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6. 12:32ㆍ도보여행기/茶山과 草衣가 걸었던 옛길을 걷다.
(2)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2011. 11.9. 수요 흐림
경포대산장 따끈한 온돌방에서 푹 자고 일어나니 온 몸이 산뜻하다.
06:50분 쾌청한 하늘이 열려있기를 기대하며 숙소를 나선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하늘은 잔뜩 흐려 있고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떼어놓는 발걸음이 가볍다.
탑전마를 길 동백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돌담장을 끼고 들어간다.
불현듯 눈앞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이 나타나 흠칫 놀란다
우람한 월출산 천황봉과 삐죽삐죽한 옥판봉 불꽃 능선을 배경으로 미끈한 삼층석탑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이 탑이 바로 월출산 남쪽 월남리에 있는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이다.
여러 개의 작은 석재를 쌓아 만든 탑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하고 훤칠하다.
단층의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이 지붕돌보다 작고, 그 위의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고,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듯 늘씬하고
미끈하게 보인다.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康津 月南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298호
월남사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
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도라로 채운 뒤 넓적한 맨 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 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1900년 대 초까지 무위사 스님들이 1년에 한 번씩 이 탑을 비단으로 감싸고서 주위를 돌며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또한 탑이 한기 더 있었다고도 하는데, 없어진 탑의 부재들은 마을 안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되짚어 길을 나와 삼층석탑에서 멀지 않은 곳 고목 동백나무 뒤로 진각국사비가 있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물고 긴 목을 빼어 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다.
비 몸돌 윗부분은 떨어져 나갔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진각국사비는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국사(1178-1234)를 추모하기 위해 고려 고종 37년(1250년)에 세워졌다.
속성은 최 씨이고, 법명은 혜심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문하에서 선학을 닦았고 송광사 16 국사 중 제2조 인 고승이다.
비의 몸돌 전면은 떨어져 나간 상태이지만, 후면에는 기록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전면의 비문은 이규보가 지었고 글씨는 김효인이 썼다.
후면의 비문은 최자가 지었고 글씨는 탁연이 썼다.
안개가 옅게 낀 월출산 옥판봉 불꽃능선 아래로 보이는 산기슭은 온통 푸른 차밭이다.
차가 잘 자라는 곳의 지리적 특성은 일교차가 크고, 늘 맑은 안개가 끼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 성전면 월남리에는 우리나라 전통차의 맥을 이어온 다인(茶人) 이한영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강진군은 그의 생가를 2010년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이한영 생가 (李漢永 生家)
이한영(1868-1956) 선생은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로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 차(茶) 역사의 맥을 이어온 다인(茶人)이다. 선생은 생시 '다선(茶仙)'으로 추앙되었다. 선생은 1890년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녹차 상표인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세상에 내놓았다. 백운옥판차라는 이름은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백운동에 있는 '옥판산의 차'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 백운옥판차는 곡우에서 입하 기간 중 오전에 찻잎을 따 푸른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덖은 다음, 손으로 비빈(시루에 쪄서 비비기도 함) 후 온돌에 한지를 깔고 한 시간가량 말려 옹기에 저장하는 製茶技法을 이용했다. 이때 선생은 차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백운옥판차라는 상표와 차 꽃을 도안한 포장지를 제작해 사용하였다. 선생은 원주 이 씨 29대 손으로 이곳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6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 다도의 명인 이에이리 가조오가 '조선의 차와 선' 집필을 위해 이곳 생가를 방문할 당시 71세였던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 전통의 제다기술과 다도의 맥을 이으며 민족정신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던 분이다. 현재 성전면 월남리 일대에 우리나라 최고의 녹차 재배단지(아모레 퍼시픽의 '설록차' 밭 등)가 조성되어 있는 것도 이 전통에 유래된 것이다. 강진군은 선생이 선보인 다도의 경지를 숭앙하고 그 민족의식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 2010년 생가를 원형 그대로 여기 복원하게 되었다.
삐죽삐죽한 월출산 옥판봉 불꽃 능선을 바라보며,
월출산 거대한 바위 천황봉을 바라보며,
옥판봉 산기슭 아래 넓게 펼쳐진 차밭 '설록다원' 속을 걷는다.
가지런히 다듬어진 녹색 찻잎 고랑
차향이 코끝에 묻어난다.
