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제 고찰 내소사를 찾다

2010. 1. 20. 11:47도보여행기/부안 변산반도를 걷다

(3) 백제 고찰 내소사를 찾다

     2010. 1 13.  수요   눈

                        

 

 

6시에 일어나 TV를 켜니 간밤 부안의 강설량은 12cm라고 한다. 오늘도 대설경보가 발효 중이라고 한다. 창문을 여니 눈이 내리고 있다.

대설경보가 내려졌으니 입산통제는 자명한 일이다. 부득이 여행길을 수정할 수 밖에 없다.

곰소를 거쳐 석포리를 지나 내소사까지 일단 가기로 한다.  그 후의 일은 그때 결정하기로 한다.

 

짐을 정리하여 배낭을 꾸린 후, 7시 20분 방문을 열고 나가 보니, 내리는 눈 속에 주인은 뜨락의 눈을 치우고 있다.

아침 인사하니, "오늘 산행은 못하겠지요?" 한다.

계란 후라이를 준비할 터이니 방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계란 후라이 세 개와 커피를 마신다.

스팻치를 차고, 우의를 두른 후 주인과 하직하고 집을 나서니 눈발은 거세어진다.

일박하는 동안, 베풀어 준 호의와 따뜻한 정을 주신 선비 주인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반계유허지를 찾아 나선다.

눈 속을 걸어간다.

멀리 산기슭에 고택이 보여, 그곳을 목표로 가보지만 마을길이 온통 눈으로 덮여 들머리를 찾기가 싶지 않다.

 

                         

 

 

왼쪽으로 가다 산기슭을 올라가니까, 한 사람이 나와 어디를 가느냐? 고 묻는다.

그쪽은 농장 가는 가는 길이라고 한다. 

"눈이 쌓여 힘들 텐데요?" 하면서, 반계선생유적지 가는 길을 가르쳐 준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기슭을 오른다.

눈은 함박눈으로 변하여 펑펑 쏟아진다. 

 

 

 

반계선생 유적지 고택

 

 

눈 속에 파묻힌 반계선생 유적지 고택은 한푹의 수묵화다.

눈속에 빠지고,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고생한 후에야 반계선생을 만나보게 된다

 

반계선생 유적지 고택

 

 

돌담으로 둘러싸인 이 집은 옛터에 다시 지은 집이다.

나름의 훌륭한 정취를 지니고 있다.  학문을 탐구하며 '반계수록'을 집필하였던 곳이다

 

 

 

 

유적지 마당에 있는 우물은  납작한 돌을 돌려가며 쌓았다.

 

 

 

 

 

운치 있는 집 

하얀 눈이 쌓인 돌담장 너머로 우동리 마을이 눈발 속에 아련히 보인다.

반계선생 유적지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반계선생 유적지(磻溪先生 遺蹟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이 터는 조선 효종과 현종 때 실학자로 활동한 유형원(1622-1673)이 일생 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반계라는 호로 더욱 알려진 유형원은 병자호란(1636) 이후 서울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살다가 효종 4년(1653) 선대의 자취가 남아있는 변산반도 기슭의 우반동으로 이사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만 살았으며, 농촌을 부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하는 데 학문의 목적을 둔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의 수많은 실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반계수록'이 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그러면 반계수록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반계수록(磻溪隨錄)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을 적은 책으로, 주로 국가 통치 제도에 관한 개혁안을 적고 있다. '반계'는 유형원의 호이며, '수록'이란 말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유형원의 겸손한 표현이고 실제로는 매우 수준 높은 연구를 통한 저술로서, 이 책은 유형원이 관직에 나가는 길을 단념하고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서 오랫동안 조용하게 생활하면서 인생의 노년기인 52세 때부터 완성할 때까지 약 20여 년간에 걸쳐 연구한 것이다. 모두 26권 13 책으로 구성된 「반계수록」은 1652년(효종 3년)에 쓰기 시작하여 1670년(현종 11년)에 완성하였다. 이후 「반계수록」은 영조 때 양득중ㆍ홍계희ㆍ원경하 등의 추천으로 임금과 세자의 관심을 끌었으며, 1770년(영조 46년)에 왕의 명에 의해 

경상감영(경상도의 중심지)에서 관찰사 이미가 주관하여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출판을 맡았던 이미가 쓴 서문이 있고, 책의 말미에는 저자인 유형원 자신이 책을 다 쓰고 난 후에 느낌을 적어 놓은 후기에 해당하는 '서수록 후'가 실려 있다.

