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카로운 봉우리 사이로 달이 뜨는 月出山

2011. 11. 17. 14:33도보여행기/茶山과 草衣가 걸었던 옛길을 걷다.

茶山과 草衣가 걸었던 옛길을 걷다.

2011. 11.7  월요 흐림

 

(1) 날카로운 봉우리 사이로 달이 뜨는 月出山 

 

08:00 호남고속터미널에서 영암행 버스에 오른다.

영암버스터미널에서 군내버스로 갈아타고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왕인박사유적지에서 내린다.

 

노란 국화가 피어있는 왕인박사유적지 너머 멀리 월출산 삐죽삐죽한 능선이 보인다.

영암의 얼굴은 무어니 무어니해도 월출산이다.

월출산은 천황봉 구정봉 도갑봉 등 높은 봉우리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늘어서서 병풍모양을 이루고 온갖 형상의 바위들로 가득하다.

월출산 북쪽은 영암땅이고, 남쪽은 강진이다.

월나산(月奈山),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불렸던 월출산(月出山)은 삐죽삐죽한 바위 봉우리 사이로 달이 뜬다.

날카로운 봉우리 사이로 달이 뜨는 월출산 

떠 오르는 달이 아름다워 "달뜨는 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월출산을 바라보며,

南州唯一畵中山

月下晴天出比間

남쪽 고을에 그림 같은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

고 읊었다.

 

손 정 모

영암의 명산이라
하늘에 치솟아 굽이치니
능선마다 정기로 눈부시다. 

 

달빛 능선에 부딪힐
때마다 터지는
바위 속 울음소리

 

바람 폭포의 물줄기로
골짜기 젖도록 흐느끼다가
산울림이 되어 흩어진다.

 

통천문으로 치솟던 바람

마음껏 휘젓던
천황봉에

 

밤 깊어
달이
살며시 옷을 벗는다.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왕인박사유적지

영암 군서면 구림리  왕인유적지 성기동에는 왕인의 탄생지라 전해지는 곳에 몇 개의 바위가 있는데,  한 바위에 "古崔氏園 今曺家庄'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도선의 탄생 설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성기동 골짜기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도선을 낳았다는 것이다.

또 지금의 구림리는 도선이 태어난 후 버려졌다가 비둘기 떼의 보살핌을 받은 곳이리고 해서 비둘기 숲(鳩林里)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왕인 탄생지  도선의 탄생설화가 있는 집터이기도 하다.

 

바위에 새겨진 "古崔氏園 今曺家庄" 글씨

 

                               

왕인 집터 오른쪽  성기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聖川이라 하였고, 그 옆 우물을 왕인이 마셨다 하여 성천(聖泉)이라 불렀다.

 

성천(聖泉)

 

주지봉 산기슭 오솔길을 1시간여 걸어 문산재 양사재에 다다른다.

안내문에 의하면,

왕인의 수학지였던 문산재 뒷산 월대암 밑에는 왕인이 책을 보관해 두고 공부했다는 책굴이 있다. 그 입구 쪽에는 왕인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자들이 세운 왕인 석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구림 주변에 살고 있는, 50대 이상의 주민들은 문산재를 문수암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문수암이 문산재가 된 것은 1986년 왕인유적지로 '문산재'와 '양사재'가 재 건립되면서였다.

역사적 검증이 확인되지 않은 채 문수암이 문산재로 뒤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오류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문수암 위쪽 바위 사이에 위치한 미륵입상(문수보살상)도 똑같은 수모를 겪게 되었다.

왜냐하면 '문수보살 입상'이 졸지에 '왕인석상'으로 이름이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문산재 위의 석불은 미륵불, 또는 문수보살상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 이유로 천불천탑이 있는 화순 운주사의 석불과 고창 청량산 문주사에 있는 문수보살상과 그리고 삼각산 도선사 석불과 똑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는 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 세 곳의 석불이 도선국사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1986년 문수보살상은 왕인상으로 탈바꿈되었다."