한 곳에 이르니 다듬지 않은 차밭이 있는데 차 나무에는 온통 차꽃이 하얗게 피어 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황금 꽃술을 달고 있는 하얀 꽃
벌들이 열심히 꿀을 빨고 있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맑은 향을 맡는다.
차꽃에 빠져 사진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곳 다원의 관리인이 지나가며 "차꽃을 찍어지는군요"하며 미소 짓는다.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느님이 신령스러운 나무를 귤나무의 덕과 짝지었으니
천명대로 옮기지 않고 남쪽에서만 자란다네
우거진 잎, 모진 추위와 싸우며 겨우내 푸르고
서리에 씻겨 가을 정취 풍기는 하얀 꽃
고야 선녀의 흰 살결처럼 고우며
염부단금 같은 황금꽃술 맺혔네
그의 역주에는,
"차나무는 과로 같고
잎은 치자 같으며
꽃은 흰 장미 같다.
꽃술은 황금색으로 가을에 꽃이 피어 맑은 향기가 은은하다" 했다.
차나무는 늘 푸른 나무다.
차꽃은 대략 10월에서 12월까지 핀다.
꽃잎은 보통 다섯 장(퇴화한 것은 6-8장)이며, 흰 장미나 찔레꽃 같은 흰 꽃이 핀다.
결실은 다음에 가을이다.
꽃과 열매가 만난다 하여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 불리기도 한다.
10여 만평 '설록다원'에는 녹차의 어린 새순을 서리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상(防霜) 팬'이 설치되어 있다.
즉 야간에 지표면의 온도가 0도 C일지라도 지상 6-10M 높이에서는 3-6도 C의 따뜻한 공기층이 있는데, 온도가 내려갈 경우 방상(防霜) 팬을 이용하여 상층부의 따뜻한 공기를 아래 다원으로 불어 차나무 위에 차가운 공기가 머무르지 않게 함으로써 서리 피해로부터 새순을 보호할 수 있다 한다.
월출산은 호남의 명산으로 산세가 빼어나고 큰 일교차와 강한 햇볕을 막아주는 맑은 안개가 끼는 지리적 특성을 갖추 곳이다.
일찍부터 떫은맛이 적고 향이 좋은 재래종 차나무가 자라던 곳이다.
옥판봉은 구정봉 서남쪽 능선을 일컫는다.
금릉경포대에서 무위사 가는 산길은 차밭과 삐죽삐죽한 바위 능선이 바라 보이는 아름다운 길이다.
도로를 버리고 산기슭 차밭에 올라 푸른 차밭 속을 걷는다.
맑은 안갯속에 피어나는 은은한 차향을 맡는다.
가슴이 푸르게 물든다.
보였다 숨었다 또다시 보이는 천황봉과 삐죽삐죽한 바위 봉우리들
가슴이 뛰고 있다 푸른 차밭 속에서
다산 정약용과 초의가 묵었던 백운동 별서(白運洞 別墅)를 찾아 걸어가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7살 때 오언시를 지었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거리가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차 문화 유적지를 찾고 차향을 찾아 걸으면서, 다산 정약용을 깊이 참구 하게 되었고 그의 어릴 적 지었다는 시를 접하고 무릎을 쳤다. 수많은 산을 오르내렸지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많이 작은 산에 가려 큰 산을 보지 못하는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 이성부도 놀라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라는 시를 지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이성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은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먼 데서 보면 드높은 산줄기의 일렁임이
나를 부르는 포근한 손짓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봉우리 제 모습 감춘다
오르고 또 올라서 정수리에 서는데
아니다 저어기 더 높은 산 하나 버티고 있다
이렇게 오르는 길 몇 번이나 속았는지
작은 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가두고
그때마다 나는 옥죄어 눈 바로 뜨지 못한다
사람은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
또 한 번 작은 산이 백화산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다산은 이것을 일곱 살 때 보았다는데
나는 수십 년 땀 흘려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예순이 넘어서야 깨닫는 이 놀라움이라니
몇 번이나 더 생은 이렇게 가야 하나
몇 번이나 더 작아져 버린 나는 험한 갈등 넘어야 하나
백운동 별서로 가기 위해 안운마를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마을 집에는 빨간 감이 달려 있다.
