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시(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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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구름 가람 이병기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과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그 구름 나도 되어 허공에 뜨고 싶다. 바람을 타고 동으로 가다 서으로 가다 아무런 자취가 없이 스러져도 좋으리.
2009.12.17 -
국토서시(國土序詩)
국토서시(國土序詩) 조 태 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2009.11.19 -
압록 저녁
압록 저녁 공 광 규 강바닥에서 솟은 바위들이 오리처럼 떠서 황홀한 물별을 주워 먹는 저녁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 강도 저와 닮아 속마음과 겉 표정이 따로 노나 봅니다 강심은 대밭이 휜 쪽으로 흐르는 것이 분명한데 수면은 갈대가 휜 쪽으로 주름을 잡고 있습니다 대밭을 파랗게 적신 강물이 저녁 물별을 퍼 올려 감나무에 빨간 감을 전등처럼 매다는 압록 보성강이 섬진강 옆구리에 몸을 합치듯 그대와 몸을 합치려 가출해야겠습니다
2009.09.12 -
들길에 서서
들길에 서서 신 석 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2009.09.05 -
산
산 법정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2009.08.23 -
잎사귀 명상
잎사귀 명상 이 해 인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죽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 잎 어긋나기 잎 돌려나기 잎 무리지어나기 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2009.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