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理想鄕 靑鶴洞을 찾아서

2011. 8. 6. 23:25도보여행기/차향(茶香) 찾아 걷는 길

(4) 理想鄕 청학洞을 찾아서

 

용강리에서 화개천에 걸쳐있는 다리를 건넌다.

다리 아래에 흐르는 물은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흐르는 쌍계(雙磎)가 만나 합쳐진 물이다.

숲이 울창한 비스듬한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니 계곡 물소리 요란한  길목 양쪽에 큼지막한 바위가 문설주처럼 우뚝 서 있다.

좌측 바위에는 '雙磎', 우측 바위에는 '石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신라 때 학자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석문( 石門  )

 

                                                                       

소요태능 스님이 孤雲 崔致遠의 石門 筆迹을 보고 시를 지었다. 

 

題雙溪寺 崔孤雲 石門筆迹

 

두류산과 방장산은 참으로 仙界로다
기쁘게 읊으면서 석문에 새겼으니
석문의 필적은 인간의 보배가 되었는데
신선이 노닌다며 흰구름이 가로막네
 

석등을 지나 비림에 합장하고 일주문에 다다른다.

'三神山雙磎寺'라 쓴 편액의 예서체 글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일주문 주련에는,

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안에 들어서면 알음 아리 두지 말라 

無解空器 大道成滿   알음아리 비운 그릇에 대도가 가득 차리라

 

마음을 허공같이 비우라 한다.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구 층 석탑을 우러른다.

그 뒤로 팔영루가 보인다.

 

 

구 층 석탑과  팔영루

 

                                            

팔영루 주련을 읽어 내려간다.

 

塵墨劫前早成佛    진묵겁전에 일찍이 이미 성불하셔서
爲度衆生現世間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바세계 출현하시니
巍巍德相月輪滿    덕높으신 부처님 상호 보름달처럼 원만하여
於三界中作導師    삼계화택 가운데 대도사가 되시었네. 
實際成法八萬門    실제에 맞춘 법 팔만문을 이루시니
門門可入得解脫    문문마다 들어가면 해탈을 얻으리라 
  

팔영루(八詠樓)

이곳은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를 만든 

우리나라 불교음악의 발상지이다.

또한, 범패 명인들을 배출하는 교육장이기도 했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서 '어산(魚山)'을 작곡했다고 하여 '八詠樓'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 목조 와가로서 2층으로 되어 있고 총건평은 106평이다. 

 

진감선사비명에 고운 최치원은 진감선사 혜소와 팔영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당(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옥천(玉泉)의 여향(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팔영루 옆으로 돌아 들어가니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서 있고  그 뒤로 대웅전이 보인다.  

팔영루에서 쌍계사 '템플스테이 여름 수련회 법회'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댓돌을 따라 하얀 고무신이 정열 되어 있다.

 

댓돌을 따라 하얀 고무신이 정열되어 있다.

 

                                  

대웅전과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약간 어긋나 보인다.

당초 금당을 기준으로 탑비가 세워졌기 때문이란다.

                    

 

진감선사대공탑비와  대웅전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 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 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그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년)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썼으며 승, 환영이 새겼다.  이 탑비는 고운 최치원의 四山碑의 하나로 유명하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에 입당,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 쌍계사를 창건하고 역대 왕의 존경을 받다가 문성왕 12년(85) 쌍계사에서 77세로 시적 하였다. 비의 높이는 3m 63cm, 탑신의 높이는 2m 2cm, 혹은 1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현재 비신의 우측 상부에 크게 함락된 부분이 있고 또 균열이 상당히 심하다. 중앙에 높직한 비 좌를 마련했는데 4면에는 운문이 있고 상면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귀두는 짧고 추상적인 동물의 머리로 표현되어 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재이주하는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비문의 자경은 2.3cm, 자수는 2,423자이다. "(쌍계사)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 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검은 대리석(점판암)으로 만든 몸돌은 임진왜란 6.25 동란등 병화로 많이 손상되었으며, 몸돌에 보조 철틀을 하여 유지되고 있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고운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 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천 년 고찰 쌍계사의 상징이며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이는 고운 최치원의 손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민애왕이 '慧昭'라는 호를 주었고,  헌강왕이 혜소에게 '眞鑑禪師'라 시호하고 '大空靈'이란 塔號를 내렸으며, 정강왕이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고운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고 쓰게 하였다.       

