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

2011. 12. 18. 10:17도보여행기/茶山과 草衣가 걸었던 옛길을 걷다.

(5)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

    2011.11.11 금요 흐림

 

주작산 자연휴양림 따끈한 방에서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취사하여 조반을 든 후 방을 나서니 07:00시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다.

간밤에 비가 뿌렸던 모양이다.

작천소령 오르는 길이 촉촉이 젖어 있다.

"쪽쪽쪽-- 쪽쪽쪽 --"

산새가  산중의 적막을 깨뜨린다.

작천소령에 올라서니 임도가 갈라진다.

초의가 걸었던 옛길인 도림마을로 가는 길은 오른쪽 임도이다.

그러나 꾸물거리는 날씨로 지름길인 이목마을 앞 양촌재로 바로 내려서는 왼쪽 임도를 선택한다.

 

작천소령 오르는 임도

 

              

작천소령

 

                                                       

고요한 산길이다.

멀리 아스라이 겹겹의 산 능선이 흐른다.

보랏빛 엉겅퀴꽃이 길손의 눈길을 빼앗는다.

  

가시나물 /김길자

산속의 고요를 품고
삶의 아픔이 가시로 돋아
진한 고통 속에서도
처절한 아름다움과 향기 지키며

거미줄에 뒤 엉킨 꽃술처럼
나의 갈 길이 이 길이라며
산새가 일러준 대로
소신껏 꽃 피어보는 엉겅퀴

수더분한 미소 짓는 입술에
이슬 촉촉이 적시며
욱신거리는 운명의 길 더욱 활기차게
예리한 내일을 여는 꽃

 

 

 

 

엉겅퀴꽃

 

                                            

무념무상 호젓한 산길의 정취에 젖어 걷는다.

편백나무 숲도 소나무 숲도 지난다.

늦가을

퇴락하고 있는 풀덤불과 낙엽 속에 다섯 장 보랏빛 꽃잎을 펼치고 하늘을 보고 피어 있는 들꽃이 보인다.

자주 쓴 풀꽃

다섯 장의 꽃잎에는 짙은 보라색 줄무늬가 선명하다.

  

자주 쓴 풀꽃 / 김 내식

하얗게 서리 내리는데
무슨 사유로
뿌리는 물론 쓰고 잎도 써
푸르뎅뎅 멍든 영혼
늦가을에 꽃 피울까
누가 쓰디쓴 너를 잘근잘근 씹어보고
쓴 풀이라 하였을고
그러나 너무 슬퍼는 말아라
이 세상 쓴 것은
너뿐만 아니라
나도 쓰단다
나이 60이 되는 해
새로 태어난 손자와 함께
새롭게 시작한 삶에 이 무슨 짓거리로
되지도 않는 시를 쓴다고
머리가 하얗게 쉬어
잠도 못 자고 있지 않으냐
풀아 풀아 쓴 풀아
나도 꼭 너처럼
쓰디쓰단다

 

 

자주 쓴 풀꽃

 

                                                  

멀리 두륜산 고계봉이 보인다

 

                                                  

이목마을 앞을 지난다.

멀리 두륜산 고계봉에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다.

양촌 저수지를 지나 827번 지방도로를 따라 두륜산을 오르기 위해 오소재 방향으로 걷는다.

 

 

 

 

 

 

 

충장궁 정운장군 묘소 뒤로 우뚝 솟은 고계봉이 그의 기상과 충절을 닮은 듯 우뚝하다.

용천소공원 지나 약수터 입구에서 두륜산 오심재 오르는 산길로 접어든다.

가는 비가 오락가락한다.

촉촉이 젖은 산길

모든 나뭇잎들이 영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이따끔 붉은 단풍잎이 보이고, 앙상한 나무 가지에는 빨간 열매가 물방울을 매달고 있다.

오심재에 도착한다.

산죽이 우거진 오솔길 따라 북암(北庵)으로 내려선다.

 

 

 

 

 

오심재

 

북미륵암(北彌勒庵)은 만일암(挽日庵)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암이라 불렀다.  
이 암자는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둔 사지'에는 '건륭 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암은 1754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연담 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 같은 고승들이 바로 이곳에서 강학(講學)을 열었다. 
북암은 용화전. 요사 등의 건물과  2기의 3층 석탑으로 이루어졌다.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1985년 4월에 중수하였다.