 

 <편찬배경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유형원이 직접 쓴 '서수록 후'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그는 당시 조선의 현실이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책을 읽으면서 파악한 현실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정리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깊이 생각하여 체계적인 개혁안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가 현실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으로는, 첫째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송곳을 꽂을 만한 좁은 토지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토지가 일부에게 집중된 점이다. 이로 인해 가난한 농민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살던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여기에 각종 세금의 무리한 수취와 세금 행정의 문란이 더해져서 농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왔다.

둘째, 당시 법과 제도가 왕이나 지배층의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져 그 모순과 폐단이 더욱더 커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폐단이 있는 법을 고치지 않으면 폐단이 폐단을 낳아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복잡한 실처럼 얽히고설킨다고 하면서 그 폐단의 원인을 찾지 않고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반계수록」에서 유형원이 들은 예를 찾아보면, 중국의 진ㆍ한나라 시대 이래의 법 제도로는 지배층들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를 하늘의 이치에 바탕을 둔 법 제도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는 법 제도로 토지를 균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경작한다는 '정전법'을 제시하고, 지배층들의 개인적인 욕심에 바탕을 둔 법 제도로는 '노비 세습제'를 들었다.

셋째, 당시 지배층으로 볼 수 있는 학자와 관료들의 개혁 의지를 지적하였다. 

"국가의 공직에 있는 자는 현실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 뿐이고, 굳이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즉 산림에 묻혀 있는 학자는 자신의 수양 공부에만 뜻이 있고 현실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은 없어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피해가 끝이 없다."라고 하였다. 즉, 시험을 거쳐 관리가 된 자들은 자기 수양이 덜되어 있고 백성을 살피고 다스리는 공부가 모자라며, 산림에 묻혀 있는 학자들은 자기 수양은 되었을지 몰라도 역시 백성을 살피고 다스리는 공부에는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고 백성들만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원은 성리학적 공부가 문장을 암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함을 주장하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이끌어갈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학자들의 사회적 의무임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유형원이「반계수록」을 편찬하게 된 배경인 것이다.  
 
  <  내용요약 >

「반계수록」의 권 1∼8은 토지 제도, 권 9∼12는 교육과 학생 선발(교선), 권 13∼14는 관리의 임명, 권 15∼18은 관직 제도(직관), 권 19∼20은 녹봉제, 권 21∼24는 군사 제도, 권 25∼26는 속편으로 구성되었다. 「반계수록」의 내용 끝부분에는 군ㆍ현 제도에 대한 내용이 보충으로 붙어 있으며, 그 밖에 이미ㆍ오광운 등이 쓴 「반계수록」에 관한 글과 유형원의 간단한 발문이 붙어 있다.

맨 앞의 토지 제도는 토지 소유관계에 대한 내용으로서, 일부 지배 계층이 많은 토지를 소유한 것에 사회 모순의 근원이 있다고 보고 균전제를 내세워 농민인 실제 경작자에게 토지를 주어 기본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에게 국가 방위와 재정을 담당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교선(敎選)'은 인재 교육과 선발에 대한 것으로서, 향약과 같은 사회 조직을 통해 전체 백성을 가르치는 바탕 위에서 단계별로 교육 기관을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과거 제도 대신에 천거에 의한 공거제 운영을 주장하였다.

'임관(任官)'은 관료제 운영에 대한 것으로서, 실제로 나라 일을 하는 관직자에 해당하는 당하관과 지방의 감사(관찰사) 및 수령(사또)의 임기가 너무 짧은 것을 문제점으로 파악하고, 그 임기를 6년 내지 9년으로 늘리자고 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자기 밑에서 일을 도와줄 수 있는 관원들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맡은 일에 대한 공로에 대해서도 승진보다는 다른 보상을 주어 전문적인 관료제를 운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직관(職官)'은 통치 기구에 대한 것으로서, 중심적인 내용은 비변사를 폐지하여 의정부에서 육조로 이어지는 이전의 행정 체계를 다시 만들고, 3명의 정승을 영의정 1명으로 줄여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녹제(祿制)'는 관리의 월급인 녹봉에 대한 것으로서, 높은 직위의 관리로부터 맨 아래의 서리 등에 이르기까지 적당한 월급을 주어서 부정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병제(兵制)'는 국가 방위에 대한 것으로서, 병농 일치를 원칙으로 하여 토지를 지급받아 경작하는 모든 농민이 군역을 담당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원의 여러 가지 개혁론은 토지 소유관계의 개혁을 초점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이후 이익ㆍ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중농주의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반계선생 유적지 고택 툇마루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우동리가 훤히 조망된다.