이듬 해인 진성여왕 원년인 887년에 이 비가 건립되었으니,  올해로 1,124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으뜸이며, 최치원의 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이다.

2,423자의 해서체 글씨가 2.3cm의 크기로 새겨져 있는데 字의 운과 율에도 고저장단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神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임진왜란 등 병란으로 우측 상부가 함몰되고 또 비신 곳곳이 균열 손상되어 보조 철틀을 하고 비신이 유지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글씨의 마멸도 심한 편이지만, 영조 때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관되어 있어 다행이다.

  

또한, 천왕봉을 오른 후 쌍계사로 내려온 김일손이 진감선사비를 보고 '속두류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거북 받침에 용의 머리를 새긴 옛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에는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라 새겨졌고.......

인간사 흥하고 망함이 끝없이 반복되어 온 가운데서도 홀로 우뚝 서서 변함이 없으니 감탄을 아니할 수 없다......

유독 이 비석에 감회가 더한 것은 최고운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 있기도 하거니와 또 그는 산과 물을 찾아 유랑한 사람으로 그 감회가 

뜻을 같이 하는 백세 이후의 사람에까지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석에 낀 이끼를 어루만지는 이 마음 한없이 무량한 감회에 젖는다."라고.

 

진감선사비에 새겨진 고운 최치원의 글씨(자료 쌍계사) 字의 운과 율에도 고저장단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신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진감선사비명' 전문을 옮겨 본다.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鑑禪師碑銘  幷序」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漁袋臣崔致遠奉敎撰幷書篆額」

夫道不遠人人無異國是以東人之子爲釋爲儒必也西浮大洋重譯從學命寄刳木必懸寶洲 虛往實歸先難後獲亦猶采玉者不憚崑丘之峻探珠者不辭驪壑之深遂得慧炬則」

光融五乘嘉肴則味飫六籍竟竟使千門入善能令一國興仁而學者或謂身毒與闕里之說敎也分流異體圜鑿方枘互相矛楯守滯一隅嘗試論之說詩者不以文害辭不以辭害志」

禮所謂言豈一端而已夫各有所當故廬峰慧遠著論謂如來之與周孔發致雖殊所歸一揆體極不兼應者物不能兼受故也沈約有云孔發其端釋窮其致眞可謂識其大者始可」

與言至道矣至若佛語心法玄之又玄名不可名說無可說雖云得月指或坐忘終類係風影難行捕然陟遐自迩取譬何傷且尼父謂門弟子曰予慾無言天何言哉則彼淨名之黙」

對文殊善逝之密傳迦葉不勞鼓舌能叶印心言天不言捨此奚適而得遠傳妙道廣耀吾鄕豈異人乎禪師是也禪師法諱慧昭俗姓崔氏其先漢族冠盖山東隋師征遼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爰及聖唐囊括四郡今爲全州金馬人也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母顧氏嘗晝假寐夢一梵僧謂之曰吾願爲何阿(方言謂母)之子因以瑠璃甖爲寄未幾娠」

