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松川과 骨只川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

2011. 5. 18. 21:20도보여행기/한강 물길을 따라 걷다

(5) 松川과 骨只川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    

      2011. 5. 6. 금요  새벽안개,  흐림

 

새벽 5시 골지천변  숙소를 나서니 안개가 자욱이 끼었다.

골지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자욱한 안개가 끼었지만  새들은 아랑곳 않고 때가 되면 우짖기 시작한다.

수많은 새들의 색깔 있는 지저귐, 그리고 바람 소리  여울물 소리가 어울리며  새벽은 열리고 있다.

  

"한줄기 노을 물결따라 흐르면

 바람 살랑 꽃향기 내 곁에 머무네

 

 어디선가 바람 불어 꽃잎 날리어

 무지개가 되었네

 

 달밤에 핀 꽃이 더 향기롭고

 달밤에 핀 사랑이 더 애틋하지만

 

 우리네 청춘은 이루지 못하고

 물결따라 흐르다 돌부리에

 걸리고

 

 우리네 황혼은 느끼지 못하고

 바람따라 흐르다 달빛에 걸렸구나"

 

골지천 건너 바위 벼랑에 月花폭포가  걸렸다.

 

 

 

골지천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강물 속 산들의 실루엣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전봇대와 전선줄이 길게 이어지다가 자욱한  안갯속으로 멀리 사라진다.

끝도 보이지 않는 새벽길을 걷는다.

모두들 침묵하고 있다.

나자신 자욱한 안갯속으로 침잠한다.

사박사박 걷는 발자국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골지천 둔덕에  들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 생각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인생은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들꽃은 바람에 흔들려야 뿌리에서 영양을 공급받듯, 사람도 역경에 흔들려야 지혜의 영양을 공급받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흔들리면서 삶의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닐까.

먼 길을 갈 때는 어깨로 걸어야 한다.

양 어깨를 전 후로 번갈아 흔들면서 걸으면 지치지 않고 오래 걸을 수 있다.

어깨를 흔들며 먼 길을 걸어가자.

인생은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흔들리면서도 마음은 곧게 세우고

꽃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낼 수 있다면 좋겠다.

 

 

 

 

새벽안갯속에 파묻힌 봉정리 옛골마을

 

 

새벽안갯속에 파묻힌 봉정리 옛골마을을 지난다.

봉정리(鳳亭里)

원래 옛골로 불리던 곳으로 고려 때  관(官)터가 있고, 형틀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양산이 주산이 되고 반론산(半論山)이 안산이 된다.

골지천이 마을 앞을 휘돌아 나간다.

 

 

 

 

봉정교를 건너 휘돌아 가는 한강 물길을 따라 걷는다.

절벽이 있고, 소가 있고, 모래톱이 있고, 여울물 소리 우렁우렁한 곳, 골지천변에 야트막한 돌 움막집과 밭이 있다.

밭두덕  울 역활을 하는 살구나무가 흰꽃  붉은 꽃을 만개하고 지나는 길손을 환히 맞는다.

 

 

 

 

 

 

길 아래 멀리 골지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골지천따라 산굽이를 돌아가는 마을길이 보인다.

 

발면동(發綿洞)이다.

옛날에 이 부락을 왕래할려면 반론산 기슭 절벽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다녔다 한다, 홍수 때나, 폭설 때는 고립되기 다반사였었고.

그러나 마을은 사방이 병풍처럼 산이 둘러 쌓여 따뜻하여'목화'가 잘 된다 하여 발면(發綿)이라고 하였다.

또한 잠업(蠶業)도 잘 되는 마을이다.

지금, 내려다 보니 잠수교 대신 다리가 놓여 있고 마을 길도 잘 닦여져 있다.

골지천 트레킹을 할려면 발면동 물돌이 골지천을 따라가야 한다.

 

고개 언덕을 오르며 골지천과 반면동을 굽어 보며 걷는다.

 

 

발면동을 휘돌아가는 골지천에 안개가 자욱하다.

 

 

잠수교가 있던 곳에 다리가 놓여 있다.

 

고개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골지천과 발면동 어귀

 

 

고개 언덕을 오르니 면 경계 표지판이 서 있다.

여기서부터 여량면이다.

 

 

 

언덕을 넘어 여량에 들어서니 산벚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새치교에서 바라보니, 골지천은 발면동 마을을 휘돌고, 또다시 반논산 산기슭에서 몰돌이를 한 후 흘러 내려오는 물길이 보인다.

그림 같은 모래톱과 자갈밭 끝없이 이어지는 골지천 물길이 안갯속에 묻힌다.