날리는 눈발 속으로 태양이 홀연히 나타나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다.

 

                       

반계선생 유적지 고택 툇마루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우동리가 훤히 조망된다.

 

 

내리막 길이 미끄러워 스틱을 꺼내어 짚고 내려간다.

태양은 사라지고 다시 또 거센 눈발이 휘날린다.

우동리 당산을 향하여 마을길을 걸어간다.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를 보기 위해 눈길을 헤친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가 있다는 '세덕각'에 도착하니 자물통이 굳게 잠겨 있다.

거센 눈발과 쌓인 눈으로 인하여 그만 발길을 돌린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보물 제900호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이것은 부안에서 대대로 살던 부안김씨 집안에서 보관해 온 것으로, 15세기 중엽부터 한말까지 약 400년 사이의 문서들이다. 문서 중에는 특히 김석필과 그의 증손 김홍원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김석필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원종공신에, 김홍원은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이 고문서는 조선시대 과거 합격증인 백패와 홍패, 관직 임명장 교지, 재산을 분배할 때 작성한 분배기, 공신록. 호적 등이다.

 

굴삭기가 동네 마을길 제설을 하며 지나다니고 있다.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고 폭설이 내리고 있으니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눈을 치우고 있는 마을주민에게 우동리 당산나무가 있는 곳을 묻는다.

길을 안내해 주며 덧붙여,

"예전엔 당산나무가 참 보기 좋았는데, 지금은 가지가 하나 부러졌어요, 그래서 그 옆에 다시 나무를 심어 났어요."

예전에는 당산제를 매년 지냈는데 요사이는 격년에 한 번씩 지낸다고 한다. 

금년은 당산제를 지내는 해라고 한다.

 

 

 

"우동리 당산"      팽나무, 짐대석, 오리형 솟대로 구성되어 있다.

 

 

짐대석

 

                    

오리형 솟대 당간

 

 

300년 된 팽나무 옆에 새로 심은 팽나무와 그 옆에 오리형 솟대가 보인다

 

                       

우동리는 우반동(원우동), 감 불, 우신, 만화동의 네 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바라는 마을사람들의 소원을 기원하는 곳인 우동리 당산을 마을 사람들은 '짐대 할머니'라고도 부른다.

원래 우동리 당산은 수령 300년쯤 되는 팽나무와 짐대석 1기, 그리고 오리형 솟대 당간 1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래에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져 그 옆에 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고 오리형 솟대 당간 1기를 추가로 만들어 놓았다.

짐대석은 아름드리 팽나무 속에 한 몸 되게 박혀 있는데, 원래는 나무 옆에 세웠던 짐대석이 나무가 커지자 나무와 한 몸체가 되었다고 한다.

짐대석의 크기는 높이 246㎝, 둘레 182㎝이며, 솟대목은 9m 높이에 밑둘레 30㎝쯤의 소나무로 된 신간 주로 꼭대기에 역시 소나무로 만든 

오리 한 마리를 얹어 놓았다.

당산제는 정월 보름날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축제분위기로 치러진다.

먼저 솟대를 세우고, 암줄과 숫 줄의 용줄을 각각 길이 30m, 직경 30cm 정도 크기로 마련한다.

이렇게 마련된 용줄을 어깨에 메고 마을돌기를 한 후, 남녀가 남북으로 나뉘어 줄다리기 순서로 이어지는데 암줄과 숫줄의 고를 비녀목으로 

연결하기 전에 먼저 신랑 신부로 꾸민 한 쌍이 각자 자기편의 줄 위에 올라서서 결혼식을 올린다.

줄다리기는 3전 2승으로  여자가 이겨 풍년을 약속하는 게 이 마을의 전통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용줄을 솟대에 감아주고 당산제를 올린다.   

 

하늘도 희고 땅도 희고 온천지가 희다.

흰 도화지 위에 수묵화를 그린 풍경이다.

아마도 농사짓는 뚝길을 무작정 걸어 논밭을 가로질러 반계삼거리에 도착한다.

                  

반계유형원선생유적비

 

 

반계유형원선생유적비를 지난다.