안운마을회관을 지나 '삼남대로' '정약용 남도 유배길'이라 쓴 펄럭이는 리본을 따라 마을길을 걷는다.
입구 돌담장과 허름한 집 너머 멀리 옥판봉 삐죽삐죽한 봉우리들이 보인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고, 동백나무가 빼 욱한 돌담장 길 따라 조금 들어가니 나무가 울울한 심산유곡 같은 백운동계곡이 나온다.
튼튼해 보이는 나무뿌리 옆을 지나니 좌측 위쪽으로 '白雲洞' 세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백운동 계곡을 건너는 조그만 나무다리를 건너니 커다란 바위가 절벽처럼 우뚝 서 가로막고 서 있는데 다산이 읊은 '백운동 12 승사 중 '창하벽'이다.
그 위 묏등에 '정선대'가 있다.
솟을대문이 닫혀 있어 담장을 따라 조금 오르다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있다.
여러 마리의 개들이 달려 나오며 짓기 시작한다.
다시 돌아 나와 솟을대문을 밀어보니 가볍게 열린다.
백운동 정원이 모습을 나타낸다.
초정과 사랑채, 본채가 각종 수목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구불구불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는 빨간 감이 달려 있고, 울긋불긋한 나뭇잎, 정원에 수북이 떨어져 쌓인 노란 은행잎, 파랗게 자라고 있는 풀,
그리고 요란한 개 짖는 소리로 백운동 정원은 한바탕 장관을 이루워내고 있다.
섬돌 따라 따라 유상곡수 정원을 거닐며 깊은 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는다.
다산과 초의, 그리고 백운동 입산조 백운동은 이담로와 그의 후손이며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의 행적을 떠 올리며 상념에 젖는다.
정민이 쓴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에서 백운동 별서의 공간 구성과 내력에 관련된 글을 옮겨 본다.
"이시헌이 백운동 관련 제현의 시문을 모아 엮은 '백운세수첩(白雲世手帖)'이 전한다.
여기 실린 이담로가 지은 '백운동명설(白雲洞名說)'을 먼저 읽어본다. 백운동은 월출산 옛 백운사의 아래편 기슭에 있다.
앞에 석대가 있는데, 올라가서 보면 뒤편으로 층암(層巖)이 옥처럼 서 있다. 송죽이 길을 덮고, 맑은 시내가 어리 비친다.
이 물을 끓어 구곡으로 만들어 섬돌을 따라 물소리가 울린다. 냇가의 바위 위에는 또 '백운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옛 이름을 인하여 현판을 걸어두고 그 그윽함을 기록해 둔다.
이담로는 '백운동유서기(白雲洞幽棲記)'란 글도 따로 남겼다.
월출산 남쪽, 천불동 기슭에 골짜기가 있다. 땅이 후미지고 그윽하며, 물은 맑고도 얕다. 층암이 절벽처럼 우뚝하고, 흰 구름이 골짝을 메워 영롱하니, 또한 아름다운 곳이다. 구양수의 저주와 유종원의 우계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그윽한 운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울물을 끌어서 술잔을 띄움은 왕희지의 난정(蘭亭)을 본받고자 함이요, 바람의 가락에 맞춰 종소리가 들림은 임포의 고산(孤山)을 본받기 위함이다. 대저 한가로이 지내며 뜻을 기르고, 문묵으로 즐거움을 부치는 것은 또한 이것들을 인하여 도움 받을 수 있다.
이에 물에는 연꽃을 심어 천연스러운 자태를 아끼고, 동산에는 매화로 해맑은 풍격을 숭상하며, 국화는 절개를 취해 서리에도 끄떡 않는 자태를 돌아본다. 소나무는 절조를 취해 뒤늦게 시드는 자태와 문채 남을 시험하였다. 물가에는 대나무가 있어 마음 맞음을 의탁하고, 뜨락에는 난초를 심는다. 조롱에는 학을 두어 달빛에 울고, 시렁에는 거문고가 있어 바람에 운다. 이것이 백운동의 생활이다. 마침내 기문으로 삼는다. "
요란하게 쉬지 않고 개가 짖어대니 안채 방문이 열리면서 주인이 나온다.
만나 보기 위해 얼른 안채로 향하니 개들이 더욱 기성을 부리니 주인이 나무란다.
