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암사 울금바위를 가다

2010. 1. 18. 19:45도보여행기/부안 변산반도를 걷다

개암사 울금바위개암사 울금바위

(2) 개암사 울금바위를 가다 

      2010. 1.12. 화요 눈, 맑고 흐리고, 밤부터 눈             

 

 

 

 

 

07 :30 분 숙소를 나서니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있고 눈발이 날리고 있다.

부안터미널 사거리 축협 맞은편에서, 한참을 기다려 줄포행 300번 시내버스에 탑승한다.

버스 기사에게 이통마을에서 하차하여 줄 것을 부탁하고 자리에 앉는다.

읍내를 벗어나 흰눈이 쌓인 들을 달려 감교리 이통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여기가 오늘의 도보여행 출발점이다.

 

차가 다니는 길은 제설차가 제설을 하고 지나갔다.

길 옆을 걸을려니 발목까지 눈이 차 오른다.

 

       

 

 

들판은 온통 하얀색이다.

감교마을 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타루비'가 보인다.

눈 속에 푹푹 빠지며 타루비 가까이 다가간다.

 

 

 

타루비( 墮淚碑 )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타루비(淚碑)

소재지: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이 타루비는 1592년 임진왜란에서 패한 왜군이 조선 선조 30년 다시 쳐들어와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우리 고장 도화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이유선생이 의병을 모아 청동에서 적과 싸우다 순국하니 그 갸륵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유선생은 함평인으로 1545년 조선 인종 1년에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학문에 힘쓴 선비로, 임진왜란의 국란에는 의병장 고경명,조헌,김천일에게 군량과 군기를 보내 지원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이 서해안을 따라 부안으로 쳐들어 오자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문하생 등과 함께 이곳 청동벌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적의 총탄에 전사하고 생을 마치니 선생의 나이 53세였다.부인 부안 김씨는 이 소식을 듣고 병졸들을 이끌고 죽창으로 무장하고 적진에 뛰어들어가 싸우다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고을 사람들은 선생의 학덕과 충성심 그리고 부인의 충렬의 미덕을 추모하여 타루비를 세워 후세에 귀감으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없어진 것을 1981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절한 전투에서 산화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발길을 돌린다.

 

김낙선의사 기적비를 지난다.

 

 

 

 

원숭이학교 악어동물원' 앞을 지나 봉은 삼거리에 도착하니 개암사 이정표가 보인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다.

 

                       

 

 

개암죽염을 만드는 공장 굴뚝이 멀리 눈보라 속에 보인다.

 

                       

 

      

 

 

개암제(저수지)를 지나 눈길을 걸어 한참을 걷는다.

10:00시  드디어 '능가산 개암사 ' 현판이 달린 일주문에 당도한다.                            

          

능가산 개암사 일주문

 

                                                           

                       

 

 

                       

 

 

능가산 개암사 일주문은 고색창연하리라 생각했으나, 새로 건립된 일주문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하다.

일주문 두 기둥을 휘감고 있는 황금빛 용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수많은 용이 살고 있다고 하는 개암사는 첫 문인 일주문부터 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나무 숲길을 걸어 오른다

 

 

 

흰 눈을 소복이 머리에 인 불이교가 보인다.

不二橋(門)는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한다 불이의 사전적 의미는 ‘다르지 않은 것’ 혹은 ‘두 개의 것이 대립이 없는 것’이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생사가 둘이 아니며, 미혹과 깨달음, 선과 불선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깨달으면 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解脫橋(門)라고도 한다.

해탈의 경지, 불이의 깨달음의 다리를 지나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이고, 범종각 뒤로 머리에 흰 눈을 인 울금바위가 힘찬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옛 백제시대 주류성 성곽의 일환으로 보이는 석축이 보인다.

높은 석축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르니 대웅전 앞 마당이다  

눈 속에 장중하게 보이는 대웅보전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뒤로는 대웅보전을 수호하는 울금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능가사 대웅전

 

 

흰 눈을 지붕에 인 고찰 대웅보전과 울금바위를 바라보니 머리는 맑아지고 눈은 시원해진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규모에 비해 우람한 기둥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준 건물로 곳곳에 용의 머리와 봉황을 새겼으며, 

처마 밑에는 화려한 연꽃을 조각하였다.