禪師焉生而不啼迺夙挺銷聲息言之勝牙也旣齔從戱必火賁葉爲香采花爲供或西嚮危坐移晷未嘗動容是知善本固百千劫前所栽植非可跂而及者自丱弁志切反哺跬步」

不忘而家無斗儲又無尺壤可盜天時者口腹之養惟力是視乃裨販娵隅爲贍滑甘之業手非勞於結網心已契於忘筌能豊啜菽之資允叶采蘭之詠曁種棘負土成墳迺曰鞠」

育之恩聊將力報希微之旨盍以心求吾豈匏瓜壯齡滯跡遂於貞元卄年詣歲貢使求爲榜人寓足西泛多能鄙事視險如夷揮楫慈航超截苦海及達彼岸告國使曰人各有志請」

從此辭遂行至滄州謁神鑑大師投體方半大師怡然曰戱別匪遙喜再相遇遽令削染頓受印契若火沾燥艾水注卑邍然徒中相謂曰東方聖人於此復見禪師形貌黯然衆不名」

而目爲黑頭陀斯則探玄處黙眞爲漆道人後身豈比夫邑中之黔能慰衆心而已哉永可與赤頿靑眼以色相顯示矣元和五年受具於崇山少林寺瑠璃壇則聖善前夢宛若合符」

旣瑩戒珠復歸橫海聞一知十茜絳藍靑雖止水澄心而斷雲浪跡粵有鄕僧道義先訪道於華夏邂逅適願西南得朋四遠參尋證佛知見義公前歸故國禪師卽入終南登萬仞之」

峯餌松實而止觀寂寂者三年後出紫閣當四達之道織芒屩而廣施憧憧者又三年於是苦行旣已修他方亦已遊雖曰觀空豈能忘本乃於大和四年來歸大覺上乘照我仁域」

興德大王飛鳳筆迎勞曰道義禪師曏已歸止上人繼至爲二菩薩昔聞黑衣之傑今見縷褐之英彌天慈威擧國欣賴寡人行當以東雞林之境成吉祥之宅也始憩錫於尙州露岳」

長柏寺毉門多病來者如雲方丈雖寬物情自隘遂步至康州知異山有數於菟哮吼前導避危從坦不殊兪騎從者無所怖畏豢犬如也則與善无畏三藏結夏靈山猛獸前路深入」

山穴見牟尼立像宛同事跡彼竺曇猷之扣睡虎頭令聽經亦未傳媺於僧史也因於花開谷故三法和尙蘭若遺基纂修堂宇儼若化成洎開城三年」

愍哀大王驟登寶位深託玄慈降璽書餽齊費而別求見願禪師曰在勤修善政何用願爲使復于王聞之愧悟以禪師色空雙泯定惠俱圓降使賜號爲慧昭昭字避」

聖祖廟諱易之也仍貫籍于大皇龍寺徵詣京邑星使往復者交轡于路而岳立不移其志昔僧稠拒元魏之三召云在山行道不爽大通棲幽養高異代同趣居數年請益者稻麻成」列殆無錐地遂歷銓奇境得南嶺之麓爽塏居最經始禪廬却倚霞岑俯壓雲澗淸眼界者隔江遠岳爽耳根者迸石飛湍至如春谿化夏徑松秋壑月冬嶠雪四時變態萬象交光百」

籟和唫千巖竟竟秀嘗遊西土者至止咸愕視謂遠公東林移歸海表蓮花世界非凡想可擬壺中別有天地則信也架竹引流環階四注始用玉泉爲牓屈指法胤則禪師乃曹溪之玄」

孫是用建六祖影堂彩飾粉墉廣資導誘經所謂爲悅衆生故綺錯繪衆像者也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告門人曰萬法皆空吾將行矣一心爲本汝等勉之無以塔藏形無以銘紀」

跡言竟坐滅報年七十七積夏四十一于時天無纖雲風雷欻起虎狼號咽杉栝變衰俄而紫雲翳空空中有彈指聲會葬者無不入耳則梁史載褚侍中翔嘗請沙門爲母疾祈福聞」

空中彈指聖感冥應豈誣也哉凡志於道者寄聲相弔未亡情者銜悲以泣天人痛悼斷可知矣靈函幽隧預使備具弟子法諒等號奉色身不踰日而窆于東峯之冢遵遺命也禪師」

性不散樸言不由機服煖縕黂食甘糠麧芧菽雜糅蔬佐無二貴達時至曾不異饌門人以墋腹進難則曰有心至此雖糲何害尊卑耋穉接之如一每有王人乘馹傳命遙祈」

法力則曰凡居王土而戴佛日者孰不傾心護念爲君貯福亦何必遠汚綸言於枯木朽株傳乘之飢不得齕渴不得飮吁可念也或有以胡香爲贈者則以瓦載煻灰」

不爲丸而焫之曰吾不識是何臭虔心而已復有以漢茗爲供者則以薪爨石釜不爲屑而煮之曰吾不識是何味濡腹而已守眞忤俗皆此類也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

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效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禪師泥洹當」

文聖大王之朝上惻僊襟將寵淨諡及聞遺戒愧而寢之越三紀門人以陵谷爲慮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內供奉一吉干楊晉方崇文臺鄭詢一斷金爲心勒石是請」

獻康大王恢弘至化欽仰眞宗追諡眞鑑禪師大空靈塔仍許篆刻以永終譽懿乎日出暘谷無幽不燭海岸植香久而弥芳或曰禪師垂不銘不塔之戒而降及西河之徒不能確奉」

先志求之歟抑與之歟適足爲白珪之玷嘻非之者亦非也不近名而名彰蓋定力之餘報與其灰滅電絶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使聲震大千之界而龜未戴石龍遽昇天」

