다
국립공원에서 조성해 놓은 '무위사 자연관찰로'를 따라 무위사 뒷산을 오른다.
대숲을 지나 한참을 오르니 습지가 나온다.
습지 위 울울한 대숲의 '조류관찰대'에 올라, 배낭을 풀고 편안히 앉아 쉰다.
준비해 온 햇반과 반찬을 꺼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다.
조류 관찰대 뒤 울울한 대숲 터널을 지난다.
창끝으로 하늘을 찌르듯 올곧게 쭉 뻗어 오른 푸른 대나무의 기상이 좋다.
눈 맛이 시원하다.
윤선도의 오우가가 생각난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대나무는 땅속줄기가 그물처럼 뻗어 넓게 퍼지고 땅속줄기의 마디 부분에서 새순(죽순)이 나와 한 달만에 높게 자라 숲을 이룬다. 대나무는 한번 자란 후 더 이상의 생장을 하지 않으며 나이테가 없기 때문에 풀로 볼 수도 있고, 겨울에도 꼿꼿하게 서 있을 뿐 아니라 껍질이 단단하여 나무로도 볼 수 있다. 대나무는 60-120년 만에 단 한번 꽃을 피운 후 즉시 죽는다고 한다.
동백나무 우거진 오솔길을 걷는다.
떨어진 동백꽃이 솔잎과 낙엽 깔린 땅 위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다.
해탈문을 나서며 앞을 바라보니 천왕문 사이로 일주문이 멀리 보인다.
산 능선이 길게 흘러가고 있다.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을 따라 이곳 무위사에서 강진읍 '사의재'까지 걸어야 하는 것이 앞으로 남은 노정이다.
배낭끈을 조이고 잰걸음으로 걷는다.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아래에는 달 월(月) 자가 든 마을이 많다.
월남리에 신월마을, 상원마을, 월남마을
월하리에 월봉마을, 월하마을
송월리에 월송마을, 대월마을(달맞이 마을), 뒷산은 월각산
월평리에 달뫼마을, 월산마을
저수지 이름도 월남저수지, 월송제, 송월제, 월평제, 달뫼제가 있다.
월출산 삐죽삐죽한 바위봉에 걸린 달, 달아래 비치는 마을의 풍광이 아름다워 지은 이름들이다.
월하리를 지나 송월리를 향하여 걷는다.
월송마을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다.
뒤를 돌아보니 논밭 너머 멀리 삐죽삐죽한 월출산 능선이 보인다.
논밭 둔덕에 피어난 하얀 억새꽃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송월제를 지나 청자골 달맞이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뒤로 월각산 바위 능선이 보인다.
마을 어귀에는 450년 된 노거수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다.
성전읍내를 통과한 후 랑동마을을 지나 2번 국도 옆길을 걷는다.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있다.
월출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흐르고 있다.
금당마을에는 백련이 피는 '금당백련지'가 있다.
동백나무 소나무 오죽이 어우러진 두 개의 섬 가운데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백련은 이미 지고 누렇게 마른 연잎만 연못에 가득하다.
정약용 남도 유배길'은 금당마을 뒷산 대숲이 우거진 오솔길로 이어진다.
억새 핀 야산을 넘어서니 송학리 송학제다.
다시 산으로 오른다.
리본이 달려있는 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걷는다.
해 떨어지기 전에 우두봉 기슭 고성사를 거쳐 강진읍내로 가야 되는 산길인지라 조급하여 쉬임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만나는 빨간 망개가 눈을 반짝이게 한다.
마른 잎사귀 한 두 장 달린 가시 돋친 덩굴에 매달려 있는 빨간 망개가 갈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가을이 되면'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가을이 되면
오 광 수
가을이 되면
훨훨 그냥 떠나고 싶습니다
누가 기다리지 않더라도
파란 하늘에 저절로 마음이 열리고
울긋불긋 산 모양이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곳이면 좋습니다
가다가 가다가 목이 마르면
노루 한 마리 목 추기고 지나갔을
옹달샘 한 모금 마시고
망개열매 빨갛게 익어가는 숲길에 앉아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 들으며
반쯤은 졸아도 좋을 것을,
억새 꺾어 입에 물고 하늘을 보면
짓궂은 하얀 구름이
그냥 가질 않고
지난날 그리움들을 그리면서
숨어있던 바람 불러 향기 만들면
코스모스는 그녀의 미소가 될 겁니다
가을이 되면
텅 비어있던 가슴 한쪽이 문을 열고
나 혼자의 오랜 그리움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다림이 되어
그렇게 그렇게
어디론가 훨훨 떠나고 싶습니다
망개
울울한 편백나무 숲 속 길을 걷는다.