"이선생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白雲幽居" 편액을 사진 촬영하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한다.
야생차에 관해 질문하니, 대나무숲 속에 야생차가 자란다고 한다.
백운동별서를 지은 백운동 입산조 白雲洞隱 이담로의 후손인 이효천 옹이 '白雲幽居'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초당과 유상곡수가 있는 내정원 담장을 나서니 외정원이다.
돌계단을 밟고 묏등을 올라서니 정선대(亭仙臺)다.
옛 주춧돌이 있던 자리에 亭仙臺를 복원해 놓았다.
소나무 대나무 배롱나무 동백나무 등이 빼 욱하게 둘러싸고 있는 정선대
마루에 걸터앉아 앞을 바라보니 나무사이로 백운동 정원이 굽어보이고, 옥판봉도 나뭇잎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옛날 다산이 시를 짓고 초의가 백운동도를 그리던 모습을 떠 올려 본다.
정민이 쓴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에서 다산의 '백운첩(白雲帖)'과 초의의 '백운동도(백雲洞圖)' 관련 글을 옮겨 본다.
"백운동이 다시금 주목받게 되는 것은 몇 세대가 지난 후 다산 정약용에 의해서다. 다산은 1812년 9월에 제자인 초의와 윤동을 데리고 월출산에 산행 와 백운동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산은 7년 전인 1805년에 월출산에 놀러 왔다가 정상에서 탈진하여 간신히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에 전날의 유감 풀이를 겸해 제자 둘을 데리고 원족을 왔던 것이다. 유람 후 다산은 백운동의 승경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이곳의 12 승사(勝事)를 노래한 13수의 시를 짓고,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와 '다산초당도'를 그리게 하여 '백운첩'으로 묶었다. 서시 격의 시는 '백운동 이 씨 산거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山居)'이다. 다산이 꼽은 백운동 12 승사는 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취미선방, 모란체, 창하벽. 정유강, 풍단, 정선대, 홍옥폭, 유상곡수, 운당원 등이다. 시의 내용을 간추려 당시 백운동의 원림 공간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백운동의 제1경은 옥판봉을 꼽았다. 옥판봉은 월출산 구정봉의 서남쪽 봉우리의 이름이다. 이름하여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玉版爽氣)이다. 산다경은 동백나무 오솔길이다. 지금도 백운동으로 들어서는 별서의 아랫자락에는 길 양편으로 동백나무가 무성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매 오는 집 둘레 바위 언덕에 심어둔 1백 그루의 홍매를 가리킨다. 취미선방은 본채 아래쪽에 화계 위에 세운 세 칸 초가집이다. 모란체는 모란을 심어둔 화단이고, 창하벽은 계곡을 건너 별서로 들어설 때 집 앞을 막고 선 푸른 절벽이다. 다산은 여기에 붉은 먹으로 '창하벽'이라고 써놓았다고 했다. 정유강은 소나무를 열 지어 심은 집 남쪽의 작은 묏등이다. 창하벽의 위편에 해당한다. 풍단은 시냇가에 임한 양편에 단풍나무를 심어둔 평평한 땅이다. 다산은 '아언각비'에서 단풍나무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가 강진에 귀양 살 적에 백운동 이 씨 산장에 단풍나무 몇 그루가 있는 것을 보았다. 높고 커서 하늘을 찌를 듯하여 기둥감으로 쓰기에 마침맞았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여태 꽃이 피어 열매 맺는 것을 못 보았다고 하니 기이하다 할 만하다."라고 적은 바로 그 단풍나무다. 정 선태는 정유강 옆에 세운 작은 정자의 이름이다. 현재 아람 드리 세 그루 소나무 옆 예전 주춧돌 자리에 정자를 복원해 놓았다.홍우폭은 계곡을 건너기 전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다. 지금은 건천이 되어 유량이 거의 없지만,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리면 장관을 이룬다. 풍단을 지나 내려온 물이 물가에 있던 죽정(竹亭) 앞을 세차게 치며 흘러 폭포가 된다. 유상곡수는 앞서 언급한 마당에 있는 물굽이 길이다. 계곡 물을 끓어서 담장 밑으로 들이고, 섬돌 밑을 따라 들어와 상지(上池)로 든다. 다시 물길을 꺾어하지(河池)로 대고, 한 번 더 꺾이어 바깥 계곡으로 돼 흘러 나간다. 다산은 시에서 6곡(曲)이라 했는데, 바깥쪽의 굽이 수를 합치면 9곡(曲)이 맞다. 운당원은 집 오른편의 무성한 대나무 밭을 가리킨다. 