문살은 일일이 깎아서 만든 화문살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대웅보전 현판위로는 잡귀로부터 부처님과 법당을 지킨다는 2개의 조각된 귀면상이 있다

대웅보전 댓돌을 걸어 대웅보전을 한 바퀴 돈다.

 

대웅보전에서 정면을 바라본 풍경

 

 

대웅보전 추녀의 풍경과 울금바위

 

대웅보전 처마의 눈고드름

 

 

대웅보전에 들어 부처님께 참배한다.

"대웅전이 내부, 천장 불상 윗 부분에 청룡 백호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양식은 백제시대의 유물로서 많지 않은 백제시대의 기교라고 하여 유명하다. 또한 불상 윗 부분에 정교하고 우아한 조각장식으로 된 닫집을 짜 놓은 것이나, 각 살미의 뒷 몸이 용머리로 되어 충량보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조각해 놓은 것과 천장판 단청을 연꽃무늬로 그려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는 것은 백제식 건축양식으로 흔치 않은 훌륭한 작품이다. 닫집 안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뒤얽혀 불을 토해내는 모습의 목조각 등이 있다. 외관은 장중한데 비해 각 부분의 수법과 내부 공간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법당 내부에는, 삼존불상위 닫집 밑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3마리 용, 전면 분합문 뒤쪽 포작 위로 3마리의 용, 좌우 충량에 2마리 용, 네 귀퉁이에 4마리 용, 총 12마리의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리고 법당 외부 전면 처마 좌우에 2마리 용이 있어 대웅보전에는 총 14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

 

 스님이 예불을 드리고 있는 중이라 촬영은 하지 못하고,  어둑한 실내의 이곳 저곳을 열심히 응시한다.

참배를 끝내고 문을 열고 댓돌에 나서니 내리던 눈은 그쳐 있고 하늘은 새파랗다.

하늘에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디.

하얗게 쌓인 눈과 새파란 하늘

마음은 새파란 하늘과 같이 쾌청하다.

 

대웅보전

 

 

 

 

 

울금바위

 

                         

개암사는 변산 기슭의 서쪽, 주류성의 성터를 따라 3단의 축대가 가람을 형성하고 있다. 울금바위 아래 드넓은 축대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관음전, 서쪽에 산신각이 있으며, 그 아래 중정에는 좌우로 응진전과 지장전이 자리한다. 요사는 대웅보전으로 들어서는 하단에 있으며, 월성대를 비롯하여 정중당과 종무소가 경내 석조물과 함께 어우러진다. 

 

능가산 개암사(開巖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634년(무왕 35)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676년(문무왕 16)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이르러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 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1276년(충렬왕 2) 원감국사(圓鑑國師)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八相殿, 서쪽에는 應眞堂과 명부전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 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4년(태종 14) 폐허가 된 것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그 뒤, 1636년(인조 14) 계호(戒浩)가, 1658년 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 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년 승담(勝潭)이 중수하였다. 1913년 화은(華隱)이 선당(禪堂)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해체 복원하였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였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네이버 백과 >

 

개암사 뒤 뜨락의  /  박 용 하

 

개암사 뒤 뜨락에

우람한 울금바위 

돌 축대 높은 터에

대웅전 올려 놓고

백제의

빼앗긴 꿈을

달래며 지새는가

 

변한의 왕궁터요

백제 부흥 다진 도량

천년의 숱한 사연

삭이다 여위였나

기왓장

홈이 진 골에

변산벌 노을이 탄다.

 

관음전과 응진전 사이를 지나 왼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건너편으로 등산로가 보인다.

눈을 밟으며 울금바위로 향한다.

 

                        

 

 

적송이 울울한 산길을 걷는다. 

울금바위 아래 우금산성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 쓰여 있다.