30번 도로로 들어서 곰소를 향하여 걸어간다.

곰소 젓갈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곰소 염전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곰소 염전의 풍경을 바라보니 참으로 운치가 있다.

                 

 

                

 

                 

 

 

진서리 구진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눈이 가득 쌓여 있다.

지나치기로 한다.

         

 

 

범섬 앞을 지난다.

"곰소는  웅연(熊淵), 웅소(熊沼)라고도 한다.

진서리 남쪽 어항. 곰섬의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곰소라 하였다 한다. 

이 소를 여울개라 하는데 칠산바다의 수호신인 개양할머니가 이곳을 건너다가 무릎까지 빠졌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말 우왕 5년에는(1379년) 왜구(倭寇) 50여 척이 이곳으로 침입하여 보안현과 부령현을 점령한 일도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곰소항은 1938년에 인공으로 만들어진 항구다. 

구진 서편의 범섬(虎島)과 곰섬 사이의 바다를 막아 어항을 조성하고 그 북쪽 둥근 호수처럼 생겨난 90㏊의 공지에 염전을 조성하였다."

 

곰소젓갈집 촌이다.

곰소항으로 가는 길은 쌓인 눈을 아직 치우지 못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어느 젓갈집 앞에 서서 젓갈류를 보고 있으려니, 문을 열고 젊은 아주머니가 나오며 " 따뜻한 커피 한잔 드시고 가세요" 한다. 

휴식도 하고 젓갈도 구입할까 하고 "고맙습니다' 하고 문안으로 들어선다.

커피도 마시고, 휴식도 취한다. 젓갈을 구입하고 택배로 부쳐줄 것을 부탁하고, 젓갈집을 나설려니 인사를 하며, "연세도 많으신 것 같은데 이 추운 날씨에 도보여행을 하시니 존경스럽습니다"하고 말한다.
 

젓갈촌 마을을 걸어 나가  석포리를 향하여 걸어간다.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석포삼거리에 이른다.

내소사 매표소까지 2.2km이다.

석포야영장 앞을 지나고 원암마을을 지난다.

        

 

 

내소사 주차장 앞을 지나니, 이제는 폭설로 변한다.

눈을 뜨고 걸을 수가 없다.

백제 고찰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에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능가산 관음봉 기슭에 위치한 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 두타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워 소래사라 하였는데 창건 당시에는 대 소래사 소소래사가 있었으나 대소래 사는 소실되었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가 남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존 사찰은 조선조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고종 2년(1865)에 관해선사에 의하여 중수되었고 그 후 만허선사가 보수하였다. 당초의 소래사를 내소사로 부르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내소사로 불러온 것으로 추정된다."

               

내소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니 800m나 이어진다는 전나무 숲길이다.

전나무에는 눈꽃이 활짝 피었다.

전나무 가지에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지가 휘어지며 '우르르'눈이 쏟아지며 눈폭탄이 터진다.

눈가루가 휘날린다.

          

 

                    

 

            

 

            

 

 

몇 번의 눈폭탄을 맞은 후에야 사천왕문에 들어선다.

사천왕문안에서 바라보니 함박눈이 쉬임 없이 쏟아지고 있다.

온 경내는 내린 눈으로 나무도 당우들도 온통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별유천지 비인간'이다.

눈 내리는 내소사의 설경을 보고 있노라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온다.

      

수령 950년 된  느티나무 뒤로 내소사 당우들이 보인다

 

 

수령 950년 된 느티나무 위에도 눈은 소복이 쌓여만 간다.

이 느티나무는 입암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이다. 일주문 밖에 있는 느티나무는 할머니 당산으로 한 짝을 이룬다.

 

고려 동종이 있는 보종각이다.

보종각

 

명문에 따르면 고려 고종 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주조되었으나 청림사가 없어진 후 조선 철종 4년(1853)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1.03m, 직경은 67cm, 무게는 420kg의 전형적인 고려 후기 종으로 보물 제277호로 지정된 뛰어난 작품이다.

 

                        

 

종의 상대와 하대 사이에 네 개의 유곽과 삼존상이 주조되어 있다. 상대와 하대는 모두 보상당초문으로 채워졌으며, 상대 위에는 여의두문과 비슷한 입화형 장식이 솟아 있어 고려 후기 종의 특성을 보여준다. 연주문이 새겨진 유곽 안에는 가로 세로 세 개씩의 모두 아홉 개의 종유가 있다. 내소사로 옮기면서 종유 하나를 떼어내 지금은 8개가 있다.