 

 

북미륵암 전경

 

                                                                         

 

용화전

 

                                                              

용화전 옆 산사나무에는 빨간 열매가 조발조발 달려 있다.

북미륵암 삼층석탑 사위는 온통 안개에 덮여 있다.

안개 낀 산중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용화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용화전 옆문을 살며시 당기고 들어서 앞을 바라보니 마애불 유리 천장이 환해진다.

거대한 마애불이 환하게 빛난다.

눈두덩이 수북하고 살찐 둥글둥글한 부처님이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형형한 눈동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삼배하고 스님 따라 예불을 드린다.

예불이 끝난 후 마애불로 다가서서 보니 바위 표면이 부드러운 피부 같아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상하좌우 네 모서리 이에는 공양천인상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는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은 세운 천인이 단정히 앉아 부처님을 우러러보며 공양화를 올리고 있다.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국보  제308호 

거대한 암벽을 다듬어 불상을 조각한 뒤 木造前室을 세운 마애석굴의 主尊佛이다. 바위면에 고부조(高浮彫)되어 있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이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은 근엄하게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두터운 법의에 싸여 있으나 비교적 量感 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옷주름은 신라  말기에 유행하던 얇게 빚은 듯한 옷주름의 전통을 잇고 있으나 圖式的이며,왼쪽 어깨에 있는 가사의 끈이 이색적이다. 대좌는 11 엽의 앙련(仰蓮)과 12 엽의 복련(覆蓮)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대좌로 두툼하게 조각되어 살집 있는 불신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頭光)와 몸 광배(身光)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 중원(三重圓)으로 아무런 꾸밈도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양감이 있고 유려하여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ㅡ평가된다. < 문화재청 >

 
 

본존불의 육계(肉髻)가 뚜렷한 머리는 언뜻 머리칼이 없는 민머리(素髮)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다. 그러나 눈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입을 굳게 다물어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니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유난히도 굵고 짧아진 목에는 두 가닥의 선으로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손(手印)과 발은 항마촉지인에 오른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를 하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냘픈 듯 섬세하고 가지런히 묘사하여 사실성이 엿보임과 더불어 곱상한 느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그 주름은 거의 등간격으로 선각화(線刻化) 하여 사실성이 뒤떨어지고, 무릎 사이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마치 키를 드리운 것처럼 늘어지는 등 도식적(圖式的)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오른쪽 무릎은 꿇고 왼쪽 무릎을 세운 천인이 단정히 앉아 부처님을 우러러보며  공양화를 올리고 있다.

 

                       

 

 

 

 

 

 

 

 

용화전 맞은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이 암반 위에 우뚝 서 있다.

자연 암반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를 조성한 신라양식의 삼층석탑이다.

암반과 기단사이의 빈틈으로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홈을 파 놓았다.

동삼층석탑 뒤편에는 삼신각이 있다.

 

북미륵암 동삼층석탑

 

          

 

 

북미륵암과 삼층석탑이 환히 내려다 보인다.

 

               

삼신각

 

                      

삼신각 탱화

 

                                                                            

거대한 바위 옆을 지나니  너덜지대가 나온다.

빨간 단풍잎 두 장이 매달려 있다.

바람이 불적마다 떨어질까 염려스럽다.

푸른 댓잎과 어울린 빨간 단풍잎이 산중을 환히 밝힌다.

 

 

 

 

 

 

 

만일암터 앞에 서 있는 이 느티나무는 원래 두 그루였다고 한다.

한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남아 있다.

나무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9.6m인 이 느티나무를, 식물학자들은 수령을 천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천년수(千年樹)'라 부른다.

 

 

만일암터 천 년 수령의 느티나무  천년수(千年樹)

 

                                                       

 

 

 

가슴높이 둘레가 9.6m 나 된다.

 

                                                                  

 

' 천년수'의 옆 가지가 길게 뻗어 있다.