 

왕인 유적지는 일부 학술적 고증이 허술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산재와 양사재

 

                                  

 

책굴

 

                                       

 

월대암 아래 두 손을 소매안에 넣은 도포 차림의 왕인 석상   그러나  미륵입상 (문수보살상)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돌 담장이 아름다운 죽정마을을 지난다.

죽정마을 도로 옆 묘소가 있는 작은 둔덕에  "國長生"이 있다.

자연돌을 거칠게 다듬어 만든 비석에 "國長生"  세 글자와, 그 아래 부분에 "石標四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절의 경계를 표시한  국장생(國長生)

 

                                  

단풍나무 우거진 길을 걸어 도갑저수지를 지나니, 도갑교 앞에 노거수 팽나무가 우뚝 서 반기고 있다.

월출산 산장에 베낭을 푼다.

도갑사 저녁 범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수령 450년의 노거수인 팽나무

 

2011. 11. 8.  화요  안개 흐림

06:50분 숙소를 나선다.

해 뜰 무렵인데도 짙은 안개로 아직 어슴푸레하다.

 

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예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산(해발 376m)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도량이다.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대가람으로 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하시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치셨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수미·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5층석탑(보물 제1433호),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해탈문(解脫門)은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좌우 1칸에 절 문을 지키던 금강역사상과 문수 보현 동자상은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다. 아마도 성보박물관에 이관되어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월출산 도갑사" '해탈문' 현판도 떼어져 보이지 않고, 금강역사 문수 보현동자상도 보이지 않는 텅 빈 해탈문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번뇌를 훌훌 벗어던진 듯하다.

 

버리고 비우라 해탈문은 말한다.

동백나무 위 동박새들이 조잘조잘 이리저리 종종 뛰며 부산히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신축 중인 루다

 

 

 

누 아래로 화려한 대웅보전과  미끈한  오 층 석탑이  보인다.

 

 

새벽안갯속에   오 층 석탑과  대웅보전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도갑사석조(道岬寺石槽)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도갑사 안에 놓여 있는 것으로, 물을 담아두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였던 일종의 돌그릇이다. 길쭉하고 네모난 돌의 안을 파내고, 각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는데, 아랫부분을 둥글게 반원모양으로 깎아 놓아 옆에서 보면 작은 통나무배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안쪽 밑바닥에는 물을 뺄 때 쓰이는 작은 배수구멍이 뚫려 있다. 표면에 "康熙二十一年 壬戌"이라 새겨진 글자가  남아 있어 조선 숙종 8년(1682)에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갑사석조(道岬寺石槽)

 

 

석조에는 찰찰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대웅보전 현판을 운룡이 감싸고 있다.

 

                                      

 

대웅보전 꽃살문이 아름답다.

 

 

 

 

도갑사 오층 석탑 (道岬寺 五層石塔)

 보물  제1433호

영암 도갑사 오층석탑은 하층기단을 잃은 채 단층기단 위 5층 탑신부 및 노반석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95년 이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도갑사경내 발굴조사중 하층기단부가 발견되어 2002년 2월 현 대웅전 앞에 2중기단의 5층석탑으로 복원되었다.(현재 높이 5.45m) 조각 및 구조수법 등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각 부재도 온전하게 잘 남아있으며 전체적으로 균제된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석탑이다. (문화재청)

 

도갑사 오층 석탑 (道岬寺 五層石塔)

 

도갑사수미왕사비 (道岬寺守眉王師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도갑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수미는 조선시대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였고,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 임금이 그 스승(왕사)으로 모셨던 인물이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형식적으로 조각된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의 머리처럼 바뀌었으나, 목이 짧다. 앞발과 뒷발의 발톱이 다섯개씩이다. 거북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매우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비몸 위에 놓인 머릿돌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구름 위로 중간과 양 모서리에 다투듯 뒤엉킨 두마리의 용을 새겨놓았다. 선조 14년(1581)에 비가 넘어져 새로 세운 것으로, 인조 7년(1629)에 시작하여 인조 11년(1633)에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로서는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유행하였던 양식과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섬세하게 조각된 구름 위로 중간과 양 모서리에 다투듯 뒤엉킨  두 마리의  용을 새겨놓았다.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의 머리처럼 바뀌었으나, 목이 짧다. 앞발과 뒷발의 발톱이  다섯 개씩이다.                                   거북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매우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도갑사수미왕사비 (道岬寺守眉王師碑)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

 

                               

멀리 주지봉이 안개에  덮여  있다.