 

                         

 

종 가운데 삼존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선정인의 본존불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고, 좌우 협시 보살들은 원형대 위에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다. 삼존상들의 두광 위로는 몇 줄의 평행 양각선이 나부끼듯 새겨졌으며 다시 그 위로는 보개가 떠서 술을 휘날리고 있는데 이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삼존상 아래에 명문이 있다.

 

                         

삼존상

 

 

보개

 

 

맨 위에는 한국종 특유의 음통과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의 모습을 한 종고리가 있다. 봉래루로 간다.

 

 

봉래루 아래는 각양각색의 리본이 달려있다.

 

 

각자의 소망을 리본에 적어 매다는 곳이다. 리본에 나의 소망을 적어 매단다.

 

 

 

봉래루를 지나면 대웅보전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눈 쌓인 삼층석탑과 소나무 사이로 대웅보전이 눈 속에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대웅보전은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 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이,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 3 출목 내 5 출목으로 내 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 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 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 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 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 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뭇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 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 않는다."

 

이 대웅보전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을 깎아 끼워 맞춰 세운 것이라 한다.

이 대웅보전의 단청에 관한 전설을 산문시로 써 놓은  서정주의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을 옮겨 본다.

"來蘇寺 大雄寶殿 丹靑은 사람의 힘으로도 새의 힘으로도 호랑이의 힘으로도 칠하다가 칠하다가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 칠하고 그대로 남겨놓은 것이다. 내벽 서쪽의 맨 위쯤 앉아 참선하고 있는 선사, 선사 옆 아무것도 칠하지 못하고 너무나 휑하니 비어둔 미완성의 공백을 가 보아라.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놓고 마지막으로 丹靑師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해어스럼 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서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 그런데 일에 폐는 속에서나 절간에서나 언제나 방정맞은 사람이 끼치는 것이라.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어느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 보고  말았다.  나그네는 안 보이고 이쁜 새 한 마리가 천장을 파닥거리고 날아다니면서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해 나가고 있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기척에 “아앙!” 소리치며 떨어져 내려 마루 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어다란 한 마리 불호랑이 었다. “대호 스님!  대호 스님! 어서 일어나시겨라우!” 중들은 이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來生에나 蘇生하라고 그 절 이름을 來蘇寺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하다가 미처 다 못한 그 빈 공백을 향해 벌써 여러 백 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대웅보전의 꽃살문

                          대웅보전의 정면 창호는 8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창호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다.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살 그림자만 보인다고 한다.

 

 

 

 

                        

 

 

                         

추녀 끝 풍경

 

 

삼층석탑

 

                         

대웅보전의 댓돌을 밟고 한 바퀴 돈다.

대웅보전 앞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봉래루가 눈 속에 파묻힌 듯 삼층석탑과 함께 절묘한 설경을 연출하고 있다.

       

 

 

산신각에 오른다.

 

 

내소사 당우들이 눈속에 파묻혀 있다.

 

대웅전 뒷모습

 

 

느티나무 할아버지 당산

 

 

봉래루

 

 

지형을 그대로 살려 지은 回자형 건물 설선당은 현재 보수  공사 중이다

 

 

 

 

범종각의 사물

 

 

요사

 

 

不二門  깨달음의 문 해탈의 문이다.    불이문을 지나서 가면 봉래선원이 나온다.

 

     

청련암 가는 길

 

청련암 가는 길

눈 내리는 경내를 걸어 나와 청련암을 가기 위해 눈 속을 걷는다.                       

멀리 눈발이 휘날리는 산기슭에 청련암이 보인다.

눈이 무르팍까지 차올라 가다가 포기하고 되돌아 나온다.

사천왕문을 나서  설화가 핀 전나무길을 걸어 나온다.

여전히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다.

흰 눈을 뒤집어 쓴 전나무에서는 연신 눈폭탄이 터진다.

 

                        

 

      

 

내소사에서   /  김 민 성

 

내소사 앞 뜰

한 오백 년 살아온 은행나무에

山影이 노을 지고

가지마다 걸리는 因果가

민망스럽기만 한 사바 저녁

귀범모종(歸帆暮鐘)의 동종이 울리면   

시나브로 淨土九千이 문 열어

한 땀 한 땀 심어진

그 여인의 염원

묘법연화경에

자욱한 자애가 안으로 고이며

대웅전 너머

숲에서 울어대는 밤새

山寺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요 속에 파묻히고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한 포기 풀로 있었으면 하였다.