 

                                                  

두륜산 가련봉 아래 빽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만일암 절터

암자는 허물어져 사라지고 빈터에는 고색창연한 5층석탑이 천 년 세월을 간직한 채 묵묵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

터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석등 부재, 연자맷돌 등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파란 이끼가 낀 얕은 돌담과  두 개의 샘터 석축에도 온통 파란 이끼 투성이다.

짙은 안개에 싸인 가련봉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만일암지'에는 7층석탑이 있으며, 그 탑은 아육왕이 세웠기 때문에 '아육왕탑'이라 부른다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이 '아육왕탑'인지는 불분명하나 상륜부에 석등의 부재가 올려진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7충석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관 존 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우니 해가 저물고 있다.

해가 지지 못하게 탑에 해를 묶어 놓고 암자를 완공한 후에 암자명을 잡을 만(挽) 자와 해 일(日)를 써서 만일암(挽日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빽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만일암터

 

                                    

만일암(挽日庵)

만일암은 두륜산의 가련봉 아래에 있는 암자로 대둔사의 여러 암자 중에서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옛날 기록과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만일암이 비록 암자에 속하지만, 대둔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하여 다산은 『만일암지』에서 '유송(劉宋) 때 정관 존 자가 창건하고, 소량(簫梁) 때 선행대덕이 중건하였다'라고 기록하면서, 이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강희 14년(1675)에 융신선사(融信禪師)가 중건하고, 현기화상(玄己和尙)이 강희 말년에 중수하였으며, 응명두타(應明頭陀)가 건륭년간(1736-1795년)에 중수하였다. 이후 가경 14년(1809)에 자암전평(慈菴)과 은봉두예(隱峰斗芸)가 또다시 중건하였는데, 이것은 믿을만한 사실이다. 지금 암자는 무너져 없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만일암에서는 만화원오(萬化圓悟), 연해광열(燕海廣悅), 금하우한(錦河優閒), 금봉희영(禽峰僖永), 백화찬영(白花贊英), 지월정희(智月鼎熙), 음성인훈(應星旻訓) 등의 여러 고승들이 머물렀다. 암자터 주변에는 오 층 석탑, 연자맷돌, 석등, 샘터 등이 남아 있다. 『만일암지』에는" 7층석탑이 있으며, 그 탑은 아육왕이 세웠기 때문에 아육왕탑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오 층의 석탑은 석등의 옥개석을 상륜부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7층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관 존 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웠다고 한다. 탑을 완성한 후에 암자를 지으려니까,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가 지지 못하게 탑에 묶어 놓고 암자 세우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암자를 완공한 후에 암자명을 잡을 만(挽) 자와 해 일(日)를 써서 만일암(挽日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탑 앞에 있는 샘터는 배수가 잘되지 않아서 물맛은 좋지 않다. 이 샘은 원래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고 한다. 암자터 아래쪽에 암 수의 개목 나무가 서 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괘목나무가 두 그루였는데, 한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식물 학자들은 이 나무의 수령을 천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나무를 천년수라 부른다. 어쩌면 이 나무의 나이테가 곧 만일암의 역사라 할 것이다.

(자료출처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만일암터 오층 석탑

 

                                                                             

만일암터 오층 석탑

석탑의 현 상태는 단층기단의 5층이나,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단층기단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또한 1층 탑신을 보면 한번 해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고 석등의 부재가 올려져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5.4m이다. 이 석탑은 튼튼한 기단부의 구성, 오 층 탑신을 세로로 세워서 결구한 기법, 옥개석 상면 네 귀퉁이의 가락국수마루를 도드라지게 한 기법이 옛 백제석탑의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중반기(12-13세기)로 보고 있다.

 

 

 

 

 

 

 

석등 부재, 연자 맷돌

 

                                                           

 

두 개의 샘터

 

                

 

 

너덜지대를 되돌아 나와  초의선사를 찾아 일지암으로 향한다.

한참을 하산하니 일지암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좌측 일지암 오르는 가파른 길을 몇 굽이돌아 오르니 둔덕 위로 띠집이 보인다.