今上繼興塤篪相應義諧付囑善者從之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爲名所累衆耳致惑將俾弃同卽異則宜捨舊從新使目示其寺之所枕倚則以門臨複澗爲對乃錫題爲雙溪焉申」

命下臣曰師以行顯汝以文進宜爲銘致遠拜手曰唯唯退而思之頃捕名中州嚼腴咀雋于章句間未能盡醉衢罇唯愧深跧泥甃況法離文字無地措言苟或言之北轅適郢第以」

國主之外護門人之大願非文字不能昭昭乎群目遂敢身從兩役力效五能雖石或憑焉可慙可懼而道强名也何是何非掘笔藏鋒則臣豈敢重宣前義謹札銘云」

杜口禪那歸心佛陀根熟菩薩弘之靡它猛探虎窟遠泛鯨波去傳秘印來化斯羅尋幽選勝卜築巖磴水月澄懷雲泉寄興山與性寂谷與梵應觸境無硋息機是證道贊五朝威摧」

衆妖黙垂慈蔭顯拒嘉招海自飃蕩山何動搖無思無慮匪斲匪雕食不兼味服不必備風雨如晦始終一致慧柯方秀法梀俄墜洞壑凄凉煙蘿憔悴人亡道存終不可諼上士陳願」

大君流恩燈傳海裔塔聳雲根天衣拂石永耀松門」

 

                 光啓三年七月日建 僧奐榮 刻字」

 

 당 해동고진감선사비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과 서

전(前) 중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전자(篆字)의 제액을 씀.

 

무릇 도(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오승(五乘)을 두루 비추었고 유익한 말[가효]을 얻으니 미각은 육경(六經)에서 배불렀으며, 다투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善)에 들게 하고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인(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체제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는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있어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더불어 지선(至善)의 도(道)를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심법(心法)을 말씀하신 데 이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 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고 그림자처럼 가서 붙잡기 어렵다. 그러나 먼 데 이르는 것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비유를 취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공자가 문하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으니 저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하는 데 들어맞은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 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慧昭)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성스러운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창원(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아미(阿(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천시(天時)를 이용하는 것으로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좋은 음식을 넉넉하게 하는 업으로 삼았다. 손으로 그물을 맺는데 힘쓰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데 부합하였다. 능히 부모에게 콩죽을 드려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넉넉하였고 진실로 양친(養親)의 노래[采蘭之詠]에 들어 맞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이내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정원 20년(804), 세공사(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속된 일에도 재능이 많아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자비의 배를 노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나라의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인계(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말 없는데 처함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길이 붉은 수염의 불타야사(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달마(達磨)와 함께 색상(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5년(810년)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학림(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 구름같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증득하였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바로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자각(紫閣)으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공(空)을 관(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태화 4년(830년) 귀국하여 대각(大覺)의 상승(上乘) 도리로 우리 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급히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道義) 선사가 지난 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길상(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의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모니(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축담유(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경(經)을 듣게 한 것 또한 그것 만이 승사(僧史)에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성 3년(838)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재비(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聖祖)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僧稠)가 후위(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

몇 해를 머물자 법익(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慧遠公)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경(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상(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곧 『양사(梁史)』에 “시중 저상(褚翔)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 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왕토(王土)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윤언(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가고 하였고, 또 한다(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당(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옥천(玉泉)의 여향(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였는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기(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일길간인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의 정순일(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거룩하도다! 해가 양곡(暘谷)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명(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부가 비석을 이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과 저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致遠)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法)은 문자(文字)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혹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영(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문인(門人)들의 큰 바램으로 문자(文字)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오능(五能)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해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도(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이른다.

 

입을 다물고 선정(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비인(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

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

산은 성(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

 

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을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

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

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

 

사람은 갔어도 도(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

상사(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

천의(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송문(松門)에 빛나리라.

 

          광계(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중 환영(奐榮)이 글자를 새김 

 

 

  대웅전에 합장하고 주련을 읽는다.

 

 

佛身普遍十方中    불신이 널리 시방세계에 두루하사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의 모든 부처님 한결같으시니
廣大願雲恒不盡    넓고 크신 원력 구름같이 다함없고
汪洋覺海竗難窮    망망한 깨달음의 바다 궁구할 수 없도다.
廣大淸淨妙莊嚴    광대하고 청정한 묘한 장엄이여
衆會圍遶諸如來    운집한 사부대중이 부처님을 에워쌌네.