 

우금산성(禹金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우금산성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무렵에 백제 부흥을 위하여 복신 장군이 유민을 규합하고 군비를 정돈하여 항전하다가 나당 연합군의 주장인 김유신과 소정방에게 패한 곳으로 전해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우금바위에서 개암사 저수지까지의 능선 밑으로 다듬은 돌과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가 3km가 넘는 석성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우금산성(주류성)의 규모는 울금바위를 기점으로 동측선이 563m, 서측선이 675m, 총 1,238m에 이르며, 동변은 1.010m, 북변은 830m, 서변은 838m로 전체의 평면은 북변이 좁고 남변이 넓은 성벽으로 주위의 총길이 3.960m에 이르는 포곡식 성곽이다. 개암사에 보관되어 있는 개암 사지(開巖寺址)에 따르면 마한의 효왕(孝王) 28년(BC282)에 변한(卞韓)의 문왕(文王)이 진한과 마한(辰韓馬韓)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우(禹) 장군과 진(陳) 장군을 보내어 여기에 도성을 쌓고 좌우의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짓게 하여 동쪽은 묘암(妙巖) 서쪽은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하였으니 지금의 개암사는 그때의 개암동에 자리 잡았던 변한의 왕궁의 터라 전해지고 있다.이 산성은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자 복신 장군과 도침 등이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켜 피나는 항전으로 무려 4년간이나 백제부흥운동을 줄기차게 벌였고, 나당연합군과의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주류성으로 보고 있다."

 

                       

 

 

울금바위 아래서 좌측으로 무성한 대숲을 헤치고 오르니, 울금바위 아래 복신굴이 나온다.

 

                       

울금바위 복신굴

 

 

울금바위 복신굴이다. 큰 궁실에 작은 굴 두 개가 있는 구조다. 백제부흥군을 지휘했던 복신이 살았던 굴이라고 한다.

굴 안쪽에 바위틈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인 샘이 있다.

 

                       

동굴 위 바위 틈새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자라고 있다.

 

 

                       

 

울금바위를 좌측으로 돌아 뒤쪽으로 가 보니 깊은 굴이 있는데 이것은 베틀굴이다.

백제 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 해서 베틀굴이라 전해오고 있다.

울금바위에는 3개의 굴이 있다고 하는데 2개의 굴은 보았는데 나머지 1개의 굴 원효방은 어디에 있을까?

한참을 찾았다.

눈이 쌓여 길을 찾지 못하겠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울금바위 아래서 우측으로 가야 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눈이 쌓여 길을 찾지 못하였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해 본다.

 

 아쉬움에 元曉房에 대한 글을 옮겨 본다.

"개암사 뒤편 500m 떨어진 곳에는 우금산성 울금바위에 세 개의 굴이 있다.  좌측의 큰 동굴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무렵에 복신장군이 백제부흥을백제부흥을 위해 유민을 규합하여 성(城)을 쌓고 항전하던 요새이며, 원효방 두 개의 굴은 40~50m 바위 중간에 있다. 바로 이곳이 원효대사가 화쟁사상을 기반으로 삼국 통일 후의 민심을 모아 진정한 대업을 이룩하려고 한 원효방이다.  원효방은 차실(茶室)이며, 감천(甘泉)이 있는 소중한 차문화 유적지이다. 고려 문신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처음 관직을 맡게 된 변산반도에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한 수필집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원효방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다. 「1200년 8월 부령 현재(縣宰)이군(李君)을 비롯하여 다른 손님 일곱 명과 함께 원효방(元曉房)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높이 수십 길이가 되어 다리를 떨면서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는 듯했다. 종종 호랑이와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올라오지 못했다고 한다.  원효방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포성인(蛇包聖人)이 과거에 머물던 곳이라 한다. 그때 원효 대사가 이곳에 오자 사포가 대사를 모셨는데, 차(茶)를 다려 드리려고 했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게 생각하던 중 바위틈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나 차를 달였다고 한다. 원효방의 넓이는 겨우 여덟 자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삽살개 눈썹을 한 그는 다 해진 누비옷을 입고 있었으나 도(道)를 통한 듯한 모습이 고고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모셔져 있고, 외실에는 불상과 찻잔과 경궤(經櫃-불경 등을 넣도록 만든 함)만 있을 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중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蘇來寺)에 가서 하루 한 번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했다.」


눈에 파묻혀 산성의 모습이 군데군데 조금씩만 보이는 눈길을 걸어간다.