어느덧 보은산 우두봉 기슭에 있는 고성사가 올려다 보이는 포장 도로로 내려선다.
둔덕 위로 '보은산방' 현판이 달린 기와지붕이 올려다 보인다.
고성사 대웅전 마당을 수북이 덮은 단풍잎은 깊은 가을의 정취를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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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형국 즉 누운 소 형상인 보은산 우두봉 기슭에 자리한 고성사(高聲寺)는 풍수지리에 의하면 소의 귀 밑에 해당되는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워낭 소리가 나야 강진골이 안정된다고 하여 고성암을 건립하고 종각을 지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 아암 혜장의 주선으로 사의재에서 이곳 고성암의 승방인 '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겼다.
9개월간 머물면서 아들 학연과 함께 주역 공부에 매진하였던 곳이다.
이때 지은 '題寶恩山房'
과, 다산이 아들 정학연과 함께 '주역'을 읽고 주고받은 문답을 정리한 '僧菴禮問' 52척이 전해진다.
제보은산방(題寶恩山房)
다산 정약용
우두봉 아래 작은 선방에는
대나무만 쓸쓸하게 낮은 담 위로 솟았구나
해풍에 밀리는 조수는 산밑 절벽에 부딪히고
읍내의 연기는 겹겹 산줄기에 깔려있네
둥그런 나물바구니 죽 끓이는 중 곁에 있고
볼품없는 책상자는 나그네의 여장이라
어느 곳 청산인들 살면 못 살리
한림원 벼슬하던 꿈 이제는 아득해라
대웅전 마당에서는 멀리 강진만이 아스라이 보인다.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던 보은산방 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황금꽃술을 단 하얀 차꽃의 용모가 준수하다.
"다산 정약용은 1801년 강진에 귀양 와서 1818년 여유당으로 돌아갔다.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강진에서 다산은 훗날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함께 완성하였다.
학문의 불모지였던 강진에 경이의 눈길이 쏠렸다. 다산 없는 제자나 제자 없는 다산은 어느 경우든 상상하기 어렵다. 다산은 해배되어 돌아올 때 제자들과 함께 작성한 '다산계절목'에서 자신의 강진 생활을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가경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으로 귀양 와서 동문 밖 술집에 붙여 살았다.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에서 지냈다. 병인년(1806) 가을에는 이학래의 집에 이사해서 살았고, 무진년(1808) 봄에 다산에서 살게 되었다. 따져보니 귀양살이가 도합 18년인데, 읍내에서 산 것이 8년이고 , 다산에서 산 것이 11년이다. 거처는 모두 네 차례 옮겼다. 처음자리 잡은 곳은 동문 밖 술집, 동천여사 뒷골방인 사의재(思宜齋)였다. 이곳에서 1801년 겨울부터 1806년 여름까지 4년 반을 지냈다. 1805년 겨울은 아암 혜장의 배려로 아들 정학연(1783-1859)과 함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지냈다. 다시 사의재로 내려와 있다가, 1806년 가을에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1년 반 정도 살았다. 1808년 봄 이후 1818년 해배 시까지 다산초당에 정착했다. 읍내 생활 8년 초당 생활 11년이었다. 이학래의 집은 강진 읍내에서 완도 가는 길목 팔바우 어귀 학림에 있었다. " ( 정민의 '다산의 재발견'에서)
하산길 영랑생가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조금 내려서니 약수터다.
김재석의 시 '우두봉 가는 길' 김영랑의 시 '어느 날 어느 때고' 시판이 세워져 있다.