 

눈 오는 날이면 내소사에 오라 하네  / 이 용 범

 

눈 오는 날이면
대웅전 꽃살 같은 눈 내리면
멀리서 당산나무 손짓하네
들개 들러
전나무 숲길 달려
오라 하네

 

풍경소리
눈 맞네
전설 밟고 오라 하네

 

아직 내치지 못한 부정 탄 목침에 앉은 木手
눈 맑은 영혼으로 깎은 목침 기다려
장삼 자락 휘날리며
눈 덮인 절 마당 내려다보고 있다네

 

법당에서 단청하던 새 한 마리
아직 절 떠나지 못하고 있네
세상 인연 훌훌 떼쳐 두고
오라 하네
꿈길 같은
눈길 내며          

 

일주문 밖 식당에서 바지락죽을 주문한다.    

난로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창밖으로 연실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격포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고 주인에게 버스시간을 물으니,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해안 고갯길이 위험해서 버스가 운행을 중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시각은 오후 3시를 넘어서고 있다.

가는데 까지 가다가 민박을 하리라 작정하고 석포삼거리를 향하여 눈을 맞으며 걸어간다.

'왕포 모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왕포마을까지 가면 되겠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다.

 

 

 

 관선마을 고갯길을 넘어 내려간다.

저 멀리서 스님이 한 분 걸어오신다.

"어디까지 가세요?"

"격포까지 갑니다."

"그러시다면, 제차를 타고 가시죠?"

"그냥 걸어가겠습니다."

"아 그러면 그러시죠. 혼자 걸어가는 것도 좋지요.  저도 예전에 도보여행을 해 보았는데 가끔 힘들 때 누가 차를 태워 주웠으면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차를 세우고 이렇게 올라왔어요."

'사실은 저도 오늘 일정이 격포까지 가야 하는데, 예 그러면 제가 마음을 바꿔 동승을 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럼요."

"예, 그럼 타고 가겠습니다."

 

다니는 차가 보이지 않는다.

구불구불 오르내리는 고개의 연속인 미끄러운 길을 힘들이지 않고 잘도 운전해 간다.

고향이 변산이라 길 구석구석을 잘 안다고 한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내변산 눈산행 경험담을 듣는다.

군데군데 차가 헛바퀴만 돌며 언덕길을 오르지 못하는 차도 보이고, 눈 속에 빠진 차의 모습도 보인다.

5시를 넘은 시각 격포항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붉은 잔광이 구름뒤에서 번져 나오고 있다.

눈은 그쳐 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격포항에 내린다.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합장 인사하고 하직한다.

 

 

        

 

       

 

 

                                                       

낙조에   /  김 석 철

 

산자락 푸르게 물들이며 빛나던

정겨운 시간들이 나래를 접는구나

 

사위는 놀빛을 보며

되새기는 아쉬움

 

이젠 돌아갈 길이 없는가

다시 돌아갈 순 없을까

                               

해지는 언덕에 올라

앓는 가슴 달랜다.

 

격포항 저 바다 멀리 구름뒤로 석양이 지더니, 이내 구름이 가리고 눈발이 날린다..

왼쪽 봉화봉을 넘으면 궁항이고, 오른쪽 닭이봉을 넘으면 채석강이다.

닭이봉 팔각정을 오르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선다.

채석강은 물때를 맞추면 절벽밑 해안 길을 돌아갈 수 있다.

식당에서 물어도 민박집에 물어도 물때를 아는 사람이 없다.

해양경찰서에 가 물으니 격포항에서 채석강 가는 절벽밑 해안 길은 공사 중 이서 갈 수 없다고 한다.

눈이 워낙 많이 쌓여 위험해서 그러는 것인가?  물때 시간은 가르쳐 주지 않고 갈 수 없다고만 한다.

채석강 해수욕장 방면에서 가라고 한다.

공식적인 입장이니 믿을 수밖에.

숙소에 돌아와 TV를 켜니 오늘 10cm의 눈이 내렸다고 한다.

오늘 밤도 눈이 내리고 내일 오전부터 개이겠다고 한다.

바닷가 창문을 여니 눈이 내리고 있다.

난방이 잘된 뜨끈 뜨근한 온돌방에 등을 지진다.

또 이렇게 격포항의 밤은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