둔덕에는 야생차나무가 푸릇푸릇 자라 싱그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

 

草衣禪師

1786년 전남 무안군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장(張) 씨이다. 자는 중부(中孚)이고 법명은 의순(意洵)이며 호가 초의(草衣)이다. 15세에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雲興寺)에서 벽봉민성(碧峰敏性) 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해남의 대흥사에서 완호윤우(玩虎倫佑)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대흥사 13 大宗師이며, 법계상으로 서산 청허의 10 세손에 해당된다.

 

둔덕에 자라고 있는 차나무

 

                                          

 

 

 

 

띠집과 자우산방

 

                                                

아래 연못에 서서 바라보니 차나무 너머 띠집이 보이고, 우측으로 자우산방이 보인다.

일지암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삼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주련에 쓰여 있는 글은 초의선사의 '東茶頌'  제1구에서 10구의 글이다. 

 

后皇嘉樹配橘德  하늘이 신령스러운 나무를 귤나무의 덕과 짝지었으니

受命不遷生南國  천명대로 옮기지 않고 남쪽에서만 자란다네
密葉鬪霰貫冬靑  촘촘한 잎, 모진 추위와 싸워 겨우내 푸르고

素花濯霜發秋榮  서리에 씻겨 가을 정취 풍기는 하얀 꽃
姑射仙子粉肌潔  고야선녀의 흰 살결처럼 고우며

閻浮檀金芳心結  염부단금 같은 황금꽃술 맺혔네

沆瀣漱淸碧玉條  밤이슬에 말끔히 씻기니 벽옥 같은 줄기요

朝霞含潤翠禽舌  새벽이슬 촉촉이 머금은 찻이파리 물총새의 혀 같네 
天仙人鬼俱愛重  하늘 신선 인간 귀신 모두 중히 아끼나니

知爾爲物誠奇絶  그대 타고난 모습 참으로 기이하고 절묘함을 알겠구려

 

초정 둘레에는 차나무가 자라고 있고, 사립문과 나무 울타리가 있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초정 뒤편으로 돌아간다.

산기슭 석간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대통으로 흘러나와  대나무 홈통으로 연결된 돌확에 담겨 흐르고 있다. 

이 샘물이 초의선사가 찻물로 사용했던 유천(乳泉)이다.

일지암 터는 40여 년 전에 응송 스님과 낭월 스님이 그 터를 확인하여 그 터에 건물을 중건하였다.

터가 있는 곳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늘 질척거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초의가 심었다는 장판죽과 백일홍이 자라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초정과 자우산방 뒤뜰 차나무에는 황금꽃술을 단 하얀 차꽃이 피어 있다.

 

일지암은 초의선사(1786-1866)가 1824년 건립하여  중년인 1826년부터 만년까지 40년간 기거했던 공간이다.

일지암(一枝庵) 시집의 서문에는,

"장춘동(長春洞)은 해남 남방 20리의 두륜산 일맥(一脈), 용과 호랑이 상으로 형성되어 있는 산맥은 십구(十丘) 요 계곡은 구곡(九曲)이다.

대흥사의 남방이요 북암에서 볼 때는 서쪽이요 남암에서 볼 때는 북쪽, 이곳에 초당을 지었으니 이름이 일지암이다.

삼간 초당에는 초의스님과 동자 한 사람, 법상에는 금으로 도금된 부처 일좌, 아침저녁의 목탁소리 샘물과 수목이 의지하고 죽림(竹林)의

바람소리는 가야금 소리 같다.

축대를 쌓아 과원(果園)을 만들고 석간(石澗)에서 나오는 물은 죽관(竹管)으로 받아 다(茶)를 끓인다.

남은 물이 괴인 곳에 연못을 만들어 연못 위에는 나뭇가지를 얽어 포도넝쿨을 들어 올리고 정원 주변에는 수석(水石)으로 갖추었다."라고

일지암을 묘사했다. 

 

초의는 당나라 때 천태산에 살았다는 전설적 은자 (隱者)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의 시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일지암(一枝庵)의 이름은 莊子 남화경(南華経) 소요유 편(逍遙遊編)의,

  " 鷦鷯樔林不過一枝  偃鼠飮河不過滿腹"

즉,  "뱁새는 잘 때 한 가지에서만 자고 다람쥐는 물마실 때 배를 채우지 않는다" 것과

한산(寒山) 시의,

   "常念鷦鷯鳥   安身在一枝 "

 즉,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

는 구절 등에서 따온 말이다.