우금산을 넘는다.

점점이 이어진 변산의 봉우리들을 감상하며 걷는다.

부안의 전경이 한눈에 조망된다.

뒤편 멀리서 보는 울금바위 모습도 이채롭다. 

첩첩 히 이어지는 변산의 산봉우리 중 한봉 우리로서의 울금바위일 뿐이다.

걸어가다 우측으로 성벽을 넘는다.

얕은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능선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내려가니 개암제가 보이고 개암산천 음식점옆 도로로 내려선다.

시간은 13: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약 3시간 20분 걸린 산행 길이다.

 

                        

 

 

                        

 

 

                       

 

 

                        

 

 

                        

 

 

                        

 

 

 

우금산성(遇金山城) / 김 길 중

묘암(妙岩) 골 돌아드니 
우뚝 솟은 우금암(遇金岩)

기봉(奇峯)에 올라앉아
이리저리 살펴보니

덩치는 육중한 태(態)
만년이나 되었는가

울뚝불뚝 뚜박한 태(態) 
영겁(永劫)이나 되었는가

암하삼굴(巖下三窟) 숱한 사연 
풍황 복신 도침 충절(忠節)

고대명장(古代名將) 백제(百濟)의 꿈 
지금까지 전해오고

역사의 영고성쇠(榮枯盛衰) 
잊힌 듯 간직한 체

천년(千年)을 침묵(沈黙)하며 
그대로 서 있구나

저 숲에서 우는 새는 
귀촉도(歸蜀道) 울음인가

주류성(周留城) 부는 바람 
백제군사(百濟軍士) 곡성(哭聲)인가

산영(山影)이 드리운 곳 
능가법계(愣伽法戒) 개암고적(開岩古蹟)

은은한 풍경 소리 
도솔천이 저기구나

 

변산팔경(邊山八景) 중의 개암고적(開巖古跡) -개암사와 우금산성, 묘암골의 유서 깊은 유적지와 아름다운 경치- 을 본 것이다.

보령원 앞에서 바라본 울금바위의 모습이 신비롭다.

           

보령원 앞에서 바라본 울금바위의 모습이 신비롭다.

 

 

보령원 들어가는 계단길은 발자국이 하나 없이 흰 눈이 소복하다.

발목을 차오르는 눈을 푹푹 밟으며 계단을 찾아 디디며 오른다.

 

                        

 

 

                       

보령원

 

 

                       

 

 

보령원은 주류성에서 최후로 항거하던 백제의 부흥 군을 섬멸시킨 나당연합군 신라의 주장 김유신장군의 影廟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백제 부흥을 위하여 유민을 규합하여 최후까지 항거했던 풍왕과, 복신장군, 승 도침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모두 지워졌지만, 승자인 김유신장군의 기록은 남아 있고, 影廟도 웅장하게 서 있다.

 

보령원에서 나와 23번 도로를 걷는다.

차들이 오고 가니 또 신경이 쓰인다.

 

호벌치 전적지 앞에 도착한다.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50미터 내외의 조그마한 재가 있는데 '유정재'다.

 

이 '유정재'는 '호벌치'라고도 부른다.

호벌치란 지명은 7세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 와 주류성 일대에 통수부를 설치하였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예전에는 장광 80리라는 변산과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형적 구실을 했었다.

이곳에서 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 것이다.

 

전적지 앞에 민충사(愍忠祠)가 있다.

2009.5.18일 준공됐다.

              

민충사에는 호벌치 영령 145위의 위패를 모셨다.

 

              

 

 

                       

전적비

 

                       

 

전적비문에 새겨진 글을 옮겨 본다.