새치교 아래 골지천변 길로 내려가 흙길을 따라 골지천을 거슬러 한 참을 따라 걸어본다.

 

 

 

하얀 모래톱과 물길 건너 자갈밭, 잔잔히 흐르는 물속에 연녹색 산과  나무 그림자.

물빛은 연녹색으로 물들어 있다.

맑고 투명하다.

골지천은 하얀 모래톱을 적시며  흐르고 있다.

 

 

 

석회암 바위틈에 자란 철쭉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그냥 내쳐 물돌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싶다.

 

 

 

 

 

  정선소수력발전소를 지난다.

 

 

 

산은 벼랑을 이루며 길게 이어진다.

골지천도 벼랑밑을 따라 흐른다.

골지천 돌무더기 사이를 여울지어 흐르는 돌무더기에 왜가리가 긴 목을 빼고 강물을 굽어보고 서 있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 길목을 지키고 있다.

 

 

 

 

 

골지천 따라 걷다 보니 곰말에 도착한다.

 

곰말

반론산半論山) 밑에 위치한 마을로 여량리와 봉정리 경계를 이룬다. 이 마을 지형이 흡사 곰(熊)이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한다.

웅장한 반론산 정상은 곰의 머리 같고 마을 양쪽 능선이 앞발을 딛고 있는 모습 같다해서 '곰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며, 산호동굴이

있다.

 

 

 

 

반론산(1,068m) 정상 능선에 천연기념물  제348호  ' 정선 반론산 철쭉나무 및 분취류 자생지'가 있다.

"철쭉나무는 키가 작고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이다. 잎은 봄에 돋았다가 가을에 떨어지며 꽃은 늦은 봄에 연분홍색으로 핀다.

이 철쭉나무는 높이 4.39m, 둘레 0.84m로 나이는 약 200년 정도이고 해발 1,064m의 능선지대에서 자라고 있다.

이 능선지대에는 북방에서 자라는 식물인 분취류도 분포해 있는데 사창분취, 각시서덜취, 당분취, 복분취 등이 그것이다.

정선 반론산 철쭉나무와 분취류 자생지에 있는 철쭉나무는 지금까지 알려진 철쭉나무 중 가장 크며,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인 분취류는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유천리 마을을 건너다보며 안갯속의 골지천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다.

강물은 멈추어 있는 듯 호수같이 잔잔하다.

강상에 드리운 실루엣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강의 변증법  

김 석 규

 

강물은 강변의 풍경들을 다 데리고 가고 싶은 것일까.

제 키보다도 더 큰 그림자를 유유히 드리우고 섰는

나무며 집이며 강언덕의 작은 풀꽃 하나까지도

어서 가자고 부지런히 따라오라고

젊은 한 때의 격정으로 물소리 철벅거리며 내달았지만

나무와 집들은 금이 간 물결 위에 제 그림자만 수습할 뿐

언제나 정지된 풍경으로 서 있고

흘러가는 것은 강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을 때

강변의 풍경 하나 마음 깊은 곳에 퍼담아 두려 해도

바람이 헤살 부리고 먹구름이 와 덮어버리고

어떤 날은 안개가 와서 한꺼번에 다 먹어치우고

온 하루 거칠게 몸을 뒤틀며 강짜도 부려 보았지만

그 사이 강물은 또 저만치 아래로 떠내려가서

강언덕 바람에 젖어 바다가 내다보이는 어느덧 하구

먼 상류의 가파르던 발걸음이 무디어지고

성화를 부리던 물소리마저 다 죽고 죽어서

스스로 몸을 낮추며 부드럽게 마음바닥까지 열고나서야

나무며 집이며 흔들리는 풀꽃 그림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비로소 온전히 보듬을 수 있음을 알아차린

강물은 강변의 풍경들을 다 데리고 가고 있는 것일까.

 

 

 

 

 

농무가 피어 산허리를 감싸고 피어오른다.

농무와 어울린 골지천 풍경에 빠져들어 걷는다.

 

 

 

 

 

 

 

 

여량리(餘糧里)

지형이 사통오달(四通五達)이고 산자수명하며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어 식량이 남아돈다 하여 지명을 글자 그대로 

여량(餘糧)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거리 '여량리 비석 군'을 지난다.

천주교 아우라지 성당이 보인다.

여량초교 정문 안에는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제목을 단 독서하는 소녀상이 있다.

 

 

천주교 아우라지 성당

 

 

 

여량리 길을 걷다 아침 식사를 한다.

 

 

 

 

아우라지 역 광장에는 어름치가 자갈에 산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어름치 카페가 있다. 