 

 

대웅전

대웅전의 동쪽에는 마애불이 있다.

큰 암석의 한 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고 크게 표현되었으며, 옷은 두툼하여 옷주름이 무릎 부분 이외에는 뚜렷하지 않다.

 

왼손은 오른손 위에 올려놓고 있어 무엇인가를 받들고 있는 듯하다.
스님으로 보일 만큼 매우 순박한 모습의 이 불상은 옷이나 손모양 등에서 특이한 점이 보이며,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쌍계사 마애불

 

                                                                 

 나한전 돌축대 위에는 이름 모를 분홍색 공모양의 둥근 꽃이 피어 있다.

나한전 주련에는,

 

  靑蓮座上月如生   푸른 연꽃 자리 위에 보름달이 환하듯
  三千界主釋迦尊  삼천대천세계 주인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紫紺宮中星若列  거룩한 천상궁전에 뭇별이 늘어서듯
  十六大阿羅漢衆  열여섯 분 대아라한님 엄연히 계시도다.

 

 

 

 

 

나한전따라 이어진 담장을 따라 문지방을 넘는다.

황토로 쌓은 참성각 담장에는 폐기 와로 무늬와  水 木등 글자 모양으로 장식하였는데 질박한 멋을 풍긴다. 

백화등 덩굴이 무성한 푸른 잎사귀를 달고 황토 담장에 붙어 자라고 있어 그 멋스러움을 더한다.

5월에서 6월 사이 하얀 꽃이 피는 백화등은 마삭줄과 비슷한데 마삭줄에 비해 줄기와 잎이 크다. 나

하얀 꽃이 핀 운치 있는 꽃담장을 눈에 그려본다.

  

담장너머는 참성각이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정진한 후 샛별을 보고 깨달아 성불하셨다.

 

 三神山色凌空碧  삼신산의 푸른색은 하늘빛을 능멸하고 
 雙磎活水通海流  쌍계골에 흐르는 활수 바다로 통했는데 
 講經榻下虎常臥  강의하는 걸상아래 범처럼 누워있는 
 這個一條柱杖子  이날 주장자의 한 소식은
 不屬於佛法與僧  불. 법. 승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네.

 

 

백화등이 무성한 푸른 잎을 달고 황토담장에 붙어 자라고 있어 그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백화등의 굵은 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여여문(如如門)

 

   

여여문, 범종각지나 계단 밟고 오르니, 금당(옛 옥천사) 드는 頓悟門 문설주에는 '금당출입금지' 팻말이 걸려 있다.

돈오문

 

                                                                        

발길을 멈추고 금당지역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는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진감스님이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 선문을 열어 선법을 전파하다, 724년 신라성덕왕 때에 三法, 大悲 두 스님이 당나라 6조 혜능의 頂相을 모시고 와서 꿈의 계시대로 눈 속에 칡꽃이 핀 곳(雪裏葛花處)을 찾아 정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은 곳 (지금의 금당영역)으로 옮겨와(830년) 중창하여 옥천사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진감선사비에 적혀 있는 옥천사에 관한 고운의 글을 옮겨 본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불을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慧遠公)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玉泉寺 옛 모습을 눈에 그려보며 경사진 산길을 오른다.

국사암 불일폭포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니 국사암 가는 길은 평평한 오솔길인데 운치가 있다.

멀리 사천왕수가 눈에 들어온다.

 

천 년 넘은 느릅나무인 사천왕수( 四天王樹)

 

                                                          

국사암 대문 앞에는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싹이 나 자라 나무가 되었다는 천 년 넘은 느릅나무가 우뚝 서 있다.

가지가 사방 네 갈래로 뻗은 노거수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과 같아 '四天王樹'라고도 불린다.

높이 15m의 사천왕수는 푸른 잎을 가득 달고 바람에 술렁이고 있다.

 

가지가 사방 네 갈래로 뻗은 노거수 사천왕수( 四天王樹)

 

                                             

국사암 마당에는 7월의 뜨거운 햇볕이 내려 꽂히고 있다.

상주 장백사에서 지리산으로 온 진감스님은 " 화개곡의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옥천사보다 먼저 건립되었다.

'ㄷ'자형의 人法堂에는 여러 전각의 현판이 있는데, 편액에는 국사암. 명부전. 칠성각. 옹호문. 염화실 등이 있어 예전 암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국사암 마당에 비 올 때 걸어 다니기 위해(?) 크고 작은 나무둥치를 잘라 마당에 묻어 놓았는데 그 배치와 배열이 절묘하고 아름답다.