 

                                 

단풍나무속의 정자 아래에는 용수폭포가 있다.

이 폭포는 미륵전을 끼고돌아 흐르는 계곡에 위치한다.

옛날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 그 깊이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수심 약 2m 정도이고, 수폭은 5m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쏟아져 산사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나뭇결이  보이는 현판 글씨가 아름답다.

 

                             

 

 

 

 

돌 난간에 새겨진 연꽃

붉게 타는 단풍나무 숲 돌다리를 건너 왼쪽 계단을 오르면 미륵전이다.

아담한 미륵전이다.

 

 

 

 

 

 

미륵전

 

 

미륵전 외벽에 그려진 연꽃을 바라본다.

 

 

뒷 뜰에는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 놓았다. 울울한 대숲이 미륵전을 감싸고 있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道岬寺 石造如來坐像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道岬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89호

도갑사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있는 석조불상이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기법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 가닥의 옷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갸름한 타원형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표현되었다. 광배에 새겨진 조각은 대체적으로 생략이 강하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좌(臺座)는 밋밋한 4 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본래는 연꽃무늬를 새긴 8 각형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부도전 옆에는 도선국사 수미선사비가 있다.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보물  제1395호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를 구비한 석비로 도갑사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높이 517㎝ 규모의 석비이다. 석비가 자리한 탑구(塔區)는 수매의 판석으로 조성했는데, 전면의 구도는 방형이지만, 뒷면은 귀부의 형상과 같이 ‘ㅅ’ 자형으로 조성해 전체적으로는 6 각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코는 큼직하며, 반구형의 양 눈은 부리부리하게 표현하였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4발 중 앞발은 5조, 뒷발은 3조의 발가락이 표현되었으며, 꼬리는 살짝 돌려 왼쪽 발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상면에는 비 좌(碑座)로부터 중단에 이르기까지 넓게 방형의 얕은 받침이 표현되었다. 각 면 중앙의 내곡 된 상면에는 화문(花紋)이 조식되어 있다. 비신은 귀부와 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상면에는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썼으며, 비제(碑題)는 횡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라 음각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이곳에 있던 도선국사의 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로 다른 석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비문의 찬자가 각각 이경석(李景奭), 이수인(李壽仁), 정두경(鄭斗卿)인데 반해 연대는 모두 「숭정(崇禎) 병자(丙子) 사월(四月) 일(日) 입(立)」이라 기록되어 있어 1636년(조선 인조 14)에 건립이 시작되어 1653년(조선 효종 4)에 준공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양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수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단에는 28판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으며, 상면에는 운문 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 석비는 1653년(조선 효종 4)에 건립된 것으로 우선 규모 면에서 다른 비석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각부의 양식에서 귀부는 다른 예와는 달리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비신 역시 조성재료가 대리석이라는 점 외에도 양 측면에 조각된 운룡문은 매우 힘찬 기상과 율동감을 지니고 있어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비의 건립기간이 18년임을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 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아가 대부분의 석비가 1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도선과 수미선사를 표방하고 있어 이 역시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한편 건립연대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비문이 각각 독립된 3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찬자는 물론 쓴 사람과 각자 한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은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석비를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3년의 모금활동과 건립기간 18년을 포함한 21년간에 걸친 건립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2번째 비문에는 앞선 비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며, 석재의 채취로부터 이동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3번째 비문에서는 음기를 청탁받은 사실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석비의 건립과정에서 3개의 비문에 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 석비는 규모의 거대함과 더불어 건립에 소요되는 기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아울러 미술사적으로 볼 때도 조선후기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도선과 수미선사 등 2인이라는 점과 글씨 역시 서예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 판단된다.