'어름치'는 잉어과의 한반도 고유종으로 어름치 종 자체는 천연기념물 제259호 지정되어 있고 임진강. 한강. 금강에서만 분포되어 있다.

몸은 옆으로 약간 납작하고, 전반부는 굵으며, 후반부는 가늘다. 주둥이는 길지만 뾰족하지 않고, 입술은 두껍지 않으며, 1쌍의 입수염이 있다.

옆줄의 전반부는 배 쪽으로 휘어 있지만 후반부는 중앙에 직선으로 나있다.

등 쪽은 암갈색이고 배 쪽은 은백색이다. 몸의 옆면에는 눈보다 크지 않은 7-8줄의 흑점열(黑點劣)이 세로로 나 있다.

가슴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는 담색이고,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에는 지느러미살을 가로지르는 흑색 줄무늬가 3줄 이상씩 있다.

하천 중상류의 물이 맑고 자갈과 암석이 깔려있는 비교적 깊은 곳에서 산다.

 

 

어름치 카페

 

 

 

레일바이크 조형물과 아우라지역을 둘러본다.

 

 

 

 

 

 

아우라지!

평창 발왕산에 발원하여 흐르는 송천과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골지천이 합류하여 조양강이 되어 흐른다. 송천과 골지천이 '어우러진다 '에서 유래하여 아우라지로 불려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배경에서 송천을 양수(陽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부르며 여름 장마 시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한강 1천 리 물길 따라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던 뗏목터로, 조선말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시 사용된 많은 목재를 떼로 엮어 한양으로 보냈다 하며, 이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뗏꾼들의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숱한 애환과 정한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님을 떠나보내고 애달프게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과 장마로 인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애절한 사연이 정선아리랑 가사에 진하게 녹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정선아우라지노래비의 가사를 옮겨 본다.                            

1.

아우라지 강가에 수줍은 처녀

그리움에 설레어 오늘도 서있네

뗏목 타고 떠난 님 언제 오시나

물길 따라 긴 세월 흘러 흘러갔는데

 

(후렴) 아우라지 처녀가 애태우다가

아름다운 올동백꽃이 되었네

 

2.

아우라지 정선에 애달픈 처녀

해가지고 달떠도 떠날 줄 모르네

뗏사공이 되신 님 가면 안 오나

바람 따라 흰 구름 둥실둥실 떴는데

 

송천과 골지천이어우러지는 아우라지

 

 

 

 

松川과 骨只川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

남한강 1천 리 물길을 따라 뗏목이 출발한 곳

전국에서 모여든 뗏꾼들의 아라리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곳은 뗏목을 타고 떠나는 님과 헤어진 곳이며 강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님을 만나지 못하는 애절한 사연을 담아 불린 정선아리랑의 

애정 편이 전해오는 곳이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잠깐 님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처녀상이 송천 건너 가금들을 바라보고 있다.

 

 

가금마을

원래 이곳은 백사장이었는데 어느 때 홍수에 유실되어 자갈밭으로 되었다. 이곳을 평안도「정감록」 파가 동학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개척한 곳으로 지금은 옥토로 변하고 약 80년 생 밤나무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뒷산으로 상원산 줄기, 구절리에서 흐르는 송천이 이 마을을 감싸고돌아 골지천과 합류하여 아우라지를 이루었다.

 

처녀상과 여송정

 

 

아리랑의 유래

"우리나라 영서·영동지방에 분포(分布)되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고장 민요 정선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인 조선 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 (不事二君)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松都)에서 은신하던 72현 가운데 7현은 정선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 동안 산 나물을 뜯어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忠節)을 맹세하였다. 그들이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心 情)을 한시로 읊은 것 중 정선 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 7현들이 이러한 비통(悲痛)한 심정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 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며. 그 후 사화(士禍)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시(暴政時)에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률(후렴구)을 붙여 부르 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 (또는 경복궁 중수 시)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나라 없는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를 거치는 동안 사상(思想)이 담긴 노래는 탄압(彈壓)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情恨)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졌으며. 예로부터 전하여지는 노래와 함께 오늘날 우리나라의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民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룬 노래를 옮겨 본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 후 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강초일일(江草日日)에 환추생(喚추生) 하니

강물만 푸르러도 고향생각나네. 무협(巫峽)이 냉랭하여 비세정하니 인생 차세(人生此世)에 무엇을 하나
(후 련 )

 

 

 

 

 

여송정 뒷산인 독재 산 허리를 도는 여송정 옛길 산책로를 걸어 골지천 레일바이크 철길을 건너 아우라지역으로 되돌아 나온다.