마당 전체의 문양이 무슨 글자 같기도 하고, 무엇을 상징하는 듯하다.

석등 뒤의 우람한 사천왕수가 푸른 잎을 가득 달고 술렁이며 뜨거운 햇볕을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언젠가 다시 들려 템플스테이를 하겠노라 속으로 생각한다.

 

 

 

 

 

나무 둥치를 잘라 마당에 묻어 놓았는데 그 배치와 배열이 절묘하고 아름답다.

 

                             

국사암 마당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수통에 물을 가득 담고 불일암을 향하여 떠난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으로 땀이 줄줄 흐른다.

환학대 마족대를 지난다.

 

환학대(喚鶴臺) 이상향 청학동을 찾은 고운 최치원이 이곳에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진감선사 비명을 지었다고 한다.

 

                                                      

 

마족대(馬足臺)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를 때 생긴 말발굽 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축축하고 미끄러운 돌길을 걸어 오르니, 평평한 분지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불일평전'이다.

불일평전 오는 길이 지금은 잘 다듬어져 있어 어렵지 않지만 옛적에는 험준했던 것 같다.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 쌍계사 동쪽을 향해 간다. 대지팡이를 짚고 절벽을 오르며 위태로운 사다리길을 타고 몇 리를 나아가니 평평한 동구가 나왔다.

골짜기는 다소 넓어 농사를 지을 만한데 여기를 세상 사람들이 청학동이라 부른다." 하였다.

 

불일폭포휴게소는  불일폭포를 본 후 돌아오는 길에 좀 더 보기로 하고 길을 재촉한다.

 

 

불일평전

 

                                                                     

 

불일탐방지원센터 불일폭포휴게소

 

                            

협곡이 나타난다.

벼랑의 허리를 감돌아 나간다.

왼쪽 갈림길로 들어서 삼신봉 오르는 길을 따라 오르는데 비탈길은 좁고 오른쪽은 천길 협곡 아슬아슬한 길이다.

집중하여 걸음을 떼어 놓으며 길을 오른다.  능선이 가까워지는데 불일암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하산하는 두 산님을 만나 반가이 인사한 후 불일암 위치를 물으니, 불일암은 불일폭포를 가다 보면 왼쪽 산기슭에 있다고 한다. 나의 착각이었다. 이 늦은 오후에 삼신봉 오르는 길을 걸어 올라오는 사람이 멀리서 보여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다.

 

동행하여 같이 하산하다 갈림길에서 하직하고 불일폭포를 향하여 가다 보니 불일암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돌담장 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르니 불일암이다.

불일암 기와 담장너머 적송 사이로 지리산 능선의 봉우리가 바라 보이고 담장 아래는 천길 협곡인데 무성한 나무 잎새들로 덮여 아래가 보이지 않고 전망도 잘 되지 않는다.

대웅전에 합장하고 축대 아래에 있는 샘물로 목을 축인다.

  

김일손은 불일암을 찾아가는 길을 속두류록에,

"수십 걸음 나아가 절벽의 골짜기에 걸린 잔도(棧道)를 타고 불일암에 이르렀다.

절은 앞은 땅이 끊어진 절벽에 다다랐고 사방에는 기봉을 거느린 산을 둘러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동서로 향로봉과 비로봉이 좌우로 상대하여 서 있는 아래에는 그 깊이를 잘 알 수 없는 용추와 학연 두 못이 있다."라고 썼다.

  

불일암(佛日庵)

 

대웅전

                                                         

 

불일암 담장

 

                                                                                          

가파른 계단을 걸어 내리니 불일폭포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다.

불일폭포란 이름은 지눌선사가 이 폭포가 있는 불일암에서 수도를 하다 입적하니 그의 호를 따서 佛日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곳을 찾았던 김일손은 불일폭포가 있는 이곳을  청학동이라 생각했다.

그의 속두류록에,

"암자의 동쪽에 있는 폭포는 아래로 천길을 쏟아져 학연으로 모이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여기까지 16일 동안 지나오는 지리산 곳곳에 천암이 빼어남을 다투 듯하고 만학이 그 맑은 물을 자랑하며 흘러 기쁘고 놀라움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오직 불일암의 승경이라 할 것이다. 또한 학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인로가 찾던 청학동이 여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골짜기가 험하고 깊으니 원숭이가 아닌, 처자와 가축은 들어올 곳이 못된다. 암천 단속이 다 절의 도장이 되었고,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하랴."