 

뱁새는 제 몸을 깃들이는데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다.

'일지암'은 곧 초의의  욕심 없는 삶의 자세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방 한 칸을 가운데 두고 삼면으로 툇마루를 둘렀다.

 

                                                    

 

 

 

석간에서 샘솟아 흘러나오는 ' 유천'

 

                                                

 

황금꽃술을 단 하얀 차꽃

 

                                                 

자우산방(紫芋山房)은 초의 스님이  삶을 꾸렸던 살림채다.

자우산방은 연못에 네 개의 돌기둥을 쌓아 만든 누마루 건물이다.

누마루에 올라서서 보니 멀리 산의 경치가 내려다 보인다.  

초의선사의 초상이 벽에 걸려 있다.

누마루의 차탁 위에는 다관과 찻잔이 놓여 있고 옆 모서리에는 찻물 항아리가 있다.

이곳이 초의의 시(詩). 선(禪). 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문화의 산실이다.

 

초의 선사는 대둔사의 13 大宗師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 「동다송」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써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대둔사) 가까이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茶人)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대둔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둔사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둔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특히 시서화에 능했던 그는 남종화의 거장인 소치 허련을 가르쳐 추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초의의 살림채였던 자우산방(자우홍련 사)

 

                                              

 

자우홍련 사 편액

 

                                              

 

초의선사 초상

 

                                               

 

자우산방 누마루 차탁위에 놓인 다기

 

                                            

초정과 연못 사이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반듯한 돌이 있다.

그 앞에는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초의가 좌선을 하던 곳이다. 

연못에는 홍련은 보이지 않고  잎 밑 부분이 화살촉처럼 갈라진 둥근 연잎만 물 위에 떠 있다.

연못가 동백나무의 잎은 푸릇푸릇 푸름을 더하고 있다.

 

초의는 일지암을 고쳐 짓고 시를 짓는다

 

안개 노을 묵은 인연 숨기기가 어려워서

승려가 어느새 몇 칸 집을 지었구나

못을 파서 허공 달빛 해맑게 깃들이고

대통 이어 구름 샘을 저 멀리서 끌어왔네

향보를 새로 뒤져 영약을 찾아보고

깨달음 얻게 되면 묘련을 펼치노라

시야 막는 꽃가지를 잘라내어 없애니

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 

 

소치 허련(1809-1893)은 1835년에 초의와 첫 대면한다.

소치의 글은 당시 일지암의 주변 풍경과 공간 배치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기록이다

 

을미년(1835)에 대둔사 한산전으로 들어가 초의를 방문했다.

스님은 정성스레 나를 대접하고 인하여 침상을 내주며 머물러 묵게 하였다.

몇 해를 왕래하매 기미가 서로 같아, 늙도록 변하지 않았다.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였다.

소나무가 빽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몇 칸 초가집을 얽어두었다.

버들은 드리워 처마에 하늘대고 가녀린 섬돌에 가득하여 서로 어우러져 가려 비추었다.

뜰 가운데 아래위로 못을 파고,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절구통을 놓아두었다. 

스스로 지은 시에, "못을 파서 허공 달빛 해맑게 깃들이고, 대통 이어 구름 샘을 저 멀리서 끌어왔네"라 하였고,

또 "시야 막는 꽃가지를 잘라내어 없애니, 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라 하였다.

이 같은 구절이 몹시 많았는데, 청고하고 담박해서 불 때서 밥 지어먹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매양 눈 온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가만히 읊조려 흥취를 가라앉혔다.

향을 막 피우면 차는 반쯤 마셨는데, 소요함이 취미에 꼭 맞았다.

적막한 난간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마주하고, 깊숙한 굽은 길은 손님이 올까 염려하여 감춰두었다. 

방 가득한 두루마리는 법서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다.

내가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고 시를 읊고 경전을 읽은 것이 장소를 얻은 셈이었다.