멀리 보이는 어름치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꽃벼루재길'인 산소길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우라지역 역전사거리를 지나 성도아파트에서 좌회전하여 마산재 길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꽃벼루재길이 시작된다.

마산치(馬山峙) 재는 옛날에 여량역(파발) 역마(驛馬)를 사육(飼育)하는데, 여량리 옆산 마산치에다 말을 방목했다고 해서 마산치(馬山峙) 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산재 길 어귀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설계된 건축물이 보인다.

 

 

 

  조금 지나니, 또 하나의 독특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마산재 오르는 산기슭의 나무에는 하얀 꽃이 만개하여 꽃향기를 날리고 있다.

 

 

 

마산재 지나, 녹고개데크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아우라지가 한눈에 시원히 조망된다.

 

 

 

 

 

 

'꽃벼루재길'

곧 바루, 꽃벼루(花峴)는 꽃이 있는 산 벼랑 길이란 뜻이다.

'꽃벼루재길'은 여량에서 나전으로 이어지는 조양강을  굽어보며 산기슭을 걷는 산소길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조양강 물줄기와 첩첩의 산들이 아스라이 보인다.

 

 

 

 

솔잎과 솔방울이 떨어진 소나무숲 산길을 걷는다,

울울한 소나무숲이 머리를 맑게 한다.

흐드러지게 핀 산벚꽃

붓꽃, 노란 민들레, 하얀 민들레, 들꽃들이 미소 짓게 한다.

오랜만에 트레킹 하는 세 사람을 만나 인사한다.

 

 

 

 

 

 

 

 

 

 

 

울울한 소나무숲,  O2 산소길 표식이 지친 발걸음에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낙엽송 군락지를 지난다.

 

 

 

장열(長悅)리 넓은 들과 마을이 시원히 보인다.

꽃벼루에서 내려다보면 남북으로 길게 집단 마을을 이루고 있기에 길다는 긴 장(長) 자와 늘 마을 주민은 즐겁게 산다고 즐거울 열(悅) 자를 

합쳐서 장열리라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규복선생유허비'가 보인다.

이규복은 1707년 정선군 북면 송석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근(伯謹), 호는 송석 와(松石窩). 성품이 인자하고 강직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성현의 학문에 열중하였다. 가정이 가난하여 글씨 연습할 종이와 붓, 그리고 먹조차 없었으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가랑잎과 숯검정 물로 글 쓰는 연습을 하였다. 일생 동안 학문탐구와 성현을 숭배하고 후세교육에 전념한 유현(儒賢)이며 청빈 중에서도 청송(靑松)의 고결을 고수한 도학자였다.

 

 

 

  노란 민들레가 무리 지어 핀 묵밭을 지나 내려가니 한대골 삼거리다.

 

 

 

나전중학교를 지난 북평교를 지난다.

조양강은 유유히 흘러 남평들을 휘돌아나가고 있다.

 

 

 

 

나전역(羅田驛)

정선군 북평면 북평리에 있는 정선선의 역이다. 1969년 10월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현재는 역무원 없는 간이역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전역 외부에 2004년 성신여대 미대 학생들이 그린 벽화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여행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도깨비 산마을, 도깨비가 사는 나전역으로 만들었던 성신여대 미대 학생.

오랜 세월이 흐른 목재건물 나전역은 이제는 낡고 초라하지만, 그러나 학생들이 정성 들여 그린 도깨비 벽화는 7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귀엽고 앙증스럽기만 하다.

 

 

 

이 벽화는 그림이 들떠 있어 안타깝다

 

 

 

 

 

도깨비 캐릭터 귀엽고 앙증스럽다

 

 

 

 

 

 

 

 

나전역 역사 화장실에 들리면 옛날 그대로의 화장실이 보전되고 있다.

아주 오래된 전형적인 시멘트 화장실을 추억할 수 있다.

 

 

난향로원의 양석. 음석

 

 

나전역  뒤  42번 도로가에 위치한 난향로원의 음석. 양석을 둘러본 후 조양강 따라 남평들을 걷는다.

 

 

 

조양강따라 남평리 너른 들을 지나 문곡리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

문곡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자갈밭에 들어가 걸어보기도 한다.

돌틈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바람에 흔들리는 대극이 보인다.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조양강 물줄기는 한반도 지형의 물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니  문곡리 문곡본동 한반도마을이다.

 

 

 

아름다운 산기슭의 전원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오늘은 문곡리에서 유숙하고, 명일 새벽 상정바위산에 올라 한반도지형을 감상코져 유숙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본다.