우두봉 능선 산길 숲 속에는 푸른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차나무 군데군데 하얀 차꽃이 피어 있다.
아름다운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니 탑골샘에 다다른다.
영랑생가 담장 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생가 입구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시름에 잠길 테요
五月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든 날
떨어져 누은 꼿님마저 시드러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뻗쳐 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예순날 늘 섭섭해 울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언제나 다시 읽어도 가슴을 파고드는 진한 울림이 있다.
담장 옆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은행나무 아래의 노란 은행잎이 눈을 환하게 한다.
영랑이 어릴 적 다녔다는 금 서다 옛터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강진읍과 강진만이 눈앞에 시원히 펼쳐진다.
사의재 찾아가는 길
골목길 채마밭에 김영랑의 시 '무너진 성터...' 시판이 걸려 있다.
문허진 성터에 바람이 새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나
이끝히끝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달프다 소색이 느뇨
이곳은 과거 강진읍성의 동문이 있었던 곳이다.
1801년 겨울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유배지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동문 밖 주막이었다.
강진 사람들은 귀양 온 그를 죄인 취급하며 멀리하였다.
귀양 온 지 1년이 지난 1802년 겨울보다 못한 주모가, "술만 먹으며 허송세월만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한번 가르쳐 보면 어떻겠소" 하고 권유한다.
이에 다산은 느끼는 바 있어 주막 골방에서 서당을 연다.
그리고 주막집 골방 이름을 사의재(思宜齋)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제어하였다.
다산의 思宜齋記
사의재라는 것은 내가 강진에 귀양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료 제어함을 이른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 바 학업이 무너져 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때는 가경 8년 (1803, 순조 3) 겨울 12월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南至日)이니, 갑자년(1804, 순조 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 건괘를 읽다
다산은 귀양 온 지 1년이 지난 후, 동문 밖 주막집 골방인 사이재에서 6명의 제자를 가리키며 1806년 여름까지 보냈다.
"思宜齋' 편액이 걸린 툇마루에 걸터앉아,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네 가지를 옳바로 지키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을 짓고, 스스로를 제어하며 제자를 가리켰던 다산을 추억한다.
다산과 아암 혜장과의 만남은 1805년 4월 백련사에서 이루어졌고 그 이후 왕래가 잦았다.
백련사 석름봉에 차나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장에게 차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는 걸명시를 보낸다.
寄贈惠藏上人乞茗
(혜장상인에게 차를 청하며 부치다)
듣자니 석름봉 바로 아래서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지금은 보리 말릴 계절인지라
기도 피고 창 또한 돋아났겠네
궁한 살림 장재함이 습관 되어
누리고 비린 것은 비위가 상해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더부룩한 체증이 아주 괴로워
이따금씩 술 취하면 못 깨어나네
스님의 숲 속 차 도움을 받아
육우의 차솥을 좀 채웠으면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에 다르리
모름지기 찌고 말림 법대로 해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으리라.
다산이 강진에 귀양 온 후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 혜장과 교류하기 시작한 때부터인 것 같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주막 울안에 세워져 있는 시비에 있는 '다산주막' 시를 읽는다.
서둘러 발길을 돌려 읍내 중심가로 걸어가 식사하고 숙소를 정한다.
오늘도 해 뜰 무렵 출발하여 해가 넘어간 후에야 일정을 마친다.
하루 종일 무던히도 쉬임 없이 돌아다니며 답사하고, '정약용 남배유배길' 따라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은 하루였다.
다산주막
정 호 승
홀로 술을 들고 싶거든 다산주막으로 가라
강진 다산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다산 선생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대빗자루를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창 밖으로 지나가는 딱딱한 구름과 술을 들더라도
눈물이 술이 되면 일어나 다산주막으로 가라
술병을 들고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다산주막으로 가라
강진 앞바다 갯벌 같은 가슴을 열고
다산 선생께서 걸어 나와 잔을 내미실 것이다.
참수당한 눈물의 술잔을 기울이실 것이다.
무릎을 꿇고 막사발에 가득
다산 선생께 푸른 술을 올리는 동안
눈물은 기러기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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