 

남명 조식의 '청학폭포' 시를 옮겨 본다.

 

   억센 적들이 벼랑에 맞서서

   절구질하듯 싸우고 있네

   높은 벼랑에 부딪힘이 싫어서

   먹고 토함을 멈추지 않네

 

불일폭포

 

               

지리산에 제일 긴 폭포로 물줄기가 60m이다. 이 불일폭포 일대를 김일손과 남명 조식은 청학동으로 생각했다.

 

                          

청학동은 어디인가.

불일폭포를 찾은 남명의 '유두류록'에는,

"다섯 걸음마다 한 번씩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씩 돌아보면서 겨우 불일암에 이르렀다. 여기가 세상에서 말하는 청학동이라는 곳이다.

바위와 봉우리가 모두 하늘에 매달린 것 같아 아래로 내려다볼 수가 없다. 동쪽을 떠받친 듯 험하게 솟아 서로 다투는 듯한 봉우리가 향로봉이고 

서쪽으로 푸른 소나무 언덕이 깎아지른 듯 아슬하니 서 있는 것이 비로봉이다. 

청학 두서너 마리가 그 바위틈에 살면서 때때로 하늘 높이 날다가 내려간다고 한다.

아래에는 학연이 있는데 어두컴컴하여 밑간데를 모르겠다. 좌우 상하로 절벽이 층층 한데 물이 튀며 떨어져 돌다가 합친다.

그 위로는 울창한 숲이 덮고 가리어져 우레 같은 소리가 바람과 어울려 산울림 하니 낮도 밤도 아닌 음침한 속이다. 

그 속에 신선들과 큰 신령과 긴 이무기와 거북이 숨어 살면서 수호하여 만고토록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썼다.

남명은 다음과 같이 또 기록했다.

" 어느 사람이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들어 세우고 겨우 입구에 들어가서 이끼 낀 돌 하나를 주워서 보니 "삼신동'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고 한다.

 

불일폭포는 60m의 높이로 떨어진 후 암벽사이로 빨려 든다.

그리고 그 아래로 30m의 폭포가 또 있는데 '용추폭포'이다.

용추폭포 아래에 둘레가 큰 용소가 있다. 이 용소는 안쪽과 바깥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쪽은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안용소 한편에 터널이 있는데 그 굴은 합천의 가야산까지 연결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가야산과 지리산을 오가고 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또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기 전 공부하던 옥천대(玉泉臺)가 용소 남쪽 500m가량의 깊고 절묘한 협곡에 있다고 한다.

협곡에 있는 집채보다 큰 바위가 옥천대인데, 옥천대 바위 아래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굴이 있는데 잠을 잘 수 있는 방 한 칸 크기의 

공간 안쪽에는 서재와 같은 또 다른 공간이 있는데 서재 한가운데는 신통하게도 책 한 권 크기로 햇빛이 비춰 들어 최치원선생이 거기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지금 현재는 침식작용으로 인해 햇빛은 비춰 들지 않는다고 하며, 안용소 한편에 있다는 터널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봉명산방 변규화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라  한다.  그리고 변규화 씨의 안내로 실제 그곳을 가 보았다.  <최화수의 지리산 365일 에서 발췌>

  

불일폭포에 전망대에서 협곡을 내려다본다.

학연에 모인 물이 암반속으로 사라지는 바위 협곡 아래의 용추폭포와 용소는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나뭇잎 속에 파묻힌 검은 협곡은 신비감만 더해 준다.

 

 

지금은 불일폭포 전망대 가는 길은 계단을 설치하였고, 벼랑의 허리를 둘러 가는 길도 넓히고 쇠줄을 설치하여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불일휴게소에 들러 배낭을 풀어놓고 더위에 지친 몸을 추스른다.

휴게소 무인판매대에서 캔맥주를 따서 마시니 가슴이 시원해지며 갈증이 해소된다.

 

돌을 쌓아 흙을 발라 지은  이 오두막집이 79년 이래 변규화 씨 가족이 정착하여 불일평전의 터줏대감으로 살아왔던 삶의 터였다. 그는 이곳 오기 전 10여 년 토굴생활을 하며 도를 닦았고, 3년가량 승려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마 이곳을 청학동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는 이제 이곳을 떠났지만, 그의 손길이 간  예사롭지 않은 자취가 곳곳에 남아 아직도 그 향기를 내고 있다. 