하물며 날마다의 대화는 모두 속세를 떠난 높은 뜻이어서 내가 비록 속된 사람이라 해도 어찌 그 빛에 감화되어

함께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초정과 연못사이 석축 반듯한 돌에 새겨진 "다감" 각자

 

                          

"다감"각자 앞에는 평평한 좌선석이 있다

 

                                       

 

평석을  쌓아 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조선 후기 차문화사에서 다산이 중흥조였다면, 초의는 이를 든든히 뒷받침해 새 길을 연 전다박사였다.

하지만 추사가 없었다면 초의의 존재가 그렇게까지 빛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초의와 추사가 처음 만난 곳은 수락산 학림암이다.

두 사람은 당시 30세의 동갑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왕래를 이어갔다.

 

다음의 시는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걸명시다.

아침에도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르고, 저녁에도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렀다. 마치 학질을 앓고 난 것 같다.

장난 삼아 초의 상인에게 주다.

 

하루 걸러 앓느라 학질로 괴로우니

아침엔 더웠다가 저녁땐 오한 드네

산 스님 아무래도 의왕 솜씨 아끼는 듯

관음보살 구고단(救苦丹)을 빌려주지 않누나.

 

간송 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걸작 "茗禪"은 초의의 구고단을 받고서 답례로 보낸 글씨다.

"명선" 이란 글씨를 써 보낸 사연을 적었다. 

 

초의가 자신이 만든 차를 부쳐 왔는데 몽정차나 노아차에 못지않았다. 이를 써서 보답한다.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병거사가 예서로 쓴다

 

"茗禪"이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였고,  이 또한 걸명에 이은 사다(謝茶)의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글씨를 받고서야 초의로서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849년 다산의 제자 황상이 대둔사 일지암으로 초의를 찾아갔다.

황상은 대뜸 초의에게 추사가 써준 글씨들을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초의가 황상에게 꺼내 보여준 글씨는 "竹爐之室"과 "茗禪" 외에  여러 점이었다. 

황상은 마른 글씨의 '죽로지 실'을 조비연에 견주고 두터운 '명선'의 필획을 양귀비에 비겼다.

추사의 글씨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왕희지가 견지에 썼다는 '난정서' 보다도 더 훌륭했다고 했다. 

이 시기 초의의 거처인 일지암은 추사가 지어준 이름인 죽로지실로 불렸고, 규모는 거의 허물어져 가기 직전의 초라한 띠집이었다.

풀잎을 엮어 만든 문은 시늉만 했을 뿐 사립의 형태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문 앞에는 대숲이 향기롭고, 처마 밑에는 이런저런 나뭇가지들이 얽혀 있었다.

못가엔 화단이 있어 꽃 그림자가 연못에 어리고, 못에는 물고기가 아무 걱정 없이 헤엄쳤다.

손님이 찾아와 온종일 어찌 지내느냐고 물으면 초의는 대숲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고 대답했다.

황상은 그런 모습을 보며 여기가 바로 봉래산 신선의 거처가 아니겠느냐고 선망했다.

                (자료출처: 정민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

 

      (호암미술관 소장)  추사가 초의에게 써 준 "죽로지 실" 글씨

 

                            

대흥사 경내의 초의 동상

 

                                   

 

                                 

대흥사  부도전에 있는 초의탑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누구나 풀뿌리 옷(草衣)을 입는다.

초의(草衣)라는 이름으로 인생의 허무를 벗어던져 명리에 얽매임 없었던 초의선사

대숲 향기 맡으며  두륜산 깊은 산중 허물어져 가는 띠집에서 기거했다.

뱁새는 제 몸을 깃들이는데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했다.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

유천의 물로 차를 달여 마시며 연못 속에 해맑게 깃들이는 허공 달빛 바라보며 대자유를 얻었다.

소박하고 욕심 없는 삶의 자세로 살다 간 초의선사.

그의 흔적을 찾아  걸었다.

 

지친 발걸음으로 대흥사 경내 '東茶室'에 든다.

다관의 찻물을 따른다.

투명하게 우러난 맑은 찻물을 무연히 바라본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대흥사 경내 동다실( 東茶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