 

 

 

 

 

하단에는 28판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으며, 상면에는 운문 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상면에는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썼으며, 비제(碑題)는 횡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  수미대선사비명병서」라 음각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이곳에 있던 도선국사의 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로 다른 석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코는 큼직하며, 반구형의 양 눈은 부리부리하게 표현하였다.  앞발은 5조의 발가락으로 표현되었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4발 중 앞발은 5조, 뒷발은 3조의 발가락이 표현되었으며, 꼬리는 살짝 돌려 왼쪽 발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비석  양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듯하다.

 

                              

도선국사(道詵國師)

옥룡사에 있던 비의 비문을 보면, 도선은 영암 사람으로 성은 김 씨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나서 효공왕 2년(898)에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맑은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꾼 후 도선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던 도선은 열다섯 살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유명한 절과 산을 다니며 수행하다가, 문성왕 8년(846)에 동리산 태안사의 혜철을 찾아가 배우고 크게 깨우쳤다. 그 후 전라남도 광양 백운 백계산의 옥룡사에 머물렀는데 언제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들은 헌강왕은 그를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 도선은 그 후 태안사로 돌아가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효공왕은 그에게 요공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편, 도선수미비의 비문을 토대로 이루어진 '도선국사실록'에는 이와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 즉, 도선의 어머니는 최 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처녀 적에 연못 속에 있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가져서 도선을 낳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고 보니 남의 이목이 두려웠으므로 할 수 없이 아이를 숲에다 버렸다.

며칠 후에 가보았더니 비둘기 떼가 아이를 보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하게 여겨서 도로 데려다 길렀다. 아이는 아버지가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그 아이는 열세 살 때 당나라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가서 일행선사에게 풍수비보설을 배웠다. 그는 헌강왕 1년(875)에 49세의 나이로 신라로 돌아온 후, 송악 왕릉의 집에서 훌륭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왕건의 출생을 예언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국의 지기를 비보하는 사찰 500여 곳을 건립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이제 절의 경내를 벗어나 산행길에 오른다.

단풍나무 잎새 사이 길을 걷는다.

산새들만이 이따금 정적을 깨는 낙엽 쌓인 고독한 산길을 오른다.

코 끝에 묻어오는 산 냄새

붉게 물든 감잎을 줍는다.

산길을 허위허위 오른다.

이따금 산 새소리가 산의 정적을 깨곤 한다.

미왕재에 도착하니 짙은 안개로 덮여 있다.

 

 

 

 

 

 

 

바위틈 동굴 같은 길을 지나 거대한 두 개의 암석 봉우리 구정봉에 오른다.

구정봉은 꼭대기에 샘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하여 구정봉(九井峰)이라 한다.

아홉 개의 샘이란 오랜 세월 화강암이 물에 삭아 움퍽 파인웅덩이를 말한다.

이 웅덩이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한다.

 

삐죽삐죽한 월출산의 진경이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고산 윤선도의 시가 생각난다.

 

 月出山이 높더니마는 미운거시 안개로다

 天皇第一峰一時에 그리와다

 두어라 회퍼딘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

 

 

 

구정봉 바위에 움퍽  파인  웅덩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국보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바위 벼랑에 새겨진 여래좌상 앞에 서서 진한 감동의 파문을 느낀다.

눈과 입들이 옆으로 길게 그어진 선들에서 장중한  느낌을 받는다. 

 

 

 

이 불상은 암벽을 불감(佛龕) 형태로 파고 그 안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큰 얼굴은 근엄하고 박력 있는 느낌을 준다.

 

                            

 

 

당당한 신체에 비하여 팔은 가늘게 표현하고 있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靈巖 月出山 磨崖如來坐像)

국보  제144호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구정봉의 서북쪽 암벽을 깊게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높이 8.6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을 한 높이 86㎝의 동자상을 조각하였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큰 얼굴은 근엄하고 박력 있는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 옷은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옷주름은 가는 선으로 새겼는데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섬세한 옷주름과 양감 있는 신체의 표현에서 탄력성과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당당한 신체에 비하여 팔은 가늘게 표현하고 있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조각하였으며, 그 안에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정감과 장중한 인상을 주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기법과 더불어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반면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커진 얼굴과 너무 작게 표현된 팔 등에서 불균형한 비례와 경직된 표현이 엿보여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조각하였으며, 그 안에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을 한 높이 86㎝의 동자상을 조각하였다