이곳에 야생 차가 군집을 이루며 자란다. 이와는 별도로 이 집의 주인이었던 다산의 제자 이시헌도 백운동 14경을 노래했다. 초의는 1839년 가을에 백운동을 다시 찾았다. 그는 그곳에 심어져 있던 백학령(白鶴翎)이란 고급 품종의 국화를 보고 시를 지었고, 이 국화 한 그루를 얻어가며 한 수 더 지었다. 이런 것을 보면 당시 백운동의 정원은 여러 종류의 나무뿐 아니라 기화이초들도 심어져 정성스레 가꾸어지고 있었다. 이상 살폈듯 백운동 별서는 대단히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룬 원림이며,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를 보여준다. 특히 유상곡수는 민간 정원에서는 달리 예를 찾기 어려워 그 가치가 높다. 다산은 이 백운동의 풍광을 동행했던 초의를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러고는 맨 뒤에 다음과 같은 발문을 남겼다.
가경 임신년(1812년) 가을, 내가 다산으로부터 백운동에 놀러 가서 하룻밤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 승려 의순을 시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勝事를 읊어서 주었다.
끝에는 다산도(茶山圖)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초의가 다산의 분부로 그린 '백운도'는 다산의 12 승사 시와 함께 '백운첩'으로 묶여 전한다. '백운첩' 끝에는 역시 초의가 그린 '다산도'가 실려 있다. 다산은 '백운첩'의 첫 장에 '백운도'를 그리고, 끝에는 '다산도'를 실어 둘 사이에 어느 곳이 더 나은지 겨뤄보자는 뜻을 비췄다. 이 두 공간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있다. 계류나 샘물을 끌어와 상하 방지에 물을 대고, 화계를 두어 꽃과 채소를 심었으며, 암벽에 각자가 있고, 구역별로 화훼와 나무를 구분하여 심었다. 이 점은 담양 소쇄원이나 명옥헌, 대둔사 일지암에도 보이는 공통점이다. 이것으로 호남 원림의 원형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백운동과 월산작설차
백운동에서 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역시 다산 이후의 일이다.
다산이 해배되어 69세 나던 1830년 3월 15일에 제자 이시헌(백운동 별서 주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떡차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부분이 있다."다산은 이 편지에서 찻잎을 삼중 삼 쇄, 즉 세 번 쪄서 세 차례 말린 후 이를 절구에 곱게 빻아서 석천수에 개어 진흙처럼 짓이긴 후, 작은 떡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제다법을 제시했다. 또한, 집안에 전하는 이시헌의 친필 중에 "월출산에서 나는 작설차 한 갑과 황초 두 자루를 부칩니다.라고 한 것이 있고, 이시헌의 아들 이면흠이 누군가에게 보낸 서찰 중에도 "향명 8갑을 삼가 드리오니, 정으로 받아주시길 바라나이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두 글 모두 차의 단위를 갑으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떡차가 아닌 산차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백운동에서 만든 차는 다산 방식의 떡차와 갑에 넣어 포장하는 산차가 함께 만들어졌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백운동 대숲에서 나는 차는 대를 이어 전승되며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음다풍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백운동 인근 월남리에 살던 이 집안의 이한영(1868-1956)이 만들어 판매한 '금릉월산차'나 '백운옥판차'로 그 맥이 이어졌다. 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이고, 월산은 월출산을 줄여 말한 것이다. 또 백운동 옥판봉에서 나는 차라는 뜻이다. 이곳 대숲에서 자라는 야생 차를 따서 만든 백운동의 월산작설차는 지금도 이효천 옹에 의해 5대 조인 이시헌이 만들었던 옛 방식대로 만들어지고 있다." (정민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에서)
대숲에서 푸릇푸릇 자라는 야생차의 푸른 기운을 마시고 백운동 정원을 뒤로한다.
무위사를 향해 걷는다.
'도보여행기 > 茶山과 草衣가 걸었던 옛길을 걷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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