이 오두막집의 운치에 반한 소설가 정비석이 '봉명산방'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의 손길 곳곳을 둘러본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둥치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고, 가지를 모두 잘라 버렸는데 가지 끝에 푸른 잎을 달고 있어 마치 커다란 분재 같아 운치가 있어 보인다.

나무 주위로 평평한 돌을 배치하였는데 의자의 대용이고 그 앞에는 돌탁상이 놓여 있다.

고욤나무 옆 돌틈 안에는 차가운 샘물이 솟아나는데 그곳에 음료를 가득 잠겨 놓았다.

마당에는 평평한 크고 작은 평평한 돌을 자연스럽게 묻어 놓았다.

한 그루 나무 아래로  돌의자와 다기가 놓여 있는 돌차탁이 있는데 이 또한 멋스럽다.

차향이 이곳에서 피어나고 있다.

마당 한 편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파고 이름하여 '반도지'라 했다.

반도지 주변에는 노란 원추리가 활짝 피어 있고 못에는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다.

못 속에는 소나무 야생화 그림자와 푸른 하늘이 들어 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망을 담아 쌓은 돌탑 십 여기가 보이고, 돌무더기 사이로 뽑은 관으로 샘물이 흘러넘친다.

샘물은 흘러 못으로 흘러든다.

집 주위로 야생화가 가득 피어 그 향기를 더 한다.

봉명산방의 정취와 운치가 아직도 살아 있다.

 

  

옛 봉림산방 오두막집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고욤나무와 돌탁상

                                  

 

돌탑

                                             

 

돌의자그리고 다기와 돌차탁

 

 

한반도 모양의 연못'반도지'라 했다. 노란 원추리가 활짝 피어 있다.

 

돌차탁 다기와 반도지

               

운치있는 옛 봉명산방 전경

 

                                               

지금은 봉명산방 현판은 내려졌고,  변규화 씨와는 전혀 연고가 없는 중년의 여인이 홀로 오두막집을 지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밤에 혼자 잘 때 무섭지 않아요?' 하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툇마루 안쪽 방문에 초승달과 상반신 여자의 모습이 담긴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옷소매를 따라 찻잔과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것이 禪이라네"라고 글이 쓰여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인 것 같다.

 

 

"가질것도 버릴것도 없는것이 禪이라네"라고 글이 쓰여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았고 또 시를 읊었다.

 

남명 조식의 '청학동'이라 제한 시가 있다.

화개동천 목압마을 들어가는 다리 앞에 이 시비가 서 있다.

 

獨鶴穿雲歸上界  한 마리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나라로 올라갔고

一溪流玉走人間  흐르는 듯 한가닥 물은 인간세상으로 흐르네

從知無累飜爲累  번거롭지 않음이 오히려 번거로움이 됨을 알고서

心地山河語不看  산하를 마음으로 느끼고도 보지 않았다 말하려네

 

조선 중기 선승 沖徽의 청학동이라 제한 시가 있다.

 

翠嶽縣精舍  푸른 산 턱에 절집이 매달려 있으니

山河一望通  산과 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捲簾秋色裏  저물어가는 가을에 발을 걷어 올리고

倚枕夕陽中  기우는 햇볕아래 베개 베고 누웠노라

露竹生閒地  대나무는 이곳저곳에 돋았고

風泉吼遠空  폭포소리는 먼 곳까지 진동한다

尋眞雖涉海  바다를 건너 진경을 찾았더니

卽此是仙宮  이곳이 바로 신선의 궁전이 아닌가

  

불일평전을 뒤로하고, 한달음에 내려오니 쌍계사 저녁 예불 시간이다.

범종각에서 스님이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혹은 빨리 혹은 느리게  혹은 힘차게 혹은 부드럽게 리드미칼 하게 법고를 두드린다.

나의 온몸을 두드린다.

나의 마음을 두드린다.

법고소리에 함입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향 청학동을 찾아 나섰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다.

결국 청학동은 우리들 각자가 살고 있는 곳이 청학동인 것이다.

험준한 산속 협곡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 청학동은 있는 것 같다.

 

쌍계사 범종이 은은히 장엄히 울린다.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북을 두드리는 쌍계사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