만원 또는 불가로 난처한 지경에 처해, 마지막으로 등로 입구에 있는 민박처로 발길을 옮기는데 산림청 소속 차량이 입구에 지키고 있다가

입산금지기간이라 들어갈 수 없단다.

지금이 입산금지기간이라 내일에도 상정바위산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정선읍내로 가기로 한다.

시간을 보니 오후 4시를 막 넘어서고 있다.

잰걸음으로 덕송교를 건너 한반도 지형 물길을 따라  한달음에 내닫고 나니 월천나루터다.

 

노거수 한 그루가  월천나루터를 굽어보고 있다.

月川 (달래) 마을은 지형이 강을 끼고, 둥근달같이 생긴 마을이다.

밤에 배를 타고 보면, 앞산에 둥근달, 깊은 물에 비친 달이 아름답다고 하여 달래, 월천마을이라 하였다 한다. 

 

 

 

 

홍수가 지면 다리가 물에 잠길 것 같다.

월천나루터 다리를 건넌다.

조양강물은 물돌이하여 흐른다.

 

 

 

덕송수력발전소를 지난다.

 

 

 

정선자연학교가 있는 송오리마을이다.

송오리(松吾里) 마을은 옛날부터 노송 다섯 그루가 있다 해 불려진 마을이다.

이곳에는 채소가 잘 되고, 특히 땅감(토마토) 재배가 옛날부터 잘 되는 마을이라고 한다. 

 

 

 

 

 

송오리 마을을 지나 철길이 가까워진다.

노거수 나무 아래에는 "송오리  맑은 강, 푸르른 산  좋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라고 새긴 나무로 만든 표지목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옆 둔덕에 노거수 느릅나무가 연녹색 잎을 가득 달고 우뚝 서 있다.

수령 400년 나무높이 35m, 나무둘레 4.5m 정선군 덕송 2리에 있는 보호수다.

나뭇가지가 부챗살처럼 펴진 수형이 아름다운 노거수다.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연녹색 잎을 펼치고 위엄하게 서 있는 고목을 바라보니 외경심을 갖게 된다.

 

 

 

 

 

조양강을 건너지르는 철길 다리를 걸어서 건널까 말까 한참 고민을 하다 그만두기로 한다.

철길 밑이 바로 옛날 덕송나루터다. 

굽이쳐 흐르는 조양강 물줄기 따라 한참을 걸으니 석교마을 앞 삼거리 '다래'버스정류장이다.

석교(石橋, 돌다리)는 남평 방면으로 가는 구 도로인데 이곳에 옛 향교가 있었고 계곡 물이 많아 돌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 있다.

이번 도보여행은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정류장에 배낭을 풀어놓고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승용차가 서더니 정선읍을 갈려면 타라고 한다.

장년의 남자인데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길렀고 피부가 투명하고 발그레하다.

편승하니 10여분 되지 않아 정선읍 시장 앞에 도착한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하차하니 차는 떠난다.

이렇게 인연 되어 만났다 또 헤어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결코 다 우연이 아님을 안다.

 

 

 

 

정선읍사무소 옆  '정선 고학규 가옥' 담장 앞에는 수령 500년 된  뽕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뽕나무는 뽕잎 때문에 키운 나무가 아니라, 조경수로 키운 나무이다.
두 그루가 붙어 서 있는데  우리나라 뽕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봉양리뽕나무  강원도 기념물 제7호

소 재 지 강원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217-9 

 

이 뽕나무는 높이 25m, 가슴높이의 둘레 2.5m, 밑동둘레 3.25m로서 가지는 동쪽으로 11m, 서쪽으로 13m, 남쪽으로 7,7m, 북쪽으로 6.7m 정도 퍼졌고, 수령(樹齡)은 500년 정도로 보고 있다. 제주고씨(濟州高氏)가 중앙에서 정선(旌善)으로 낙향하여 오면서 옮겨다 심은 나무라 전하며, 전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이 고장이 상마십리(桑麻十里)라고 불려지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옛날 것으로 보고 있다. 뽕나무는 추위에 견디는 힘이 강해 전국 어디에서나 자란다. 나무껍질은 회갈색 또는 회백색이고, 잎은 긴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6월에 피고 열매도 6월에 맺어 검은색으로 익는다. 뽕나무 잎은 누에치기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국가에서는 일찍부터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였다. (문화재청)

 

 

 

 

 

 

 

봉양리 두 그루 뽕나무를 감상하고 정선교 건너기 직전에 있는 '동박골'에서 곤드레밥을 먹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