“의사 채홍국외 92명의 선비에 35명이 추가로 흥덕에서 왔으며 김홍원은 변산에서 이유는 도화동에서 유희방은 유정자에서 충성의 비분을 참지 못해 궐기하여 달려와 합세했지만 그 수는 천(千)이 못되어 수적으로 당하기 어려웠고 병기도 적과 같지 못하나 수십 회에 걸친 싸움에서 혹은 크게 이기기도 하고 혹은 패하기도 하니 그 공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남에 충분했으며 천의 군사로 수만의 군사와 싸워 왜적서쪽으로 향함을 막아 호남과 영남을 지켰음은 누구의 힘이었겠는가."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 (丁酉再亂 胡伐峙 餞鏑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이 언덕은 정유재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선현들의 넋이 서린 곳이다. 특히 채홍국과 그 아들들의 의로운 죽음은 이 지방 출신 의병들의 조국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왜적이 줄포만을 거쳐 부안읍에 쳐들어오자, 채홍국은 김영년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싸움을 벌였으나 적의 급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그러자 그의 두 아들 즉 명달과 경달도 나라를 구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었으나 그들 역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당시 이들과 함께 산화한 의병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전적비와 함께 순절비를 세웠다.

 

안내판에 전적지 한문이 戰蹟地가 아니고 餞鏑地로 되어 있어 무슨 다른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전별할 전자에  화살촉 적자를 썼으니 분명 의미가 있는 듯하다.

 

 백제 부흥 군의 원혼과, 왜적과 싸우다 산화한 충의로운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유정재를 넘어 남포리로 향한다

 

                         

천리 도요지

 

 

길가에 토기를 쌓아 만든 도자기 조형물이 보인다.

'유천리 도요지'에 도착한다.

 

                       

 

 

                        

 

 

                        

 

 

부안 유천리 도요지 (扶安 柳川里 陶窯址)                                            

사적 제69호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줄포만에 연접한 바닷가 야산 언덕에 자리 잡은 이 가마터는 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청자를 생산하던 곳이다. 전남 강진의 가마터와 함께 우리나라 청자의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약 40 여 개의 가마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대부분 도굴과 개간으로 파괴된 상태이다.  이곳에서는 순청자를 비롯하여 상감, 철희 , 진사청자와매병, 주병, 호, 탁잔, 주자, 발, 접시, 대접등을 생산하였고, 음각, 양각, 상감 등의 기법으로 국화, 모란, 구름과 학 등의 무늬를 새겼다.  이곳에서 생산된 청자를 제작기법이나 그릇의 종류, 문양등이 다양하고 뛰어난 것들로, 고려의 왕실과 귀족에게 공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터에 오르니 언덕 기슭은 붉은 흙으로 덮여있다.  

눈앞 으르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멀리 곰소만이 바라보인다.

오늘의 종착지로 정한 반계유적지가 있는 우동리를 향하여  지친 발걸음을 내딛는다.

 

                       

 

 

반계유적지 삼거리가 가까운 곳에 민박집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전화로 확인하니 민박이 가능하단다.

오늘은 이곳 우동리에서 자고 내일 새벽 바디재를 넘어 청림리를 거쳐 사자마을로 가  등로를 따라 봉래계곡 직소폭포 월명암을 거쳐 지서리,

변산까지 가리라 작정한다.

황토민박집에 도착하니 16 :30분이다.

 

 

                        

 

 

주인이 안내하는  방안에 들어 짐을 푼다.

방도 뜨뜻, 물도 뜨뜻, 천장이 높으니 시원해서 좋다.

벽에 있는 횃대에는 메주가 걸려있어, 옛날 어린 시절에 살던 시골 고향집을 생각나게 한다. 

기름보일러 난방이 아니고 장작을 때어 난방을 한다고 한다.

민박집에서 저녁을 먹고, 지도를 펴 놓고 내일 갈 곳을 점검하고 메모를 하고 있으려니, 주인이 귤과 곶감을 내놓는다.

약재를 끓여 놓은 것이니, 주전자 속 물을 먹어라고 한다.

친절하게 변산과 우동리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내일 아침은 먹지 않고 7시 30분에 떠난다고 하니, 아침에 간단하게 계란 프라이를 준비해 주겠다고 한다.

극구 사양했으나 막무가내시다. 빈 속에 추운 길 걷기 힘드니, 속을 채워야 한다고...

그는 시골 선비임에 틀림없다.

 

TV에서는 오늘 밤 부안에 대설경보가 내려졌다고 한다. 또한 내일까지 폭설은 계속된다고 한다.

씨를 발라가며 곶감을 먹는다.

민박집에서의 밤은 자꾸 깊어만 간다.