 

                                             

 

  

   

 

 

   

 

 

 

마애석불(磨崖石佛)
                           최 영 복

월출산 기슭에
하얀 솜이불
둥실 두둥실 너울 되며

천황봉 빛에 따라
구정봉에 내리비친
장엄한 마애석불(磨崖石佛)

빛에 바위상에
염원(念願)하는 내세의 번뇌(煩惱)로
고행(苦行)의 해탈(解脫)을 얻었네

침묵(沈默)의 마애(磨崖)처럼
고행(苦行)의 수도승(修道僧)처럼
천년(千年)의 한(限)을 넘나들며

인생(人生)의 무상(無想)함이
미륵(彌勒)의 미소(微笑)처럼
마애(磨崖) 위에 떠 흐르네

 


                           

마애여래좌상에 1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1층탑신과 3층까지의 옥개석만 남아있는 삼층석탑  -  멀리 국보 마애여래좌상이 보인다.

                                    

마애여래좌상에서  산죽이 우거진 산길 따라 내려가니  용암사지 작은 둔덕 위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우거진 잡초 속에 돌확이 보이고  빈 절터 여기저기 주춧돌이 뒹굴고 있다.

탑봉에 올라  우뚝 서 있는 부서진 삼층석탑의 모습에서 천 년 세월을 본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앞을 바라보니 안갯속 어렴풋한 기기묘묘한 바위봉이 신비롭다.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 (靈巖 月出山 龍巖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1283호

용암사는 기암괴석이 많아 남쪽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구정봉 아래 있다. 300평에 가까운 부지에 수많은 기와조각들과 주춧돌이 남아 있어 건물이 있던 자리임을 알게 한다. 1955년 ‘용암사’라고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용암사’ 임을 알게 되었으나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중심 건물터 남동쪽에 있는 이 탑은 일명 ‘탑봉’이라 불리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었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둘레에 구역을 조성한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기단의 윗면에는 높직한 괴임 2단을 별도의 돌로 끼워 두었는데, 이 가운데 1매가 없어져 1966년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이 보충해 놓았다. 탑신의 1층 몸돌은 2매의 돌로 구성하였고, 2·3층 몸돌은 각각 1매로 하였으며,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1·2층은 2매로, 3층은 1매로 구성하였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 역시 1층은 5단, 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한 단씩 줄어들고 있다. 윗면 모서리는 석탑에서는 흔치 않게 두툼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1966년 무너진 석탑을 다시 세울 때, 아래층 기단에서 백자사리호 1점, 금동보살좌상 1점, 청자대접 1점, 사리 32와, 철편 11점 등이 발견되었다.

 

 

 

                                                 

탑봉 위에  우뚝 서 있는 삼층석탑   부서진 석탑의 모습에서 오랜 세월을 본다.

 

                                

 

 

 

 

바람재에서 금릉경포대로 하산한다.

안갯속에서 월출산 천황봉과 삐죽삐죽한 능선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산기슭 가득 부서진 돌들이 쌓여 있다.

이 돌들은 지구과학용어로 애추(崖錐, Talus)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산악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급한 절벽을 이루는 기반암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붕괴되어 떨어진 것이 경사면 아래쪽에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편백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삼나무도 보인다.

 

경포대계곡의 둥글둥글한 크고 작은 돌들이 아름답다.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

월출산 금릉경포대 계곡은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으로 길이가 약 2km이다. 크고 작은 바위들 사이로 맑은 물이 굽이치며 곡류와 폭포수를 빚어내고 있다. 금릉(金陵)이란  1172년 고려시대부터 부르던 강진의 옛 이름이다. 금릉경포대는 강릉 경포대와 한글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 포자가  틀리다. 포 강릉 경포대의 포는 물가포(浦)이고  금릉 경포대의 포는 베포(布)인데,  이는 월출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모습이 무명베를 길게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鏡布臺라 불렀다 한다.

 

 

 

 

금릉교를 지나 조금 내려서니 월출학생야영장 앞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과  붉게 물든 단풍나무 잎새가  어울려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